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윤도, 무늬, 희영, 태리 그리고 나미에 언니와 태란 누나. 많지 않은 주요 인물들 사이의 얽히고 설킨 관계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디테일한 연결고리를 만든 작가의 고심과 좀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함께 받으며 읽었다. 작은 동네에서 가족으로 친구로 지인으로 교차되는 인연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장편의 긴 호흡을 감당하기 위한 극적인 장치와 다양한 사건들의 연쇄가 필요하기 때문일까 싶었는데, 이전 중단편들의 딱 떨어지는 느낌을 장편에서 기대하는 게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뜨기 놀이의 손가락들처럼 촘촘하게 이어진 인물들의 마음을 따라가는 이야기는 엄청난 몰입을 선사해서, 간만에 아침이 밝아오는 걸 보며 책장을 덮었다.
존중받을 수 없는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는 절망 속에서 나를 사랑하는 태리와 윤도를 사랑하는 나. 금 간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태리를 무시하고 외면하며, 둘만의 세상 밖 윤도에게는 자신이 거부한 태리와 다를 바 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집착하는 나. 어쩌면 많은 비밀과 여러 겹의 가면으로 스스로를 배반하면서 가장 괴롭게 사랑을 이어갔을지 모를 윤도. 세 사람의 상처와 진심이 애달파서 읽으며 자주 마음이 시려왔다. 당차고 씩씩한 무늬가 은근 절친이어서, 나미에 언니의 사랑을 얻지 못해도 다음 수를 생각하며 용맹정진하는 아이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공부 안 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전교 1등하고 그러는 아이들의 세계를 모르는데 역시 대학원에서 소설 공부한 작가는 이런 세계를 그릴 수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고, 당사자들의 깊은 고뇌가 안쓰러우면서도 엘리트들은 결국 상처를 이겨내며 성장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딴지는 아니고, 뭐랄까. 수구적인 이성애 중심사회에서 차별과 혐오의 극단을 경험하는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분투하며 사랑을 끌어안고 성장하는 것만도 충분히 힘겨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른이 된 이들이 모두 너무 어엿한 사회인의 외피를 두르고 있어 그 매끈함에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에서 좀 더 다양한 층위에 속한 인물을 만나고 싶고 어쩌면 세계의 그늘을 집약한 총체성을 보고 싶은 허황된 욕심일 수도 있겠다만.
주인공들이 2003년 봄부터 2006년 겨울까지 살면서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했던 D시, 작가는 말미에 '소설 속 일부 지명은 실제에서 빌려왔으나 어디까지나 가상의 공간이다. 인물과 사건 역시 모두 허구이다.'라고 썼지만 이조차 소설의 한 구절처럼 느껴질 정도로 배경도 인물들도 생생했다. 작가는 아니라지만(미안) 수성못이 있는 D시는 친척의 팔할이 살고 있어 어렸을 적부터 자주 갔던 도시였고 지금도 여러 친척들이 살고 있다. 지역 주민들이 즐겨찾는 유원지였다가 놀이기구 사고로 누군가 목숨을 잃고 자물쇠를 닫아건 머큐리랜드와 함께 어둡고 퇴락한 공간이 된 수성못은, 수십 년 동안 띄엄띄엄 방문했던 공간이어서 읽으며 나도 모르게 소환되는 기억 속 순간들이 있었다.
언젠가 사촌과 밤의 수성못을 산책한 기억이 가장 선연한데, 그때는 왜인지 [비포 선라이즈]의 불 꺼진 놀이공원이 떠올랐지만 이번엔 외로운 소년들이 밀쳐지고 떨어졌던 검은 물의 이미지가 더해졌다. 책을 읽기 얼마 전 작가가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엄마의 메시지까지 본 터라, 말미의 단언은 독자에게 제안하는 게임이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다. 막장드라마 악역 배우의 등을 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민망하지만, 내가 이야기에서 빠져나오면 다시 소설이 되겠지.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다른 작품이 떠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창작자에게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떠오른다는 것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므로 어쩔 수 없고, 이번에도 어떤 장면들에서는 반복적으로 자동 연상되는 영화들이 있었다. 나와 윤도가 주고받는 청신한 설레임에 영화에서는 현재의 대화로만 유추 가능하고 과거의 그림으로만 등장했던 [마티아스와 막심]이 어린 시절에 주고받던 감정이 저렇지 않았을까 싶었고, 컨테이너 장면에서는 마지막 파티의 창고에서 목도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수성못까지 굳이 배달 오토바이를 타는 윤도와 내가 느끼는 떨림과 일체감을 마주할 때마다 [썸머 85]며 그 옛날 [아이다호]가 떠올랐다. 단 한 사람과 밀착해 질주하는 순간의 해방감과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듯한 충만감을 응축한 오토바이 장면은 어느 정도 클리셰가 되었지만, 반복되어도 강렬한 전율은 상쇄되지 않는 것 같다.
이미 어른이었던 2003년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데, (다시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들었지만) 미니홈피니 폴더폰, 책 대여점 같은 당시 일상을 구성하던 주요한 요소들을 마주하니 흐른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을 기억하게 만드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문외한인 나는 알 수 없지만 만화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언급되는 작품들 중 반짝하고 찌릿하는 공감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중학생의 영화'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중경삼림]과 [해피 투게더]가 반가웠다. 물론 마스터피스의 현재성을 보유한 작품이고 얼마 전 재개봉을 했었고 그때 영화를 봤던 터라 과거를 상기하는 매개의 기능은 약했지만, 언급될 때마다 흐르는 시간에 퇴색되지 않는 사랑의 고유성과 보편성 같은 걸 환기하는 느낌이었다.
나이만큼 세월에 가속도가 붙는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어릴 적의 시간들은 아직 세상에 익숙해지지 않은 존재가 가진 온갖 궁금증과 왕성한 혈기 때문에라도 농도와 밀도가 높았던 것도 같다. 소설 속 인물들만큼 격정적이거나 극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읽으며 나의 학창시절과 그때 내가 우정을 나누고 사랑했던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부친상 빈소의 옥상 건물에서 말끝을 흐리는 윤도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나의 마음, 그때의 그 감정을 그 자리에 남겨두는 결단과 용기를 통해 어쩌면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진 일상에는 여전히 작은 구멍이 존재하고, 시간이 더 흐르면 그 작은 구멍 속의 마음도 서서히 희미해지겠지. 너무 아픈 사랑이었지만, 모든 걸 걸었고 그래서 미련도 남지 않은 한 시절의 기억이 있다면 희미해지더라도 공허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헛헛해지는 날이면 장우동 정식을 먹으면 되지 않을까, 약간 최후의 승자 같은 장우동이 우리 집 근처에도 영업 중이다.
박상영
2021.9.27.초판인쇄 10.8.초판발행, (주)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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