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2. 4. 22. 10:59



1949년부터 1969년까지,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와 런던의 마크스 서점원 프랭크 도엘이 주고받은 편지들 그리고 다른 서점원들, 프랭크의 가족들과 옆집 할머니, 서점을 방문한 헬렌의 지인들 등이 헬렌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함께 실려 있다. 1949년 10월 헬렌이 <토요문학평론지>에서 마크스 서점의 ‘절판 서적 전문’ 광고를 보고 구하는 책의 목록과 함께,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책들을 주문하는 편지를 보낸 데서 인연이 시작된다. 중고책을 수소문하고 찾는 책을 구해서 보내는 거래가 당사자간의 거래가 깊고 너른 관계로 확장된 배경에는, 전후 영국의 궁핍한 사정과 헬렌의 사려 깊은 마음 그리고 양자의 신뢰를 키운 오랜 시간이 있었다.

 

초반의 편지들에는 드물게 마음을 불퉁하게 만드는 책이 도착하거나([라틴 성서]), 사라진 본문 한두 장으로 인한 오해가 생겨나거나([영국의 반란과 내전의 역사]), 감감무소식인 책들을 기다리는 헬렌의 친근하지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채근("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우두커니 앉아 빈둥거리고 있나요?" 등)이 담기기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점에 대한 신뢰와 서점원들에 대한 친밀감이 더해진다. 정확하면서도 수용적으로 헬렌의 요구에 응하는 프랭크의 태도는 공무 처리의 선을 지키며 일관된 미더움과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찾는 책과 도착하는 책이 늘어날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문학과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긴 말 없이도 알아챌 수 있는 공감의 토대가 생겨난다.

 

상태 좋고 저렴한 책을 받은 헬렌은 얼마 후 성탄에 맞춰, 전후의 어려운 경제 상황으로 식료품 배급이 원활하지 않은 영국 사정을 알게 되었다며 서점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낸다. 이후에도 헬렌은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달걀과 혓바닥고기 통조림 같은 식료품들을 서점원들이 나눠가질 수 있을 만큼 챙겨 보내고, 이는 서점원들에게 큰 기쁨과 도움이 된다. 거침없고 때로 위악적인 유머를 구사하는 편지와 달리, 경제적인 여유가 별로 없음에도 마크스 서점원들을 위한 구호품 선물을 지속적으로 보내는 헬렌의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은 모두에게 충분히 전달된다. 헬렌의 도움은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이 아니라 친구로서 당연한 일인 것처럼 쿨하게 이어진다. 대체로 가난한 자신의 생활이나 때로 곤궁에 처한 상황에 솔직하면서도, 서점으로 보내는 소포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상대의 부담을 덜어준다. 

 

어느 날 헬렌의 암묵적인 담당자인 프랭크 도엘에게는 비밀로 해달라며, 보내준 선물에 대해 깊은 고마움을 전하는 세실리 파의 편지가 도착하고, 부활절 선물을 나눠 받은 메건 웰스, 함께 사는 75세의 종조할머니의 기쁨을 전하는 빌 험프리스 등 서점원들의 편지가 이어진다.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서점원들이 선물로 보낸 자수 린넨 식탁보가 헬렌에게 도착한다. 헬렌의 감사 표시에 옆집에 사는 할머니로부터 린넨 식탁보를 구한 프랭크의 아내 노라 도엘이 직접 편지를 보내고, 그 식탁보에 직접 수를 놓은 옆집 할머니 메리 볼턴에게도 헬렌이 소포를 보내면서 편지를 주고받는다. 영국 문학 서적들을 탐독하며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동경하는 헬렌에게, 프랭크를 비롯한 마크스 서점과 관련된 인물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영국의 '친구들'이 된 것이다.

 

