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1. 11. 15. 20:24

 

 

나와 윤도, 무늬, 희영, 태리 그리고 나미에 언니와 태란 누나. 많지 않은 주요 인물들 사이의 얽히고 설킨 관계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디테일한 연결고리를 만든 작가의 고심과 좀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함께 받으며 읽었다. 작은 동네에서 가족으로 친구로 지인으로 교차되는 인연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장편의 긴 호흡을 감당하기 위한 극적인 장치와 다양한 사건들의 연쇄가 필요하기 때문일까 싶었는데, 이전 중단편들의 딱 떨어지는 느낌을 장편에서 기대하는 게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뜨기 놀이의 손가락들처럼 촘촘하게 이어진 인물들의 마음을 따라가는 이야기는 엄청난 몰입을 선사해서, 간만에 아침이 밝아오는 걸 보며 책장을 덮었다.

존중받을 수 없는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는 절망 속에서 나를 사랑하는 태리와 윤도를 사랑하는 나. 금 간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태리를 무시하고 외면하며, 둘만의 세상 밖 윤도에게는 자신이 거부한 태리와 다를 바 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집착하는 나. 어쩌면 많은 비밀과 여러 겹의 가면으로 스스로를 배반하면서 가장 괴롭게 사랑을 이어갔을지 모를 윤도. 세 사람의 상처와 진심이 애달파서 읽으며 자주 마음이 시려왔다. 당차고 씩씩한 무늬가 은근 절친이어서, 나미에 언니의 사랑을 얻지 못해도 다음 수를 생각하며 용맹정진하는 아이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공부 안 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전교 1등하고 그러는 아이들의 세계를 모르는데 역시 대학원에서 소설 공부한 작가는 이런 세계를 그릴 수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고, 당사자들의 깊은 고뇌가 안쓰러우면서도 엘리트들은 결국 상처를 이겨내며 성장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딴지는 아니고, 뭐랄까. 수구적인 이성애 중심사회에서 차별과 혐오의 극단을 경험하는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분투하며 사랑을 끌어안고 성장하는 것만도 충분히 힘겨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른이 된 이들이 모두 너무 어엿한 사회인의 외피를 두르고 있어 그 매끈함에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에서 좀 더 다양한 층위에 속한 인물을 만나고 싶고 어쩌면 세계의 그늘을 집약한 총체성을 보고 싶은 허황된 욕심일 수도 있겠다만. 

주인공들이 2003년 봄부터 2006년 겨울까지 살면서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했던 D시, 작가는 말미에 '소설 속 일부 지명은 실제에서 빌려왔으나 어디까지나 가상의 공간이다. 인물과 사건 역시 모두 허구이다.'라고 썼지만 이조차 소설의 한 구절처럼 느껴질 정도로 배경도 인물들도 생생했다. 작가는 아니라지만(미안) 수성못이 있는 D시는 친척의 팔할이 살고 있어 어렸을 적부터 자주 갔던 도시였고 지금도 여러 친척들이 살고 있다. 지역 주민들이 즐겨찾는 유원지였다가 놀이기구 사고로 누군가 목숨을 잃고 자물쇠를 닫아건 머큐리랜드와 함께 어둡고 퇴락한 공간이 된 수성못은, 수십 년 동안 띄엄띄엄 방문했던 공간이어서 읽으며 나도 모르게 소환되는 기억 속 순간들이 있었다.

언젠가 사촌과 밤의 수성못을 산책한 기억이 가장 선연한데, 그때는 왜인지 [비포 선라이즈]의 불 꺼진 놀이공원이 떠올랐지만 이번엔 외로운 소년들이 밀쳐지고 떨어졌던 검은 물의 이미지가 더해졌다. 책을 읽기 얼마 전 작가가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엄마의 메시지까지 본 터라, 말미의 단언은 독자에게 제안하는 게임이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다. 막장드라마 악역 배우의 등을 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민망하지만, 내가 이야기에서 빠져나오면 다시 소설이 되겠지.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다른 작품이 떠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창작자에게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떠오른다는 것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므로 어쩔 수 없고, 이번에도 어떤 장면들에서는 반복적으로 자동 연상되는 영화들이 있었다. 나와 윤도가 주고받는 청신한 설레임에 영화에서는 현재의 대화로만 유추 가능하고 과거의 그림으로만 등장했던 [마티아스와 막심]이 어린 시절에 주고받던 감정이 저렇지 않았을까 싶었고, 컨테이너 장면에서는 마지막 파티의 창고에서 목도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수성못까지 굳이 배달 오토바이를 타는 윤도와 내가 느끼는 떨림과 일체감을 마주할 때마다 [썸머 85]며 그 옛날 [아이다호]가 떠올랐다. 단 한 사람과 밀착해 질주하는 순간의 해방감과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듯한 충만감을 응축한 오토바이 장면은 어느 정도 클리셰가 되었지만, 반복되어도 강렬한 전율은 상쇄되지 않는 것 같다. 

이미 어른이었던 2003년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데, (다시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들었지만) 미니홈피니 폴더폰, 책 대여점 같은 당시 일상을 구성하던 주요한 요소들을 마주하니 흐른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을 기억하게 만드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문외한인 나는 알 수 없지만 만화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언급되는 작품들 중 반짝하고 찌릿하는 공감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중학생의 영화'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중경삼림]과 [해피 투게더]가 반가웠다. 물론 마스터피스의 현재성을 보유한 작품이고 얼마 전 재개봉을 했었고 그때 영화를 봤던 터라 과거를 상기하는 매개의 기능은 약했지만, 언급될 때마다 흐르는 시간에 퇴색되지 않는 사랑의 고유성과 보편성 같은 걸 환기하는 느낌이었다.

나이만큼 세월에 가속도가 붙는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어릴 적의 시간들은 아직 세상에 익숙해지지 않은 존재가 가진 온갖 궁금증과 왕성한 혈기 때문에라도 농도와 밀도가 높았던 것도 같다. 소설 속 인물들만큼 격정적이거나 극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읽으며 나의 학창시절과 그때 내가 우정을 나누고 사랑했던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부친상 빈소의 옥상 건물에서 말끝을 흐리는 윤도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나의 마음, 그때의 그 감정을 그 자리에 남겨두는 결단과 용기를 통해 어쩌면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진 일상에는 여전히 작은 구멍이 존재하고, 시간이 더 흐르면 그 작은 구멍 속의 마음도 서서히 희미해지겠지. 너무 아픈 사랑이었지만, 모든 걸 걸었고 그래서 미련도 남지 않은 한 시절의 기억이 있다면 희미해지더라도 공허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헛헛해지는 날이면 장우동 정식을 먹으면 되지 않을까, 약간 최후의 승자 같은 장우동이 우리 집 근처에도 영업 중이다.


