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부터 1969년까지,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와 런던의 마크스 서점원 프랭크 도엘이 주고받은 편지들 그리고 다른 서점원들, 프랭크의 가족들과 옆집 할머니, 서점을 방문한 헬렌의 지인들 등이 헬렌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함께 실려 있다. 1949년 10월 헬렌이 <토요문학평론지>에서 마크스 서점의 ‘절판 서적 전문’ 광고를 보고 구하는 책의 목록과 함께,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책들을 주문하는 편지를 보낸 데서 인연이 시작된다. 중고책을 수소문하고 찾는 책을 구해서 보내는 거래가 당사자간의 거래가 깊고 너른 관계로 확장된 배경에는, 전후 영국의 궁핍한 사정과 헬렌의 사려 깊은 마음 그리고 양자의 신뢰를 키운 오랜 시간이 있었다.
초반의 편지들에는 드물게 마음을 불퉁하게 만드는 책이 도착하거나([라틴 성서]), 사라진 본문 한두 장으로 인한 오해가 생겨나거나([영국의 반란과 내전의 역사]), 감감무소식인 책들을 기다리는 헬렌의 친근하지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채근("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우두커니 앉아 빈둥거리고 있나요?" 등)이 담기기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점에 대한 신뢰와 서점원들에 대한 친밀감이 더해진다. 정확하면서도 수용적으로 헬렌의 요구에 응하는 프랭크의 태도는 공무 처리의 선을 지키며 일관된 미더움과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찾는 책과 도착하는 책이 늘어날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문학과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긴 말 없이도 알아챌 수 있는 공감의 토대가 생겨난다.
상태 좋고 저렴한 책을 받은 헬렌은 얼마 후 성탄에 맞춰, 전후의 어려운 경제 상황으로 식료품 배급이 원활하지 않은 영국 사정을 알게 되었다며 서점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낸다. 이후에도 헬렌은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달걀과 혓바닥고기 통조림 같은 식료품들을 서점원들이 나눠가질 수 있을 만큼 챙겨 보내고, 이는 서점원들에게 큰 기쁨과 도움이 된다. 거침없고 때로 위악적인 유머를 구사하는 편지와 달리, 경제적인 여유가 별로 없음에도 마크스 서점원들을 위한 구호품 선물을 지속적으로 보내는 헬렌의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은 모두에게 충분히 전달된다. 헬렌의 도움은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이 아니라 친구로서 당연한 일인 것처럼 쿨하게 이어진다. 대체로 가난한 자신의 생활이나 때로 곤궁에 처한 상황에 솔직하면서도, 서점으로 보내는 소포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상대의 부담을 덜어준다.
어느 날 헬렌의 암묵적인 담당자인 프랭크 도엘에게는 비밀로 해달라며, 보내준 선물에 대해 깊은 고마움을 전하는 세실리 파의 편지가 도착하고, 부활절 선물을 나눠 받은 메건 웰스, 함께 사는 75세의 종조할머니의 기쁨을 전하는 빌 험프리스 등 서점원들의 편지가 이어진다.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서점원들이 선물로 보낸 자수 린넨 식탁보가 헬렌에게 도착한다. 헬렌의 감사 표시에 옆집에 사는 할머니로부터 린넨 식탁보를 구한 프랭크의 아내 노라 도엘이 직접 편지를 보내고, 그 식탁보에 직접 수를 놓은 옆집 할머니 메리 볼턴에게도 헬렌이 소포를 보내면서 편지를 주고받는다. 영국 문학 서적들을 탐독하며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동경하는 헬렌에게, 프랭크를 비롯한 마크스 서점과 관련된 인물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영국의 '친구들'이 된 것이다.