헬렌은 당대 미국에서 발간되는 '마분지' 표지 책과 달리 세월이 느껴지는 우아한 장정의 고서나 몇 대를 거치며 선대 독자들의 흔적들이 남겨진 책들이 도착할 때면 감탄을 쏟아내고, 자신의 관심사와 하는 일의 부침을 가감없이 전하며 언제나 풍부하게 '자기 자신'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거래의 증거로 사본이 남겨지는 탓에 프랭크의 편지는 사무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편지를 주고받은 지 3년째가 되자 둘은 좀더 친근한 내용과 호칭으로 소통하기 시작한다. 프랭크 역시 찾는 책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가족의 근황이나 서가 매입을 위한 출장과 같은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꺼이 나누고 헬렌이 좋아할 만한 작은 책 선물을 전하기도 한다. 책을 찾는 수고로움을 알아주고 보내준 책에 대한 감상을 전하는 헬렌의 편지와 우정을 담은 소포는, 프랭크에게 사랑하는 일에 대한 보람과 애착을 더하고 책을 매개로 한 우정에 믿음을 더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 헬렌은 마크스 서점원들 모두가 감사하고 사랑하는 손님이자 친구가 된다. 런던을 방문해 마크스 서점을 찾은 헬렌의 지인들은 별 생각없이 헬렌 이야기를 꺼냈다가 과분할 만큼의 환대를 받고, 헬렌은 지인을 통해 프랭크 가족에게 당시 영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나일론 양말을 선물로 전하기도 한다. 마크스 서점원들은 헬렌의 영국행을 고대하며 자주 초대 의사를 밝히고 헬렌 역시 때를 기다리지만, 여유없는 중에 받고 있는 치과 치료와 살고 있는 집의 철거와 이사 등으로 영국행은 기약없이 미뤄지기만 한다. 20년간의 편지 중 80%가량이 1960년 이전에 주고받은 것들인데, 그속에는 프리랜서 작가인 헬렌의 삶과 일 그리고 서점원들의 삶의 변화도 대략 담겨 있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친구가 된 이들이 서로의 안위를 궁금해하는 정겨움이 가득하다.

 

1968년 9월 제인 오스틴을 수소문하며 헬렌이 보낸 오랜만의 편지에 분주한 일상과 성인이 된 딸들의 안부를 답장으로 전했던 프랭크가 두어 달 후 세상을 떠난다. 헬렌은 마크스 서점을 통해 그가 1968년 12월 복막염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얼마 후 노라의 편지를 받는다. "때때로 제가 당신을 아주 질투했다는 얘기도 이젠 할 수 있겠네요. 프랭크는 당신 편지를 아주 좋아했고, 당신 편지들은 어딘가 그이의 유머 감각과 아주 닮았거든요. 또, 당신의 글솜씨도 부러웠답니다."라고 쓴 노라는 "언젠가 우리를 방문할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딸아이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한답니다."라고 덧붙인다. 본문의 마지막은 헬렌이 마크스 서점과의 거래 초기 환율 계산을 도와줬던 지인 부부 캐서린에게 보낸 편지다.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그리고 에필로그이자 마지막 편지는 1969년 10월 런던에서 보낸 프랭크와 노라의 딸 실라가 쓴 것이다. 매개물인 책 없이도 안부를 나눌 만큼의 지인이 된 이들의 이야기는 이후 책으로 출판되었고, 헬렌은 이 책을 통해 유명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책에 감동한 이들이 각지에서 보낸 편지가 줄을 이었고, 이야기는 영화와 연극과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그럼에도 헬렌은 부자가 되지는 못했는데 독자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하느라 받은 인세를 우표값으로 써야 했기 때문이라고 옮긴 이는 전한다. 지난 가을 [마침내 런던] 출간 소식을 듣고 구입하면서 제목과 대략의 이야기만 알고 있었던 이 책을 중고서점에서 샀다. 얇은 책이라 오히려 밀쳐놨다가 뭔가 따뜻함이 필요해 침대맡에서 집어들었는데 금세 빠져들어 읽었다. 느린 세계에서 각자 살아가던 담백하고 친절한 이들이 오랫동안 마음과 책을 나눈 이야기가, 이제는 불가능한 세계의 일이어서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크스 서점은 사라졌고 채링크로스가 84번지에 표석이 남았다고 하는데, 언젠가 마주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헬렌 한프•이민아 옮김
2004.1.30.1판1쇄 2009.9.18.1판6쇄펴냄, 궁리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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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4. 14. 17:46



1956년 6월, 홀로 유럽 유학을 떠난 윤이상이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들 중 89편을 추려 엮은 책이다. 부산사범학교에서 각각 음악과 국어 교사로 재직하던 두 사람은 1950년 서울에서 결혼해 딸 정과 아들 우경을 낳았다. 윤이상은 1955년 "피아노 삼중주"와 "현악사중주 1번"으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해 받은 상금 등으로 다음 해 프랑스 유학을 떠났고, 아내는 두 아이를 데리고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 교직 생활을 하며 남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책에는 1961년 9월 아내가 유럽에 올 때까지 5년 4개월간 보낸 편지들이 연 단위의 장으로 나뉘어 시간순으로 실려 있다.