박상영
2021.9.27.초판인쇄 10.8.초판발행, (주)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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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1. 14. 14:17

 

 

책 모임의 11월 책이었다. 엄밀하게 지켜지지는 않지만 성원들이 돌아가면서 추천을 하는데, 두어 달 전 합류한 이의 순서였다. 두 권을 공유했는데 한 권은 품절이고 다른 한 권은 과반수가 이미 읽은 터라 다시 추천한 책이었고, 나는 예전에 읽었지만 내용을 까먹은 데다 초심자의 세 번째 시도였기 때문에 다시 읽어보겠다고 했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이 한창 나오고 인기를 끌었을 때 몇 권을 연달아 읽었다. [남쪽으로 튀어]는 꽤 좋아했었고, 당시 서울극장에서 열린 일본영화젠가 하는 데서 일본판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다. 오래 잊고 있었는데 오쿠다 히데오의 신간은 꾸준히 발간되고 있었고, 이 책의 온라인서점 페이지 중 출판사 제공 카드리뷰에는 '공황 장애 앓고 있던 정형돈이 읽고 펑펑 울었다는 그 책'이라는 문구가 민망할 정도로 크게 적혀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 잊어서 처음 읽는 것 같았는데, 가장 의아하고 새롭게 다가왔던 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간호사 마유미에 대한 성인지적 관점을 결여한 묘사와 서술 그리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그러한 분위기였다. 캐릭터에 생생함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안이하고 평면적인, 중년 남성의 시각을 여과없이 투사한 것이어서 읽으며 불쾌하고 짜증스러웠다. 그냥 괴짜 의사 이라부와 간호사 마유미라는 '특이한 2인조'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대도 전개와 맥락 상 필수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일본에서는 수십 년에 발간된 것일까 찾아보았으나 2004년작이었다. 과거의 내가 책을 읽으며 어떻게 느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먼 과거는 아니지만 그간 사회적 인식이 급격히 변화한 것만은 분명하고 나 역시 그 자장 안에 있으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다섯 편의 옴니버스 소설이 묶여 있는데, 한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전문 직업인이 불시에 찾아온 이상 증세에 시달리다가 신경정신과 의사 이라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상담과 소동을 겪으며 치유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내용이 반복된다. 모두가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이라부의 치료 과정이 비상식적이고 사회적 금기의 경계를 오가는 행동을 수반하기도 하는 데다 진지한 접근은 없다. 작가가 애초 전달하고픈 메시지를 정하고 그에 맞는 구체적인 상황과 캐릭터를 구성해서 엮은 목적이 분명한 소설들이라고 느껴졌다.

누구나 조금씩 겪고 있을 신경증적인 현상을 보여주고 가볍고 부담없는 터치로 인과 관계를 밝히고 당사자와 주변의 심경 혹은 행동 변화를 통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는 것. 당신만 그런 거 아니고 사실 유명인들도 전문가들도 다 그래, 심각한 거 아니고 편하게 생각하면 돼, 다른 사람 의식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해, 스스로를 억압하지 말고 정말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시도해 봐, 이런 뻔한 문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의사 이라부를 내세운 작가의 메시지는 이런 것 같다. 어느 정도 통했으니 내가 빌린 5년 전 책이 169쇄를 찍었겠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15년도 더 전에 나온 책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재미는 없었다. 현대인의 신경정신과적 증상과 질병과 치료는 어느새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일이 되었고, 위로와 힐링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이미 여러 버전과 유행으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인지 이 책의 방식은 시대착오적이고 구태의연하게 느껴졌다. 특히 난무하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무척 불편하고 심각한 수준이어서 여전히 읽히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책 덕분에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극적인 상황 전개나 캐릭터의 생동감 등을 위해 동원되는 문제적인 표현의 사용과 수용에 관련된 것이었다. 어떤 작품이든 과거에는 용인되었지만 시대 변화와 인식의 진전에 따라 문제로 부각되는 지점들이 있을 수 있고 사람에 따라 느끼는 진폭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관용적 표현이 고조된 인권의식이나 윤리적 기준에 의해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그러한 대사나 상황, 인물 등이 작품 속에서 어떤 개성을 부각시키거나 현실감(?)을 고양하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고 작가의 메시지나 의도와는 무관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영화 중에 [무뢰한]이 있는데 전도연이 납치되어 어느 호텔방에 감금된 장면에서의 대사와 상황은 그 영화를 다시 볼 용기를 앗아갔다. 실제 일어날 법한 일이니 에피소드로 넣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노골적이어야 하는지 의문이었고 길지 않은 장면에서 느낀 극도의 불편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다양한 인물들과 극적인 사건들로 가상의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언제나 인권적이고 윤리적인 대사를 구사하는 인물을 등장시켜 상황을 풀어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에는 갈등 구조의 중심에 선 인물도, 악역도 필요할 테고 그를 통해 극적 긴장과 완성도도 높아질 테니까. 그러나 재미와 흥미를 위한 극단화보다는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한편 물리적 폭력이나 살인 같은 장면들도 높은 빈도로 주요하게 재현되는 영화의 표면과 표현을 생각하면 너무 뜬금없는 생각일까 싶기도 하다.

생각의 갈피가 너무 헤쳐졌는데, 이런 부분은 누가 정리한다고 그렇구나 할 문제는 아니니까 앞으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가끔 떠올려봐야겠다. 책에 대해 너무 박한 감상만 남겼는데, 다섯 편의 단편에 등장한 내담자들이 느끼는 이상 증세에 대한 작가의 서술 중에서는 공감되는 부분이 아예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시껄렁하고 얕은 접근을 별로 신뢰하지 못하는 독자이기 때문에 나와는 맞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책 덕분에 살게 된 후로는 처음으로 통영도서관에 갔고 대출증을 만들었다. 예전에 여행 왔을 때 작고 아담한 도서관이 마음에 들어서 서가를 한참 구경했었는데, 정작 이사한 후에는 이따금 문을 닫을 때도 있었지만 염두에 없었다. 가끔 도서관에 가는 주민이 되어야지.


오쿠다 히데오•이영미 옮김
2005.1.15.1판1쇄발행 2016.6.13.1판169쇄발행, (주)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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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1. 13. 11:57

 


정세랑 작가의 글을 에세이로 처음 만났다. 제목은 익숙한 많은 화제작들이 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았고 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도 넷플릭스를 보지 않는 탓에 이따금 포털사이트 기사에서나 접했다. 초능력을 가진 존재라거나 지구와 우주를 넘나들고 시공을 초월하거나 하는, 인간 세계와 질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많은 소설과 영화 들이 나온 지 한참이지만, 고루하고 보수적인 데다 상상력도 일천한 덕에 내게는 그런 작품들에 대한 심리적인 진입 장벽이 존재한다.

그래도 궁금했던 작가였는데 마침 여행 에세이라니 반가웠다. 2012년 뉴욕과 아헨과 오사카, 2014년 타이베이와 런던에서 보냈던 날들의 기록이 꽤 두툼하게 묶여 있다. 가봤거나 가려고 애쓴 적은 없었던 곳이어서 궁금했던 작가를 처음 만난다는 기분으로 읽기에 적당했다. 잘 나가는 작가여서 세계 여행도 많이 다녔나? 은연중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은데, 책장을 펼친 지 얼마 안 되어 이 책을 여행 에세이라고 이해한 건 그저 내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지낸 기록이니 여행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십 년쯤 전 작가의 고민과 생각, 일상이 담겨 있는 일기에 더 가까운 기록인 것 같다. 

