마음이빚진

시계1

나어릴때 2012. 3. 21. 03:45


문화창작집단'날'의 공연 "시계1"을 봤다. 작은음악회와 함께하는 연극이라기에, 기왕이면 박준아저씨가 나오실 때 보고 싶어 종아리에 매달린 여독ㅠㅜ을 끌고 기어이 오늘. 기대도 없었는데 오프닝으로 민중가요의 전설 김호철님의 연주와 노래까지, 박준아저씨는 윤민석님의 "편지5"와 "탈환"을 부르셨다. "탈환"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참 힘나는 노래다^^



오세철 교수님의 해설로 시작된 연극, 무대 위에는 세 개의 시계가 달린 문을 각각 통과하는 인물들의 세 가지 이야기가 따로 또 같이 교차하며 흐른다. 혼란스런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각자의 예술과 혁명을 꿈꾸며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던 연극인들의 거꾸로 가는 시간, 젊은 날의 파릇한 열정과 사랑이 무색하게 생활에 피폐해지고 흩어져버린 옥쇄파업 이후 쌍차 가족들의 초침만 흐르는 시간, 그리고 예술과 학문과 혁명의 원칙이자 '자기증식능력'을 가진 술의 오원칙이기도 하다는 '고저불문, 청탁불문, 원근불문, 주야불문, 생사불문'을 화두로 돌고 도는 술잔처럼 반복되는 인간사의 아이러니를 풀어내는 해설자의 멈춰있는 시간.

일인이역의 배우들은 한국전쟁과 '당신과 나의 전쟁' 사이를 분주하게 오간다. 반 세기 넘게 떨어져있지만 참 많이 닮은, 개인과 사회를 짓누르는 숨막히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울부짖고 고뇌하고 때로는 웃고 꿈꾼다. 그리고 술잔을 기울인다.

자기 방식대로의 혁명을 위해 '해방전쟁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하던 일을 하며 죽음을 맞으려는 연극인의 고뇌는 무겁고 아프다. (어찌됐건 평시에) 무참하게도 고립된 전쟁을 겪어야 했던 쌍차노동자와 가족들의 이야기는... 발랄하게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딸과 선배동지의 투쟁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의 투쟁을 준비하는 딸의 남친이자 젊은 비정규직노동자의 존재로 생기를 잃지 않는다.

공연 리플렛에서 말하는 시계의 의미, 새로운 해석 같은 것보다 더 큰 울림은 사실 "반도체소녀"를 보고 처음 알았던 때의 그 마음 그대로, 이런 연극을 고민하고 무대에 올려주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중간중간 마음에 와서 박히는 대사들이 몇 군데 있었는데.. 총기 박멸된 지 오래다 보니 문장을 기억하는 건 미션임파서블. 그래서 연극을 보고 나면 자주 희곡이 궁금해진다. 그럼에도 쌍차 노동자 부부가 이십 년 전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장면, 어긋남을 확인하는 장면을 보며 느꼈던 어떤 공감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관계의 충만함과 양립할 수 없는 상황은 불가피하고, 그로부터 생겨난 외로움과 공허를 메우는 일에서는 엉뚱한 것들이 배불리는 세상. 내 식으로 비약하자면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전방위적인 소외가 한 인간에게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바로 절절한 외로움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연극입니다.", 해설자는 말한다. 연극은 간질하게 행복한 쌍차 노동자 가족들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마무리되었다. 비록 지금은 초침만 도는 시간일망정 멈춰서지 않고 새로운 에너지가 보태진다면... 그럴 수 있겠지? 그랬으면 참 좋겠다. "그대 사랑한다 말하지 말고 내 곁에 있어줄 수 없나요. 그대 걱정한다 말하지 말고 그저 곁에 있어 줄 수 없나요. ..." 마지막에 흐른 이 노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