 

윤이상이 가족과 지인 들의 배웅 속에 여의도 비행장을 출발해 도쿄와 홍콩,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1956년 6월은 한국전쟁 정전으로부터 만 3년이 안 된 시점이었다. 전쟁과 고아, '거러지'의 나라에서 온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윤이상은 빠듯한 형편으로 생활하는 아내가 부쳐주는 돈으로, 역시 빠듯하게 생활하며 어학과 현대음악 공부에 열중한다. 새로운 세계의 경험과 소회, 공부에 대한 포부와 음악에 대한 꿈, 가족과 함께하는 미래, 두 아이 양육에 대한 의견,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진 편지는 윤이상에게, 가족과의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고 성공을 장담할 수 없이 고된 유학 생활을 버티게 하는 큰 힘이었던 것 같다.

 

편지에는 유학 생활의 소소하고 구체적인 이야기와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 대한 안부, 장래에 대한 계획과 바람, 현대음악계에서 성장하는 과정 등 개인사가 주로 담겨 있지만, 낯선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의 관찰과 소회를 통해 당시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면모를 엿볼 수 있고 지금과는 현저히 다른 변화와 시간성 등을 접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불과 몇 년 전 미소의 대리전을 치렀던 한국의 낮은 위상과 그에 대한 반전의 노력을 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아쉬움, 자신의 음악적 성공으로 한국의 다른 모습을 알리고자 하는 의지, 당시 유럽 사회와 현대음악계 내부의 일면 등이 그랬고, 파리에서 백림으로의 이전과 관련해 분단 상황과 정치적 불안이나 변동에 대해 우려하는 부분에서는 '동백림 사건'으로 고난을 겪고 살아생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그의 운명이 떠올라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윤이상의 파리 생활은 세계와 현대음악에 대한 개안의 시간이었지만 아내에게조차 그대로 털어놓을 수 없을 만큼 고생스러웠다. 유학 초기의 편지들에는 앙리앙스 프랑세즈에서 어학을, 프랑스 국립고등음악원에서 공부하면서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며 쇼팽 기념비 옆에서 상념에 잠기고 자신이 이룰 음악 세계에 대해 꿈꾸는 낭만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교수에게 가져갈 수업료가 모자라 걱정하다 우연히 아내의 사진 액자에서 천 프랑을 발견하고 기뻐하거나 길에 쓰러진 동남아시아 학생이 남일 같지 않다고 에둘러 적는 등 후반으로 갈수록 환율에 민감해지고 돈 걱정이 짙어진다. 와중에도 윤이상은 한국을 욕하는 현지 기사를 보며 분개하며 반박문을 계획하고, 3.1절에 열린 공관의 기념식에서 강력한 고사에도 파리의 한인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며, 용무 겸 처음 여행이었던 화란(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는 이준 열사의 묘지를 방문해 진혼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윤이상에게 유학은 자신이 하는 음악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당시 한국에는 자신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막막함과 일본 음악계를 하늘처럼 알며 잘난 체하는 이들이 장악한 음악계에 서양음악의 전통을 제대로 이식하겠다는 중대한 책임 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지만, 애비의 옹색함으로 설움을 안겨줬던 딸에 대한 아픈 기억과 함께 가족의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순위는 가족이었다. 편지에는 늘 가눌 길 없는 그리움이 뚝뚝 흐르고, 성북동 시절의 정겨웠던 기억에 대한 회상이 수차례 등장한다. 아내와 떨어져 있는 상태로 3년을 넘길 수는 없다는 결심을 수차례 밝히며, 아내와 아이들을 파리로 불러들이려는 이야기도 재차 언급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윤이상은 파리 생활 1년을 채우고, 학비가 무료에 생활비가 훨씬 적게 드는 독일의 백림으로 유학지를 옮긴다.