글쓰기와 편집일을 병행하던 작가는 퇴사를 했고 뉴욕 유학생인 절친은 졸업을 앞둔 시점, 시차를 맞춰 메신저로 나누던 대화가 뉴욕행으로 이어졌고 첫 번째 도시로 등장한다. 강권을 이기지 못해 친구의 집에서 머문 덕에 뉴욕 한복판에서 2주를 보내며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현대미술이나 관심 있는 장소를 부지런히 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바들이 세심히 기록되어 있다. 잠시 스치는 낯선 이들과의 의도 없는 가벼운 대화와 친절에 마음이 환해지고, 바쁜 시간을 쪼갠 친구와 함께하며 여행자에게는 열리지 않는 뉴욕의 모습을 경험한다. 센트럴파크에서 마주친 주인 잃은 토끼 인형을 무심코 찍었던 일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길에 버려진 물건을 그 상태 그대로 사진에 담는 취미가 생겼다고 했다. 배경이 된 영화들이 몇 편 떠올랐지만 정말 유명한 몇 군데 외에는 낯설었는데, 그럼에도 영화 [타인의 친절]에서 보았던 어두운 뒷골목이며 도서관, 식당과 교회와 병원 같은 곳이 떠올랐고 혹시 어떤 장소는 겹쳐 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아헨은 독일의 도시라는 것 외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챕터를 읽고 나니 조금 아는 곳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을버스로 네덜란드에 장을 보러 갈 수 있고 벨기에와도 면한 국경에서는 몇 걸음으로 세 나라를 오갈 수 있다니 괜히 나까지 설레었는데, 작가가 머물렀던 시절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테러들로 지금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 되었을 것 같아 아쉬워졌다. 아헨 편에는 독일의 여러 도시와 브뤼셀 등을 짧게 여행한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덕분에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배낭 여행이 떠오르기도 했다. 난생처음 탄 국제선의 첫 목적지였던 프랑크푸르트, 맥주 공장의 작은 기념컵이 아직도 집에 있는 하이델베르그, 전혜린을 떠올리며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걸었던 뮌헨의 슈바빙, 전쟁과 분단의 잔해에 숙연해지면서도 자유로운 거대 도시의 공기가 느껴졌던 베를린. 다시 갈 수 있을까 싶은 독일의 곳곳, 당시 베를린 유학 1개월 차였던 친구의 작은 방, 이제는 여행처럼 과거가 되어버린 친구가 떠올랐다. 동행의 친구들과 나눈 짧지만 깊은 우정의 경험이 인상적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을 달리해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건 특별한 유대감을 만드는 것 같다.'고 작가는 썼는데, 아주 잠시지만 나도 있었던 공간에 대한 글이 마음에 또 하나의 레이어를 만들어준 기분이었다. 

어릴 적부터 친한, 엄마와도 편하게 연락하는 친구를 만나러 간 오사카 여행은 엄마와 함께다. 아르바이트에 바쁜 중에도 짬을 낸 친구와 매일 만나고, 엄마와 함께 미술관이며 문학관 등을 여행한다. 오래 지연된 책 쓰기의 동력이라며 소개한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한 신사를 찾아갔다가 마침 어머니의 기일을 맞은 여성이 작가와 어머니에게 차를 대접하고 주위의 좋은 곳들을 소개하고 알려주며 훌쩍 6시간이 흘렀다.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다시 돌아온 여성이 마지막으로 데리고 간 13세가 된 여자 아이를 위한 계단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소원한 관계지만 사촌 언니가 둘이나 살고 있는 일본을, 나는 그 옛날 유럽 배낭여행 가는 길 환승을 위해 내린 간사이 공항 안에서만 잠시 유했을 뿐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같은 영화를 본 후에야 일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코로나19 시국이 잠잠해지면 가장 먼저 하코다테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다시 먹었다. 

타이베이는 아헨에 함께했던 친구와 결혼한 작가가 원한 안전하고 쾌적한 신혼여행지로 등장한다. 이주단체에서 다년간 일하며 아시아의 다양한 나라들에서 온 이들을 수없이 만나고 함께했으면서도 아시아를 궁금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던 나로서는, 아시아인만큼 아시아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며 "첨밀밀"에 감흥할 수 있는 공감대부터 동년배 아시아 작가들의 네트워크까지 고민하는 작가의 미래지향적이고 열린 감각과 사고에 약간 경의의 마음이 들었다. 제국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게 아시아는 대충 덥거나 불편한 곳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고,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중 몇 편을 좋아했지만 이상하게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멀지 않은 대만이나 홍콩은 2년 전까지만 해도 참 쉽게 갈 수 있는 곳인데, 이삼 일의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부럽다고 느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책을 읽고도 별로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아시아 문단(?)의 일원으로서 작가가 화두를 던진 이야기들은 서구로부터 역유입되는 아시아에 의구심없이 익숙해진 스스로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만들기는 했다. 

마지막 장소는 런던, 영화 [갬빗]을 보고 자동으로 응모된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왕복 항공권이 여행의 시작이다. 어딘가에는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사람도 있으니 왕복 항공권에 당첨되는 사람도 있겠거니 하지만 놀라운 일이다. 한때 비틀즈에 빠져 언젠가 런던과 리버풀을 꼭 가보겠다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문학 작품은 당연하고 미디어 시리즈물도 즐겨보는 듯한 작가에게 런던은 훨씬 다양한 레퍼런스를 보유한 도시였다. 잘 보존된 찰스 디킨스의 흔적들을 음미하고 어쩌면 작가와 상통하는 세계관의 보유자일까 싶은 로알드 달의 뮤지컬을 관람하고, 셜록 홈즈와 해리 포터의 촬영 장소를 찾아간다. 런던행 소식에 전해진 지인들의 추천을 따라 음식을 먹어 보고 차를 마시고, 여러 미술관을 돌아보고 거리의 공공 예술 작품들을 경험하고 마음에 든 거리를 걷는다. 작은 행운들과 좋았던 것들을 기록하고, 공항에서 잃어버린 빨간 부엉이 지갑에 대해서는 덕분에 분실물 사이트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쓰고 혼자 런던을 더 여행하고 있으리라는 상상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내가 읽은 '여행기' 중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많이 담겨 있는 책이 아닐까 싶었고, (당연히 아니겠지만) 작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라면 이런 경우 편협한 독자인 나의 반응은 다소 짜증스러움을 느끼는 편인데 유명 작가이지만 내게는 초면인 그와 그의 가족과 친구 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한 내용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읽으며 새로운 사람들을 소개받는 기분이 들기까지 해서 좀 신기했다. 실은 장소가 바뀔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다정한 친구들이 나 역시 사랑스러웠고 헤어질 때면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는 작가와 그들의 우정이 부러웠다. 활자로도 그 밝고 환한 기운이 전달되는 것 같아서 나도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지난 나의 여행길에도 분명 존재했던 친절한 사람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작가의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지만 '정세랑 월드'의 온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많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살아 있는 상태가 너무 신기하지 않은지? 꼭 개인적 얘기, 사람들 얘기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렇다. 지구가 초속 30킬로미터로 빙글뱅글 날아가고 있는데 그 위에서 온갖 동식물이 38억 년 동안 생겨났다 멸종했다 하며 보글보글 지내왔다는 것이……. 우주는 죽어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어떻게 다들 살아 있지? 거의 매일 놀란다. 심장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뛰었다니? 신경을 쓰지 않는데 호흡이 계속된다니? 산책만 나가도 흥미로운 발견을 하고 화분에 새잎이 나면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다. 다른 요인들도 있지만 환경주의자가 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아팠던 청소년이 쉽게 경이로워하는 어른으로 자란 것이다. ... 어둡고 죽어 있는 우주에서 기적 같은 지구에 산다는 것이 신기해, 냉소와 절망에 빠졌다가도 빨리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400쪽에 가까운 분량에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었는데, 불과 십여 쪽만에 나온 이런 구절에서부터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한 도시에 머문 경험을 중심으로 묶인 글이지만 이야기들은 그 여행이 가능했던 맥락과 배경, 여행지에서 받은 인상과 사유는 물론이고 일상과 문학을 넘어 인간 세계의 다양한 문제들로 금세 도약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참치캔에서 바다-풍요 정도로 이어지는 예전 어떤 시트콤의 말풍선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하나의 키워드에서 자동 연상되는 다른 이야기로의 점핑이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점도 유쾌했다. 구체적인 팬이나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부분들도 몇 군데 있었는데, 모두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다정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았으니 그런가 보다 했지만, 작품에 녹여낸 에피소드의 출처라거나 어떤 작품을 쓰게 된 경험 같은 것들도 자주 소개되니 팬이라면 선물 같은 책이겠구나 싶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고 가고 싶어하는 장소들에 대해서도 쓴다면 읽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가능할 것 같지 않으니, 그의 소설을 한 편씩 읽어볼까 싶어졌다. 