헬렌은 당대 미국에서 발간되는 '마분지' 표지 책과 달리 세월이 느껴지는 우아한 장정의 고서나 몇 대를 거치며 선대 독자들의 흔적들이 남겨진 책들이 도착할 때면 감탄을 쏟아내고, 자신의 관심사와 하는 일의 부침을 가감없이 전하며 언제나 풍부하게 '자기 자신'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거래의 증거로 사본이 남겨지는 탓에 프랭크의 편지는 사무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편지를 주고받은 지 3년째가 되자 둘은 좀더 친근한 내용과 호칭으로 소통하기 시작한다. 프랭크 역시 찾는 책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가족의 근황이나 서가 매입을 위한 출장과 같은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꺼이 나누고 헬렌이 좋아할 만한 작은 책 선물을 전하기도 한다. 책을 찾는 수고로움을 알아주고 보내준 책에 대한 감상을 전하는 헬렌의 편지와 우정을 담은 소포는, 프랭크에게 사랑하는 일에 대한 보람과 애착을 더하고 책을 매개로 한 우정에 믿음을 더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 헬렌은 마크스 서점원들 모두가 감사하고 사랑하는 손님이자 친구가 된다. 런던을 방문해 마크스 서점을 찾은 헬렌의 지인들은 별 생각없이 헬렌 이야기를 꺼냈다가 과분할 만큼의 환대를 받고, 헬렌은 지인을 통해 프랭크 가족에게 당시 영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나일론 양말을 선물로 전하기도 한다. 마크스 서점원들은 헬렌의 영국행을 고대하며 자주 초대 의사를 밝히고 헬렌 역시 때를 기다리지만, 여유없는 중에 받고 있는 치과 치료와 살고 있는 집의 철거와 이사 등으로 영국행은 기약없이 미뤄지기만 한다. 20년간의 편지 중 80%가량이 1960년 이전에 주고받은 것들인데, 그속에는 프리랜서 작가인 헬렌의 삶과 일 그리고 서점원들의 삶의 변화도 대략 담겨 있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친구가 된 이들이 서로의 안위를 궁금해하는 정겨움이 가득하다.
1968년 9월 제인 오스틴을 수소문하며 헬렌이 보낸 오랜만의 편지에 분주한 일상과 성인이 된 딸들의 안부를 답장으로 전했던 프랭크가 두어 달 후 세상을 떠난다. 헬렌은 마크스 서점을 통해 그가 1968년 12월 복막염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얼마 후 노라의 편지를 받는다. "때때로 제가 당신을 아주 질투했다는 얘기도 이젠 할 수 있겠네요. 프랭크는 당신 편지를 아주 좋아했고, 당신 편지들은 어딘가 그이의 유머 감각과 아주 닮았거든요. 또, 당신의 글솜씨도 부러웠답니다."라고 쓴 노라는 "언젠가 우리를 방문할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딸아이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한답니다."라고 덧붙인다. 본문의 마지막은 헬렌이 마크스 서점과의 거래 초기 환율 계산을 도와줬던 지인 부부 캐서린에게 보낸 편지다.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그리고 에필로그이자 마지막 편지는 1969년 10월 런던에서 보낸 프랭크와 노라의 딸 실라가 쓴 것이다. 매개물인 책 없이도 안부를 나눌 만큼의 지인이 된 이들의 이야기는 이후 책으로 출판되었고, 헬렌은 이 책을 통해 유명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책에 감동한 이들이 각지에서 보낸 편지가 줄을 이었고, 이야기는 영화와 연극과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그럼에도 헬렌은 부자가 되지는 못했는데 독자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하느라 받은 인세를 우표값으로 써야 했기 때문이라고 옮긴 이는 전한다. 지난 가을 [마침내 런던] 출간 소식을 듣고 구입하면서 제목과 대략의 이야기만 알고 있었던 이 책을 중고서점에서 샀다. 얇은 책이라 오히려 밀쳐놨다가 뭔가 따뜻함이 필요해 침대맡에서 집어들었는데 금세 빠져들어 읽었다. 느린 세계에서 각자 살아가던 담백하고 친절한 이들이 오랫동안 마음과 책을 나눈 이야기가, 이제는 불가능한 세계의 일이어서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크스 서점은 사라졌고 채링크로스가 84번지에 표석이 남았다고 하는데, 언젠가 마주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헬렌 한프•이민아 옮김
2004.1.30.1판1쇄 2009.9.18.1판6쇄펴냄, 궁리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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