 

1957년 7월 윤이상은 파리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쾰른까지, 그곳에서 베토벤의 고향 본을 들르고 다시 기차로 하노버까지, 그리고 비행기로 동독 지구를 넘어 서베를린에 닿는다. 베를린음악대학 학장에게 작품을 선보인 후 공부를 시작한 윤이상은 독일 유학 1년 정도가 지나며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긴요한 장학금을 받으며 조금 더 숨통이 트인 상태에서 공부와 작곡을 병행하면서 1958년 8월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현악사중주 1번"이 초연되고, 9월에는 전위적인 국제현대음악제가 열리는 다름슈타트에 크라니히슈타인 국제 현대작곡가 하기연구소의 장학금을 받아 참석한다. 청년 백남준을 처음 만나고, 존 케이지의 신작 연주에 문화적 충격을 받으며 현대음악의 최전선을 경험한 윤이상은, 다음 해에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 무대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하고 무대에 세 번이나 불려나가 인사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다름슈타트에서의 성공과 이례적인 찬사 이후 '한국에서 온 이상 윤'은 현대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호의적인 신문평과 기사들이 각종 지면에 실리면서 작품이 학문적 가치를 인정 받아 출판 계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의 작품을 원하는 무대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음악적 행보 역시 확장되고 여러 무대에서 거듭 인정받으며 윤이상은 그간의 성취를 발판으로 독일에서 활동을 이어가며 가족들과 함께할 것을 결심한다. 애초 3년을 다짐했던 유학 생활은 이미 그 시한을 넘겼지만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음악계에 두각을 나타낸 지 몇 년 안 된 음악가의 이름은 잊혀질 것이었다. 여러 고려 끝에 함부르크를 최적지로 결정한 윤이상은 아내에게도 동의를 받아, 아내와 몇 년 후 아이들의 입국까지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시작한다. 아내 이수자는 5.16 쿠데타로 인해 예정했던 5월을 넘겨 1961년 9월 20일에 독일에 입국했다고 한다.

 

선별 과정에서 빠진 편지들이 많겠지만 대략 일주일에 한 번쯤 쓴, 아내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이다 보니 사소한 생활상의 일들이나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면모 등이 그대로 느껴져 새로웠다. 마흔에 가족들과 떨어져 시작한 '값비싼' 유학 생활이니 만큼 자신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당대 현지 음악에의 탐색 등 전공 분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아내와 가족들, 지인들, 한국 사회에 대한 윤이상의 마음과 삶에 대한 태도 역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시대의 거인' 역시 한 사람의 생활인인 건 당연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물론 주변을 꽤 세세히 챙기며 특히 죽마고우이자 월북 작곡가인 정길 아버지 최상한과 그의 아내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 살림과 아이들 양육을 도우며 함께 산 정자의 결혼에 대해 관심하며 책임을 다하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산청 출생에 대한 언급과 한국의 입상 기념회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모르는 통영 문화계 인사들의 증언에 대해 마뜩지 않아 하는 부분 역시 기억에 남고, 짧은 기록이지만 금세 파악할 수 있는 분위기 같아서 좀 웃기기도 했다.

 

압권은 단연 "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도저한 사랑에 대한 구체적이고 새로운 표현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편지를 읽고 있자니 실은 "듣기 좋은 꽃노래도..." 싶은 마음이 일었고 약간은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5년간 매주 한 통가량의 편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느낌과 이틀만에 놀랍게 반복되는 고백의 편지 89통을 몰아 읽는 차이는 엄청난 것이겠지만 말이다. 단 한 사람의 수신자를 위해 쓰인 글이고, 수신당사자의 결정과 의지로 출판되었고, 대중에 공개해도 되겠다고 판단되는 부분들이 묶였을 것이고, 무엇보다 내가 선택해 읽기 시작한 책이므로 감수해야 할 부분이지만 말이다. 표지도 제목이 풍기는 의고적이면서 센스 있는 느낌도 분명 마음에 들었는데, 체감상 두어 쪽마다 등장하는 사랑의 찬가가 내게는 부담스럽다 못해 좀 아연할 지경이었다.

 

물론 건강도 미래도 별로 밝지 않아 보였던 노총각을 사랑으로 보듬고 늦깎이 유학까지 지원하는 아내를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문제와 별개로 윤이상은 마음속에 한 사랑의 화신을 품은 인물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했다. 너무 반복되니까 읽으며 나도 모르는 탐구가 시작되었는데 중반쯤에 이르러 "당신은 나의 모든 향수와 애착과 공상의 중심. 모든 나의 그리운 상념은 당신으로부터 일어나며 당신의 얼굴속에서 전개되며 당신의 그림자와 동시에 사라지오. 당신이 그런 존재이냐 아니냐는 전연 별 문제이고 나는 그것이 나의 인간성을 집결시키는 요소이며 남편으로서의 도리이며 아버지로서의 길이오. / 나는 당신을 생각할 때 저 먼 바다의 등대를 바라보는 것과 같소. 자나깨나 내 눈에 비치는 이 우뚝 솟은 등대의 불빛이 둘, 셋. 이것이 나의 고향이요, 나의 조국이요, 나의 예술이요, 나의 철학이오."(125p)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는 사랑을 사랑하는 운명을 타고난 인물인가 싶으면서, 그나마 약간 납득하기로 체념했던 것 같다.