정세랑

2021.06.01초판1쇄인쇄 06.10발행, (주)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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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1. 2. 23:44

 

 

읽으며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을 오갔고, 작품의 편차라기보다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기복과 낯설음 때문이었다. 몇 달 전 갑자기 usb가 필요한 일이 생겼는데 마침 책을 주문하려는데 이 책을 사면 usb를 주길래 낯선 작가의 소설 읽기를 즐기지는 않지만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젊은 작가의 작품에서 좋은 느낌을 받은 일이 종종 있어서 불과 두 단어인데도 심심한 듯 다정하고 좀 외롭게도 느껴지는 제목에 커다란 나무와 그늘과 빈 벤치가 있는 표지도 마음에 들어서 그러니까 시시콜콜한 여럿의 우연이 겹쳐 읽게 되었다.


별 생각없이 펼쳤는데 첫 번째 소설에서 [티보 가의 사람들]이 등장해 와락 반갑고 들뜨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티보가의 사람들]은 살면서 읽은 소설 중 가장 긴 작품이고 별권까지 여섯 권이나 되는 책을 두 번 읽은 것은 유일한데 앞으로도 살면서 한두 번은 더 읽을 생각이 있다. 수십 년 전의 일이고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지만 [회색 노트]에 사로잡혀 마음에 푹 담고 지낸 시간이 길었고 [티보 가의 사람들] 연작 중 1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읽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한참 안타까워하다 또 한참 잊고 지내다 전권이 출간되었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기도 했다. 살면서 자주 떠올리고 아주 가끔 주변에 이야기한 적도 있지만 읽은 사람은커녕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던 나의 사랑하는 책이 이렇게 불쑥 튀어나와 마주치는 순간은 약간 운명인가 싶은 착각을 선사했다.

오- 반색하는 마음이 되었으나 잠시였고 표제작인 [우리의 사람들]은 짧은 분량 속에 여러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각개의 이야기들은 서로 상관없는 듯 이어져 있지만 어쩐지 하나의 결을 가진 듯 느껴짐에도 어떤 부분은 무척 지루하고 어떤 부분은 무척 생생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다. 부산 어딘가에서 결혼해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나와, 매년 온양의 호텔방에서 새해를 맞으며 침대에 누웠을 나와, 좀은 어정쩡한 관계의 사람들과 함께 새벽의 숲에 찾아간 나의 이야기들은 어딘가 비슷하게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라고 느껴졌지만 가장 인상적이고 공감이 됐던 지점은 수십 년째 텐트연극을 하는 사쿠라이 다이조에서 대해 “뭔가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오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매번 끊임없이 이걸 왜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때 직접 듣게 되었다”고 표현한 부분이었다.

나는 작가를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고 당연히 그의 문체나 개성에 대해 아는 바도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두 번째 소설인 [건널목의 말]을 읽으면서도 어딘가 관찰하는 마음이 되었는데 언젠가 나도 지나쳤던 구체적인 지역과 지명이 나오는 덕에 활자를 따라가는 입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나에 대한 상상이 거듭되자 전혀 근거없음에도 어쩐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반점도 따옴표도 없이 반복도 반전도 생각도 대화도 일렬로 나열되는 극단의 만연체 문장은 개성이라고 감안하기에는 절반쯤의 가독성만을 지니고 있어서 그 길게 이어지는 문장만이 담아낼 수 있는 고유한 감성과 호흡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다는 기분이 들고는 했지만 이상하게 그만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작가의 문체에 별로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입장에서 반말의 서술어가 이어지는 중 튀어나오는 경어는 꽤 느닷없이 느껴지고 그나마의 몰입을 깨는 달갑지 않은 변화였지만 불현듯 등장하는 파격의 서술어가 흐름을 끊을 수 있다는 걸 작가가 모르지 않을 테니 의도를 가지고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과문한 탓에 불필요한 치기처럼도 느껴졌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거기에도 조금은 익숙해지게 되었다. 뭔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떠오르는 단어들을 따라가며 떠오르는 대로 다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문장과 이야기들로만 소설을 쓴 건가 싶기도 했는데 차례로 읽다 보니 어쩐지 기분만 가득한 소설인 것 같다는 느낌과 달리 아주 구체적인 현재적 공간들과 작가가 면밀히 조사하고 삽입한 듯한 역사적 사실들이 정교하게 직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탓에 자꾸만 작가와 '나'를 동일시하게 되는 부작용은 있었지만 그런 오해 덕분에 아주 옛날에는 인간도 겨울잠을 잤다는 사실에 마음을 조금 기대고 적당한 온기를 품고 적당한 침잠을 보유한 채 조용히 살아가면서 다른 장소를 꿈꾸고 떠돌기도 하고 상상하기도 하면서 지난 시간의 사람과 일 들을 생각하고 곱씹기도 하는 어떤 구체적인 사람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했다. 일곱 편의 소설이 '나'가 겪은 일들을 이어놓은 연작처럼 생각되기도 했고 특히 자주 거론되는 부산의 곳곳 중에는 나도 알고 있거나 가본 적이 있는 골목이거나 장소인 것 같아 전혀 그럴 일 없음에도 과거 어느 때인가 모른 채로 작가를 마주치거나 스쳐간 적이 있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했다.