 

책장에 묵혀두던 책을 읽게 된 것은 지난 주 강의와 토요일의 답사 덕분이다. 어렸을 때 이수자 여사가 쓴 두 권짜리 책을 읽었는데 워낙 예전이어서 내용을 잊었고, 이후 그에 대한 책을 읽은 건 처음이다. 씨디를 사서 들어보기도 했고 작년 통영국제음악제에서는 작품 연주를 듣기도 했지만 음악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를 못하는 중에, 반공과 분단 시대의 희생양이 된 측면도 있다 보니 내게 윤이상은 존재의 그늘과 무게가 짙은 인물이었다. 책 한 권으로 누군가를 얼마나 알 수 있겠냐마는, 이 책으로 만난 윤이상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지독한 사랑꾼쯤이 될 것 같다. 이전에 여행하며 또 내려와 살면서 윤이상기념관을 대여섯 번은 둘러봤는데, 물론 그의 본령은 음악이지만 이런 인간적인 면모도 더 잘 엿볼 수 있다면 조금은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실은 읽으며, 오늘날의 기준을 잣대로 들이대는 건 부당한 것이라고 세뇌하듯 생각하면서도 가부장적인 태도가 느껴지는 부분에서는 저항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때로 잔소리 진짜 많네 싶기도 했다. 순도 높은 사랑과 의심할 바 없는 운명으로 엮인 남녀 혹은 부부 관계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이나 관점이 결여된 편이라선지, 아무리 사랑한들 이렇게나 전방위적인 압박이라면 거부감이 들지 않을까 싶은 부분도 있었고 세상 처음 보는 무수한 표현들이 수두룩한 연서에 질리는 감도 없지 않았다. 절대 내 타입은 아니지만(죄송합니다) 시대의 정서를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직접 표현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말이다(놀라운 나머지 몇 구절은 아래에 기록해둔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살지 않았던 시대임에도 향수를 느끼게 만드는 테이프 같은 매개물에 마음이 갔고, 이제는 꿈도 꿀 수 없을 '느린 세계'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지나게 될 때면 주의 깊게 보곤 했던 윤이상기념관 외부의 사진 중 일부에 대한 맥락적 이해가 더해진 것도 나름 수확이다.

 

"나는 마치 순진한 중학생이 그의 절대의 애인을 사모해서 날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사랑의 일기를 쓰는 것 같소. 어쩌다가 우리는 알맹이와 알맹이가 만나서 나는 이렇게 당신을, 당신은 그렇게 나를 생각하고 혼자 웃고 혼자 울고 하는 아름다운 운명이 되었소."(30p)
" 내가 마흔의 나이로 자나깨나 당신만 생각하고 있으니 마치 중학생이 그의 눈에 그리는 절실한 연정 같구려."(51p)
"... 그리고 지금 만 1년이 지났구려. 오늘은 당신을 위해서 집에서 당신을 생각하는 날로 정하고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소."(79p)
"여보! 나의 애인, 내가 당신의 사랑에 목말라 이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그때에는 당신의 품에 돌아갈 것이오. 나의 마누라 내가 당신의 평생의 반려자 된 운명을 늘 감사히 생각하며 우주가 열 번, 백 번 바뀔 때까지 그 뒤 몇 백 번을 바뀌어도 당신의 남편 되기를 원하는 당신의 낭군이 뜨거운 뽀뽀와 축복을 보내오."(122p)
"나의 사랑아! 나의 영원의 애인아, 나의 생명의 목표여! 당신의 신체와 영혼 속에 깃들인 성스러움을 나는 믿으며, 나의 즐거움이 또한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리고 어린것들에게도......"(148P)
"... 때때로 당신을 허공에 띄워 생각해 보고 불러 보고 하는 것이 나의 산보할 때의 유일한 낙이오."(165P)
"나는 처음 반 조각의 인간이던 나를 당신이 발견해 주고 사랑해 준 데 대한 당신의 그 대담한 처녀의 순정에 나는 일생 잊을 수 없는 당신에의 사랑을 나의 생리화 시켰으며 나는 경우가 도달하는 대로 당신을 행복하게 할 것은 늘 생각하여 마지않소."(257-258p)

 


윤이상
2019.11.5.초판1쇄, 남해의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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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4. 13. 09:33

 

 

2055년 더스트 폴이 지구를 덮치자 인류는 잔인한 방식으로 생존한 돔 시티의 사람들과 그로부터 밀려나 작은 마을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폐허의 잔해들을 헤치며 위태롭게 전전하는 떠돌이들로 나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고, 더스트에 내성을 가진 이들은 내성종 사냥꾼의 표적으로 팔아넘겨져 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선량하고 이타적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던 더스트 시대를 거쳐, 세계를 재건한 인류는 타인을 짓밟고 생존한 이들의 후손이었다. 학교에서는 더스트 시대를 잊지 않기 위한 '기억 수업'을 진행하고, 더스트 시대 학살의 주역이었던 인간형 로봇의 양산을 제한하며 지난 시대의 명암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지만 흉흉했던 과거는 그런 식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아영은 더스트생태연구센터의 연구원이다. 지구 멸망과 재건이 바꾼 행성 생물들의 변화를 포착하고 탐구하는 더스트생태학은, 더스트로부터 인류를 구한 과학이 재건 이후 풍요를 위한 도구로 기능하는 주요 흐름과 다른 결의 학문이다. 연구센터에서는 더스트 시대에 사라진 작물 품종들을 복원해 먹거리 산업에 기여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되지만, 비주류 학문을 선택한 연구원들은 그런 실용적인 목적보다 자연의 놀라운 힘과 무한한 생명의 신비 자체에 매료된 이들이다. 아영 역시 미생물이나 벌레, 균류, 식물 등이 가진 생명력과 그에 깃든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았고, 더스트 시대에 인간만을 위해 건설된 돔 밖에서 멸종되거나 적응해 변이한 식물들과 종식 이후 생겨난 적응종들이 만들어낸 생태계의 풍경과 생물들의 과감한 변화를 들여다보는 것이 좋았다.  

아영이 더스트생태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린 시절 살았던 도시 온유에서 만났던 노인 이희수와 그의 정원에서 우연히 목격한 푸른 빛의 기억이다. 더스트 시대를 통과한 노인들이 공헌자로 대접받으며 실버타운에 살아가는 마을에서, 지난 시대의 기계들이 가득한 창고와 돌보지 않는 정원을 품은 집에 홀로 살아가는 그는 독특한 존재였다. 공헌자 노인들과는 불화했지만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과는 고장난 가전제품을 고쳐주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아이들에게 친절했다. 아영은 길 잃은 밤 목격한, 정원에 앉아 허공에 시선을 둔 그의 모습과 주위에 떠돌던 푸른 빛의 풍경을 비밀로 간직했고, 어느 밤 그의 집에 맡겨져 들었던 더스트 시대의 이야기와 함께 나눈 대화로 그를 동경하게 됐다. 이따금 기계 부품을 구한다며 며칠씩 집을 비우던 이희수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것에 서운했고 이후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아영에게 이희수의 기억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한때 한국의 최대 로봇 생산지였지만 대표적인 폐허도시가 된 강원도 해월에서 유해 잡초가 이상 증식한다는 민원이 쇄도하고, 더스트생태연구센터에 협조 요청이 온다. 재건 이후 거대한 고철 쓰레기장으로 버려진 해월은 잔해 더미에서 나타난 인간형 로봇이 발견됐다가 사라졌다는 기사가 나왔던 장소이기도 하지만 곧 잊혀졌다. 더스트 시대의 잔혹상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를 뒤덮기 시작한 유해 잡초의 정체는 모스바나로 밝혀졌다. 다른 식물의 뿌리를 감아 고사시키며 놀라운 속도로 주변 모든 것을 잠식하는 이 덩굴식물은 피부와 접촉하면 따끔거림과 상처를 남겼다. 현장을 방문한 아영은 방제작업을 하던 이들이 푸른 빛을 목격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옛 기억을 떠올리며 '스트레인저 테일즈'에 접속해 관련 내용들을 검색하기도 하고 질문을 남기기도 한다.