묘사된 바는 없지만 어쩐지 무채색의 옷을 즐겨입고 낮은 소리로 웃을 것만 같은 '나'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뇌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따라 부유하듯 살아가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 사회와 장소의 지난 편린들을 통해 세계를 낯설게 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관심하고 기록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모호하고 불안하고 외로운 세계의 초상을 요즘의 어떤 작가는 이렇게 재현하는구나 싶으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장소와 함께 현재적으로 소환하고 해석이나 해설은 생략하는 방식이 주는 환기가 신선하게도 느껴졌다. [미래 산책 연습]을 읽으며 더욱 그러했는데 [빈첸시오 살아서 증언하라]를 읽으며 전율하고 [꽃들]에 실린 시들을 애써 외우기도 했던 시절과 한참 후 '나'와 같은 이유로 [밥 딜런 평전]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등장하는 부산의 곳곳과 손목서가에서 [회색 노트]를 산 '나'가 마음에 들었다.

 

"밥 딜런은 1962년 초 봄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를 썼고 그는 초연을 하기 전 "지금 부를 이 곡은 저항곡이 아니며 그런 식의 무엇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저항곡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누군가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것을 쓸 뿐이다"라고 소개했다. 이후 딜런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응하여 「폭우가 쏟아지네」(A Hard Rain's a-Gonna Fall)을 쓴다. 이후 해당 곡의 초연을 듣기 위해 카네기홀에 모인 청중 모두 「폭우가 쏟아지네」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카네기홀의 청중은 딜런의 새 노래에 감동받았고, 몇주 후 실제로 미사일이 발견되자 그들은 경악했다. 이 부분을 읽다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이 아니에요. 나는 이 책의 번역자는 광주라는 사건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그후 시간의 의미를 묻고 답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1980년 5월에 그들 자신이 광주에 있었다면이라는 가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음을 역시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이 반복한 것은 그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이 아니라 그때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미국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미래를 연습하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불을 붙인 이후의 시간을 미래라 생각하였을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런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인지 그가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믿고 살아내어 미래를 현재로 끌어다가 반복하여왔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 [미래 산책 연습] 중

 

본문의 일부를 막 옮겨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라 옮겨둔다. '나'의 내면과 행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교차하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 처음엔 낯설고 생경하고 어딘가 불편하기까지 했지만 갈수록 빠져들어 마지막 소설까지 읽으며 이런저런 느낌들이 많았는데 마음에 들게 정리할 수가 없다. 그래도 나를 위해 기록해두고 싶어 마구잡이로 적었는데 어줍잖게 작가의 문체를 흉내낸 꼴이 되었네. 죄송합니다. 아무려나, 초면이었지만 이제는 알게 된 한 작가의 소설들 덕분에 소소한 삶의 뒤에 자리한 깊은 세계를 감지한 느낌이다.

 

 

박솔뫼
2021.2.10.초판1쇄발행, (주)창비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0. 31. 21:21

 

 

매력적인 대상이나 문구에 혹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순간 껌뻑 넘어가곤 하는 홍보 덕에 내게로 왔고 이번의 미끼는 "디디온은 내 수호성인이다. 그의 진실들은 작은 칼이며, 표면을 뚫고 삶, 특히 캘리포니아의 삶이라는 환상이 피를 흘리게 한다."라는 매력적인 추천사를 붙인 그레타 거윅이었다. 저자는 1934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출생했고, 약 50년 후 그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레타 거윅은 고향에 대한 애증과 추억을 담은 영화들을 찍고 이국만리에 사는 나까지 그 영화들을 보았고 하여 궁금해졌는데, 해설까지 읽고 나니 그레타 거윅에게 조앤 디디온은 살아있는 우상일 수 있겠다 싶어졌다.

수록된 글들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 1965~67년에 잡지에 기고한 것이다. 1부 '황금의 땅 라이프스타일'에는 당시 미국에서 이미 벌어졌거나 벌어지고 있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현상이나 이슈가 된 사건들에 대해 다각도로 조명하고 묘사하고 참여관찰한 기록들이 묶여 있고, 2부 '개인적인 글들'에는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3부 '마음의 일곱 장소'는 저자의 고향과 살았거나 방문했던 곳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건조하고 덤덤하게 쓰여진 서문에는 “... 내가 쓰는 글은 무조건, 간혹 불필요하리만큼, 내가 느끼는 바를 반영한다.”라는 문장이 있었고, "글 쓰는 사람은 언제나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이라는 단호한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서부 개척시대의 근선조들로부터 이어진 대가족의 세계에서 성장한 저자가, 세계대전 이후 전통(?)이 급속히 파괴되고 전방위적이고 혁명적인 변화가 지속되는 시기에 벌어지는 갖은 현상을 바라보고 체험하며 쓴 글들이었는데, 에세이나 짧은 소설처럼 느껴지는 글들이 많았음에도 쉽게 잘 읽히지는 않았다. 설명을 위해서 혹은 빗대는 표현으로 당대의 인물과 작품명, 지명 그리고 관련된 역사적이거나 당시의 중요한 사건들이 무척 많이 거론되는데, 잡지 기고글이니 평균적인(?) 독자를 위해 쓰여졌겠지만 미국인도 캘리포니아인도 아니고 그 시대와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배경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소화하기도 의미를 짐작하기도 힘든 부분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로 돌아간다는 건 버몬트나 시카고로 돌아가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문장에서 내가 이해하거나 유추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이런 류의 문장이 꽤 많아서 사실 끝까지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지기도 했다.

한편 어느 때, 어디라도 세계는 역사적 순간을 관통하고 있고 그를 포착하고 해석하고 기록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고 유통되고 전승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보편성 위에서, 책에 담긴 내용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기는 했다. 물론 그중 어떤 일은 그 사회적 파장과 잠재력으로 인해 당대에 이미 역사적인 위상을 부여받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일은 당대의 폭발력에 비해 쉽게 잊히기도 하겠지만. 저자는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언어의 통달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몸 바쳐 믿고 있기에”라고 스스로 표현할 만큼의 인텔리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확신하는 체계에서 미끄러진 아이들, 한순간에 일고의 가치없이 밀려나는 사람들, 폭력적으로 부서지면서도 열광과 환호의 대상이 되는 세계에 대해 주로 다룬다.

고향인 새크라멘토에서 벌어진 어떤 살인사건과 재판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글로부터 시작해 표제작인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까지 읽고 나서야, 저자의 시선과 사유가 총체적으로 뜨겁게 사회와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회에 반항한다기보다는 사회를 아예 모른다”고 표현한 아이들이 몰려들어 마약과 비참이 난무하는 샌프란시스코는 기존 질서로부터의 해방을 실험하는 장으로 부상하고, 낙원의 섬 하와이는 부도덕한 전쟁과 숱한 젊은 죽음들을 딛고 만개하고 있었으며, 예술과 자유로 상징되는 선망의 뉴욕은 저자에게는 (비록 지금은 살고 있다지만) 온전한 거처가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곡창지대와 계곡이었던 고향은 방위산업으로 개발되면서 급변하고 대대로 살아온 토착민들은 이방인들로부터 소외된다.

번역자의 해설에서 '반지성주의'로 통칭되는 문제적 현상과 현장에 대한 기록과 분석들은 구체적인 양상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에도 흥미로웠다. 수십 년의 시간과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여기에서도 다름없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사회의 '발전' 방향성이 그랬고, “내 유년기의 캘리포니아에서 변함없는 점이라고는 그것이 사라지는 속도뿐이다.”, “우리가 늙어가면서 잃어버리는 것들, 우리가 깨뜨리는 약속들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라고 토로한 세계의 보편성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해설과 책 소개에서는 저자가 정립한 문체와 그 위상에 대한 찬사가 많았는데 번역에서 최대한 살리려 노력했겠지만 원문을 모른 채 그 부분에 대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넓어지는 회오리 속에서 돌고 돌고
매는 매잡이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산산이 해체된다. 중심이 버티지 못한다.
그저 무정부 상태가 세상에 풀려 퍼지고
피로 흐려진 조수가 풀리고 사방에서
무구함을 받드는 의식이 물에 잠겨 가라앉는다.
가장 훌륭한 이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가장 저열한 자들은
치열한 열정으로 충만하다.

틀림없이 뭔가 계시가 임박해 있다.
틀림없이 재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재림! 그 단어를 내뱉자마자
'세계정신'에서 광막한 이미지가 나와
내 시야를 괴롭힌다. 어딘가 사막의 모래 속에서
사자의 몸에 인간의 머리가 붙은 형상이,
태양처럼 무표정하고 무자비한 시선이
느릿한 허벅지를 움직이고, 그 주위로 온통
성난 사막 새들의 그림자가 비틀거린다.
어둠이 다시 툭 떨어진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이십 세기에 걸친 돌 같은 잠이
흔들리는 요람에 동요해 악몽으로 변했다는 걸.
그리고 이제 어떤 거친 짐승들이, 마침내 도래한 그들의 시간을 맞아,
태어나 베들레헴을 덮치려 웅크리고 있는가?

- W. B. 예이츠


제목을 따왔으며 책의 서두에 전문이 실린 예이츠의 시 "The Second Coming(재림)"은 찾아보니 1919년에 쓰이고 1920년에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책이 쓰인 1960년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세계에 대한 개탄과 회의를 웅변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어쩌면 문명화된 혹은 문명화되지 않은 어떤 세계가 있더라도,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이 실현되지 않는 한 세계는 언제나 이러한 상태로 유지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누군가 삶의 한 시기를 갈아넣으며 쓴 글들의 예리한 정수를 파악하지 못하고 이렇게나 모호하게 기분과 짐작으로만 읽어버린 게 민망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푸른 밤]이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세계를 저자는 어떻게 보고 느끼며 살아가는지가 약간 궁금해졌다.

 

 

조앤 디디온•김선형 옮김
2021.4.8.초판1쇄발행,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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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0. 29. 17:23



일러스트가 들어간 책을 좋아하지 않고, 늘 직접 간단한 조리로 식사를 해결하지만 먹는 일이나 요리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생태적으로 친환경적으로 살아야한다는 당위적 지향은 있지만 내 삶과 결부시켜 하는 것이라고는 재활용 분리수거를 다소 집요하게 하는 것뿐이다. 공동체가 궁금한 적이 있었지만 역시 나는 혼자가 편하고 좋은 극도의 개인주의자라고 느끼며,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영성이나 수련 같은 정신세계를 보듬고 탐구하는 일에 약간의 거부감 같은 것이 있다.

 

하여 이 책을 처음 받았을 때, [여행하는 부엌]이라는 제목과 책 표지에 쓰인 ‘채식.여행자의.생태마을.부엌.순례’라는 키워드를 보고는 약간의 호기심이 동하면서도, 편견에 의거한 총체적이고도 옅은 이물감 그리고 양가감정 같은 것을 먼저 느꼈다. 그러나 봄날의책방 정기구독 덕분에 읽게 된 이 책은, 근래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낯설면서도 많은 것을 환기하는 '커다란' 책이었다. 대부분의 책은 좋은 방향이든 그렇지 않은 방향이든 내가 가진 선입견과 한계를 드러내주는데, 기존의 사고를 깨야 하는 거북함이나 외면하던 것들에 대한 부채감보다 유쾌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읽게 만드는 흔하지 않은 책이었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어른 여성’들이 점유한 부엌이라는 공간을 좋아했고 학생 시절에는 평화란 무엇일까 고민하며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일찍부터 먹거리와 요리에 큰 관심을 지닌 사람이었고, 함께 음식을 하고 나눠먹는 일을 최고의 즐거움이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다. 성장하며 화두가 된 평화에 대한 고민과 탐색을 실천에 옮기며 일상을 꾸리고 '세계 생태마을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세계 각지로 순례를 떠났다. 책에는 저자가 일본, 태국, 인도, 스리랑카,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에스토니아, 러시아 등을 방문한 경험과 그곳에서 만난 음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일러스트와 함께 레시피가 실려 있다.

 

조근조근 말을 건네는 듯한 구어체로 씌여진 책에는 자신이 향하는 삶의 방향과 그것이 지구에, 나아가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이 가득하다. 남다른 경험과 부드러운 신념에서 뻗어나간 거대한 사유가 녹아 있고 그 바탕에는 궁금증을 실험하기 위한 조용한 모험이 있다. 쓰레기통에서 나온 음식들을 먹으며 몸의 변화를 탐구하는 ‘덤스터 다이빙’을 실천하고 동아시아대지진 직후의 일본으로 되돌아가 자신의 일을 계속하고, 세계 각지의 생태마을을 순례하면서 단단해지고 유연해진 저자의 삶은 나로서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지금은 목포에서 소울 푸드 커뮤니티 키친 ‘집ㅅ씨’라는 공간을 운영한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음식보다 사람이 더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박세영•강효선(그린이)
2021.10.23초판1쇄발행, 열매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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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0. 17. 14:11

 

 

책모임의 10월 책이었는데, 역사에 대한 책을 평가할 깜냥은 아니지만 올해 독서 목록의 흑역사로 삼으려 한다. 101가지 중 절반이 현대편에 속하는 내용이었는데, 시작은 실수로부터 만들어진 초콜릿칩 쿠키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전체적인 내용의 60% 이상이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미국이 개입하거나 참전한 전쟁 관련한 내용이었고, 구소련과 동서냉전기의 세계 정치, 혁신에 실패해 종말을 맞았으나 한때 최고를 구가했던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 등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흑역사'를 선정한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구할 이상이 미국 이야기인데 세계사라는 타이틀을 붙인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더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은 폐기됐다고 생각했던 '팍스 아메리카나'에 입각한 미국 중심주의적 입장과 소위 제3세계에 속하는 국가들에 대한 전지적 관점이었다. 전반적으로 냉전 시대의 세계관을 반영한 서술이 이어졌는데 요즘 언론들의 헤드라인처럼 가볍고 얕게, 역사를 가십처럼 다루는 태도까지 더해져 읽으며 불편할 때가 많았다. 여럿의 공저이고 챕터마다 저술자가 명기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를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책 날개의 소개로 보아 이러한 역사관을 견지하고 생산 유통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는 듯한 주저자의 글이 가장 문제적이라고 느껴졌다.