얼마 후, 멸망 이전의 자연이 잘 보존되어 가장 먼저 재건된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재건 60주년 기념 국제 생태학 심포지엄에 참가한 아영은, '스트레인저 테일즈'에서 소통한 모스바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이를 찾아가 만난다. 더스트생태학의 발생지나 마찬가지인 그곳에는 과거 '랑가노의 마녀들'로 불린 약초학자 자매들이 존재했고 과학계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진위가 의심되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영은 해월에 나타난 모스바나의 푸른 빛과 어린 시절 이희수의 정원에서 보았던 덩굴식물의 푸른 빛을 함께 떠올리며 그를 찾아간다. 소통했던 루단을 통해 아영은 노인이 된 자매 중 나오미의 집에 찾아가, '생존과 번식, 기생에 특화된 식물이자 더스트 시대의 정신을 집약해놓은' 듯한 모스바나와 그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책은 프롤로그와 1장 '모스바나', 2장 '프림 빌리지', 3장 '지구 끝의 온실'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는 알 수 없는 시공간에서 더스트 내성이 없는 언니 아마라와 함께 숲 속의 도피처를 찾아 헤매다 누군가에게 잡혀 의식을 잃는 나오미의 장면에서 멈춘다. 1장에는 2129년 더스트생태연구센터에서 일하는 아영이 해월의 모스바나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불러온 호기심에 끌리며, 국제 심포지엄 참석차 건너간 아디스아바바에서 나오미의 집을 방문해 과거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는 시점까지의 이야기가 담겼다. 2장에서는 더스트 시대를 통과한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더스트 폴 직후 랑카위의 연구소에서 실험 대상이 되었다가 탈출해 파국을 맞은 돔 시티들을 전전하며 멸망한 폐허에 남은 영양캡슐로 연명하던 자매가, 최후의 희망으로 찾은 도피처에서 보낸 날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기록되어 있다. 

더스트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떠돌던 어린 자매를 받아준 도피처는 프림 빌리지였다. 가장 안쪽에는 3중의 유리로 된 비밀스러운 온실이 있고 온실과 마을을 오가는 지수 씨가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을에는 멸망한 세계와 달리 식물이 자라고 수십 명의 사람들은 식물을 돌보거나 정찰 활동을 하거나 맡겨진 책임을 수행하며 함께 살았다. 무성한 숲에 둘러싸여 외부의 눈에 띄지 않았고 드물게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공동체의 지속을 위해 일상적으로 정찰 드론을 띄우고 이따금 발견되는 침입자를 죽이고 폐허 탐사를 나가 물품을 챙겨와야 했다. 온실에 처박혀 식물을 연구하는 레이첼의 해독제와 마을 사람들의 관리로 제공되는 전기의 교환이 상호간의 계약이었고, 양자 사이를 소통하고 조율하는 지수 씨는 안전을 책임지는 로봇과 무기 전문가이기도 했다.

프림 빌리지에서 건강을 되찾은 아마라는 어른들을 도와 식물을 돌보고, 나오미는 하루와 함께 정찰 활동을 했다. 폐허를 떠돌던 자매에게 마을은 비밀스러운 기적이었지만 늘 평온할 수도,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도 없었다. 더스트 폭풍이 몰려 올 때면 의견이 분분해졌고, 마을 사람들을 구한 레이첼의 식물들과 해독제는 희망과 위기를 동시에 불러왔다. 생존이라는 공동의 목표는 바깥 세계의 불안정함에 영향을 받았고, 배신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나오미는 프림 빌리지에서의 삶이 계속되기를 바랐지만 언젠가 끝이 올 거라 생각한 지수 씨는 비밀리에 해독제 제조법을 전수했고, 침입자들이 들이닥친 어느 날 사람들은 맞서 싸우는 대신 모스바나 자루가 실린 호버카를 타고 뿔뿔이 흩어졌다. 급작스럽게 이별에 처한 그들의 약속은 어디로 가든 푸른 빛을 피워올리는 식물, 모스바나를 심겠다는 것이었다.

나오미의 긴 이야기가 아영을 통해 발표되자 증언 속 모스바나와 프림(Forest Research Institute Malaysia) 빌리지는 '멸망의 시대, 식물 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와 그곳에서 개량된 더스트 저항종 식물들, 그 식물을 심으며 함께 살았고 그것을 전 세계로 퍼뜨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학계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희수를 찾아 15년 만에 온유에 갔지만 행방을 알 길 없는 아영은 다시 해월을 찾아 수소문한 끝에 그가 수년 전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누군가 찾아온다면 전해 달라고 맡긴 다목적 기억 칩을 손에 넣는다. 비밀번호를 가늠하며 과거 이희수의 말('식물들은 아주 잘 짜인 기계 같단다. 나도 예전에는 그걸 몰랐지. 나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걸 알려준 녀석이 있었거든.')을 떠올린 아영은 '레이첼'이라는 키를 통해, 이희수가 남긴 과거의 장면들과 조우한다.