대놓고 미국을 찬양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나치와 스탈린, 현실 사회주의 체제를 악마화하면서 제국주의 전쟁과 점령을 정당화하는 패권적인 세계관이 일관되게 견지된다. 전쟁 관련 내용에서 민간인의 희생을 언급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지만 인본주의적 고민이나 인권에 대한 고려가 거의 없는 점도 놀라웠다. “나치 독일이 원자폭탄으로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면 더 좋은 세상이 되었을 거라는 사실을 의심할 사람이 있을까?”(83쪽)라는 문장을 읽으며 내 눈을 의심했고, 냉전 시대 미국 정권이 몰두했던 반공주의를 다루는 챕터의 한 문장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부도덕한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냈다.”(169p)에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얻을 것이 아예 없는 책은 아니었다. 책에서 다루는 많은 것들을 나는 잘 모르고, 관점과 태도를 무시하며 내용에만 집중한다면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당연히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글을 서술할 때 관점과 태도는 내용과 방향의 밑그림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글쓰기를 위한 자료 역시 편향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고 어지간히 눈 밝은 독자가 아닌 다음에야 저자가 재구성한 역사적 사실과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이야기들, 전쟁의 전략이나 형세, 승패 등에만 집중하며 마치 게임을 하거나 훈수를 두는 듯한 기술이 이어지는 것은 정말 지양해야 할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판이 발행된 지 1년이 채 안 된 책이지만 주로 다루는 내용과 저자들의 관점과 태도가 너무 시대착오적이라고 느껴져서 원저의 발행 시점이 궁금해졌는데, 후반부에 오늘날의 미국 어쩌고 하며 (2015년 중반)이라는 표기가 되어 있어서 또 한 번 놀랐다. 아니, 어쩌면 역사와 인식이 언제나 진전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나의 오해가 더 문제적인가 싶어졌다. 주류 출판사에서 발행한 대중서라는 점을 감안해야 겠지만, 실은 그래서 더욱 문제가 있는 책이라고 느껴졌고 온라인서점에 달린 별점과 후기 들을 보며 너무나 의아하고 조금 무서워졌다. 짧은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말미 “흑역사 여행을 마치며” 중 “ ... 그리고 그런 실수에 대해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를 정의하는 것은 정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라는 문장을 참조한다면, 참 나쁘게 정치적인 책이라고 느꼈다.


빌 포셋 외 • 김정혜 옮김
2020.12.28.초판1쇄인쇄 2021.1.4.초판1쇄발행,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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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10. 3. 14:16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 말고는 아는 바가 없지만 이름만은 친근한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엄마의 죽음’을 다룬 책이라는 사실 때문에 궁금했다. 하지만 막상 읽으려 들면 괜히 불길하고 무서운 마음이 들어 선뜻 손이 가지 않았고, 추석에 오랜만에 엄마를 보고 온 후에 작심한 듯 읽었다.


비교적 얇은 책이고 번역자의 친절하고 깊이 있는 해설이 덧붙여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끝까지 읽고서도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는 문구 자체에는 동의가 되지 않는다. 죽음을 금기시하고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현대인의 한계 속에서도, 점점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떠올릴 때 죽음이라는 것이 마냥 멀리 있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함이 엄습하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인 집에서 낙상사고를 당해 전화기까지 두 시간을 기어 외부에 연락하고 병원에 입원한 저자의 엄마는 암 판정을 받는다. 본인에게는 복막염이라 속여 수술을 하고 회복을 바라면서, 저자는 죽음에 가까이 가는 엄마를 곁에서 돌보고 지켜보며 오랜 반목의 대상이었던 엄마를 새롭게 발견하고 화해한다. 자신을 성장시켰던 지금의 자신보다 젊었던 엄마는 가부장적 세계에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한 채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며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부정당한 무수한 여성 중 한 명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의 편린 속에서 건져올린 엄마의 다양한 모습들이 활자로 되살아난다. '나에게는 권리가 있다'며 아이들만의 세계에 기어이 끼어들곤 하던 젊은 시절의 엄마, 지적이고 자유로운 아빠의 그늘에서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던 아내였던 엄마, 부담스럽게 똑똑한 딸을 무서워하면서도 그 성공을 자랑스레 여기는 엄마,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의 삶을 진취적으로 꾸려가던 엄마, 마침내 삶의 마지막에 닿아 아이처럼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게 된 한 사람.

 

구체적인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만 어쩌면 모든 엄마와 딸이 느끼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집약해놓은 듯한 책이었다. 멀리에 나이든 엄마가 있는 딸로서, 착잡한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 강초롱 옮김
2021.4.10초판1쇄, (주)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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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9. 16. 23:55

 

01 [무민의 특별한 보물]
무민의 보물은 모두를 생각하는 마음

02 [무민의 단짝 친구]
겨울이 다가오면 스너프킨은 남쪽 나라로 여행을 떠나요. 그리고 봄까지 돌아오지 않지요. 캄캄한 겨울 동안 무민들은 겨울잠을 자요.

03 [무민과 마법의 색깔]
“갖고 싶은 것이 생기면 나는 우선 그걸 가만히 지켜볼 거야. 그리고 그걸 소중하게 머릿속에 담아 두는 거지. 그렇게 하면 없어지지도 않고 고장 나지도 않아. 많이 가져도 무겁지 않고, 색깔이 사라지지도 않지.”, 스너프킨

04 [무민과 위대한 수영]
“아무래도 난 안 돼. 난 왜 항상 내가 할 수 없는 것만 원하는지 모르겠어.” 수르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어요. “누구나 꿈을 꿀 수 있어. 꿈은 어떻게든 이루어져.” 무민이 위로했어요.”

05 [무민과 잃어버린 목걸이]
“하지만...... 저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아요!”
필리용크 아주머니가 소리쳤어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꼬마 미이가 말하더니 세 아이들에게 싱긋 웃어 보였어요. 아이들도 엄마 몰래 웃었어요.

06 [무민과 겨울의 비밀]
햇볕을 찾아 떠나는 것도 신나는 모험이지만, 겨울의 무민 골짜기도 신나는 일로 가득해요.
“아무리 추워도 상관없어. 그냥 여기 있는 게 더 좋아. 무민 골짜기에는 자연의 아름다운 비밀이 가득하다고!”
무민은 환한 얼굴로 소리쳤어요.
* 무민 가족이 겨울잠을 자는 동안에 무민 골짜기를 홀로 지키는 투티키
* ‘신나는’을 모두 ‘신 나는’으로 띄어썼는데, 어린이용 책이어서 더 신경을 써야하는 부분인 듯하다.

07 [무민과 모두의 언덕]
무민과 스니프는 남아 있는 코코아를 몽땅 마시고, 행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어요.
한바탕 눈놀이를 즐겁게 한 무민과 스니프는 다시 겨울잠을 잘 준비를 했어요.
...
꿈 속에서 무민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스너프킨이 새로 지은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어요. 쌔근쌔근 잠든 무민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한가득 번졌지요.

08 [무민과 아빠의 선물]
“사랑하는 당신에게 바치는 선물이오. 우리의 작은 친구들인 새들에게도 바친다오. 작품을 계속할 수 있게 당신이 용기를 주었지. 이 멋진 아이디어까지 말이오.”
아빠가 말했어요.

09 [무민과 화해의 편지]
‘스노크 아가씨는 어떤 그림보다 더 아름다워요! 돌아와 주세요! - 무민’
연을 날린 사람은 무민이었어요! 
“멋있는 연이야! 넌 정말 그림을 잘 그려.”
스노크 아가씨가 무민을 칭찬했어요.
“다음엔 진짜 너를 예쁘게 그려 줄게.”
무민은 이렇게 약속하며 스노크 아가씨의 손을 꼭 잡았어요.

10 [무민과 최고의 경주]
“모두 다 우승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우렁찬 만세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졌어요.
...
“가장 좋았던 건 서로 도우며 함께 경기를 한 거였어요.”
우리들의 귀여운 무민이 말했답니다.

11 [무민과 아빠의 첫 운전]
“소풍 장소로는 우리 집 정원만 한 데가 없지요.”
무민 아빠는 헤물렌 씨를 소풍에 초대했어요.
“같이 가시지요. 하지만 걸어가는 것이 좋겠어요.”
모두 대찬성이었어요!

12 [무민과 봄에 온 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니프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어요.
“이슬방울 딱 하나만이라도 진짜 다이아몬드였으면 좋았을 텐데.......”
무민은 스너프킨이 무민 골짜기로 돌아와서 기뻤어요.
드디어 무민 골짜기에도 진짜 봄이 찾아왔답니다.
* 기다리던 누군가 돌아와야 진짜 봄!

13 [무민의 잊지 못할 비행]
늦은 밤, 무민은 녹초가 되어 침대에 걸터앉았어요. 
창 너머 달을 바라보니, 낯익은 그림자가 하늘을 날고 있었지요.
무민이 졸린 눈으로 중얼거렸어요.
“고맙습니다, 마법사님. 마법사님이 아니었다면 집에 올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14 [무민의 외딴 섬 여행]
“폭풍이 멎으니 정말 아름답구나.”
무민 엄마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감탄했어요.

15 [무민의 새로운 친구]
“모두 정말 고마워. 내년 여름에 꼭 놀러 올게.”
바다코끼리들은 그린란드를 향해 떠났어요.
바닷가에는 스니프가 먹을 것을 챙겨 와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스너프킨, 너도 곧 여행을 떠나겠구나.”
무민은 서운했지만, 마음이 들뜨기도 했어요.
바다코끼리 다니엘과 친구가 되었으니까요.

토베 얀손, 이지영옮김
2010.5.11.~2014.7.8.초판1쇄발행, 어린이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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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1. 9. 11. 22:26

 

 

다정함과 알뜰함이 느껴지는 소박한 제목이 마음에 들었는데 ‘샘터’에서 나온 책이어서 읽기 전부터 괜히 더 정감이 갔다. 샘터사에서 나온 책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고, 어릴 적의 우뚝한 랜드마크였던 대학로 샘터파랑새극장이 떠올랐기 때문에. 유달리 마음에 두고 있었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 건물에서 책을 만들고 있지는 않겠지만, '샘터'는 일관된 느낌으로 유구한 현재진행형이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책에는 ‘나의 베란다 정원 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가 여행지 기념품샵에서 산 드래곤프루트와의 인연을 계기로 식물을 가꾸기 시작해 후지산이 보이는 도쿄 11층 집의 베란다에서 본격적인 가드닝을 하며 살았던 날들의 기록이 중심이다. 베란다 가드닝의 경험들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는데, 가드닝을 하면서 식물을 기르고 따먹고 바라보며 느끼는 기쁨 못지 않게 그에 수반되는 난감함과 번거로움에 대한 이야기들도 적지 않아 꽤 공감이 됐다. 이 모든 과정에서 뻗어나간 저자의 생각은 식물과 사람을 넘어 우주를 넘나들기도 한다.


이십대 중반 출간한 데뷔작이 화제가 된 후 조용히 글을 쓰며 살아가는 저자에게는 집이 곧 일터다. 작은 집안에 삶의 뿌리를 내린 채 소박하게 살고 있지만, 저자의 생각은 폐쇄적이거나 편협하지 않다. 일이 잘 되지 않는 날에는 베란다에서 기르는 식물들과 멀리 보이는 풍경들에 마음을 내어주며 세상과 우주로 사유의 경계를 확장한다. 저자는 자신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 문학계의 현재와 미래,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상처 입은 사회의 회복에 대해서도 일말의 책임감을 끌어안고 살아가며 글을 쓴다. 사소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일조하려 애쓰는 삶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함께 담긴 글에는 적당한 우수와 재미가 있었다.


책날개의 소개 중 ‘사람을 사귀는 데 서툴러 정원을 가꾼다’는 말이 인상적이었고, 초반부에는 주로 책의 주무대가 되는 11층 베란다 집에 이르기까지 홀로 집을 구하고 이사한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어쩐지 동질감이 많이 느껴졌다. 혼자 오래 살다 보니 언젠가부터 혼자 사는 사람에게 묽은 연대감이랄까 친근감 같은 걸 느낀다는 걸 깨달았는데, 저자의 글에서는 그뿐 아니라 어쩐지 나랑 비슷하네 싶은 공감의 지점이 많았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남편'이라는 말이 나왔고 순간 엇- 하며 약간의 거리감이 들어버려서 혼자 좀 웃겼다.


책 말미 ‘그 이후의 이야기’에는 2019년 초반 작가의 근황이 덧붙여져 있는데, 그는 한 아이를 키우고 한 아이를 뱃속에 품은 채 가드닝과 여러 취미들을 잠시 접어두고 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여일하게 베란다와 식물에 집중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 예상 밖이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저자가 어느 부분에서 태풍이 좋다고 말했던 것처럼, 중요하게 여기던 어떤 일을 그만뒀다는 사실에 약간의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 읽고 나니 십여 년의 시간이 촤르륵 넘어가는 책장 속에 담긴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뜬금없지만 [보이후드]를 본 후 느꼈던 어떤 감정이 아련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처음 듣는 엄청난 말이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마주했을 때 곱씹으며 위안이 되는 말들이 있다. 모르고 있던 말이 아니라도, 침잠이 지나면 다시 활기의 날이 올 수도 있다는 류의 담담하지만 힘이 되는 말들. 책에 담긴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무리하지 않으면서 좋아하고 필요한 것들을 가꾸고, 그를 통해 자신과 연결된 세계의 다양한 구성원들에 대해 생각하고 무언가 보탬이 되려는 소박하고 작은 삶의 이야기, 조용하지만 단호하고 개인적이지만 사회와의 근본적인 연결을 긍정하는 작가의 글은 무심하고 서늘하게 위로가 됐다. 식물 관련 글책 모임의 마지막 책이었는데,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야마자키 나오코라, 정인영 옮김
2020.3.10.1판1쇄인쇄 3.20.발행, (주)샘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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