더스트 폴 이전인 2053년 여름, 샌디에이고의 솔라리타 연구소에서 지수는 기계 팔 수리를 의뢰한 식물 연구원 레이첼을 처음 만났다. 차가운 표정과 냉랭한 태도의 레이첼은 유기체 비율이 30%도 안 되는 사이보그였지만, 격리된 원자의 정원에서 식물에 집중하는 순간의 그는 애정이 느껴지는 다른 모습이었다. 2055년 가을, 더스트 폴이 터지자 지수는 높은 보수와 돔 시티 거주권 등 안정적인 생활을 기대하며, 바이오닉 병사 관리 인력을 필요로 하는 군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인간의 내장이나 살점이 엉겨 붙어 오염된 로봇들을 정비하는 일은 견디기 어려웠고, 고장난 로봇에 부상을 당한 뒤 호버카를 타고 도망쳤다. 이후 지수는 정비 기술로 생존하며 수많은 '더스트 폴 공동체'를 유랑하며 폐허가 된 세계의 참상을 마주했다. 일 년쯤 떠돌다가 말레이시아의 한 대안 공동체에서 기계 팔 수리를 의뢰하러 온 레이첼을 다시 만났고, 머물던 공동체가 갈등과 분열에 휩싸이자 그곳을 떠나 레이첼을 찾아갔다.

지구를 폐허로 만든 더스트 사태의 원인제공자였던 솔라리타 연구소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자신의 식물들을 구해 빠져나온 레이첼은 숲 속 온실에 틀어박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극적인 순간에 '자살한 사이보그'를 찾아낸 지수가 반갑지 않았지만, 더스트에도 살아남은 식물들과 분해제를 요구하며 신체 유지 보수를 약속하는 지수와의 거래를 수락한다. 이후 학살로부터 도망치거나 돔 시티를 탈출한 이들이 간헐적으로 찾아들면서 온실이 자리한 숲에는 마을이 생성됐다. 둘의 계획에는 없었지만 주변의 돔 시티들이 파멸할 때마다 더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온실과 마을 사이에 교환 거래가 이루어졌으며 지수는 자연스레 매개자 겸 리더가 됐다. 마을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위험도 높아지고, 지수는 평화를 위협하는 이들을 처리하고 가짜 더스트로 숲을 위장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그러는 사이 거래라고만 생각했던 관계는 내일을 믿는 마을 사람들의 활력에 물들며 조금씩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레이첼과 지수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수는 더스트 저항성 식물과 해독제를 통해 '마을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레이첼'과 '오로지 지수에게만 의존하는 사이보그'로서의 레이첼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그 마음의 일부는 솔라리타 연구소에서의 만남 이후 여릿하게 이어져 온 것이었다. 기계 신체의 훼손을 무릅쓰고 연구에 집중하는 레이첼의 내면과 사고가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고, 언젠가부터 불안정한 감정 상태를 보이는 그의 뇌를 정비하던 지수는 갈등 끝에 패턴 안정화 스위치를 올린다. 감정의 동요를 잠재우고 자신에 대한 호의를 끌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죄책감을 물리쳤지만, 이후 별다른 변화를 감지할 수 없었던 레이첼은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기계 뇌의 유기체 잔여물을 제거하며 두 번째 기회가 왔을 때도 지수는 선택을 되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수를 곁에 두고 싶어 마을의 해체를 원치 않았고 이미 연구된 개량종을 비밀에 부쳤던 레이첼의 선택이 드러나자, 지수는 자신의 행동을 고백하고 만다. 자신을 기계 장난감으로 여겼다고 '오해'한 레이첼은 지수에게 떠나라고 단언하고 숲 밖에서도 자라는 개량종 식물들을 전한다. 침입자들의 습격에 식물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떠나보낸 지수가 함께 떠날 것을 거부한 레이첼을 찾아갔을 때, 온실은 불타는 식물의 열기와 푸른 빛으로 가득하고 레이첼은 보이지 않는다. 기억 칩 속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이후 다시 아디스아바바를 찾아 나오미와 아마라를 만난 아영은 지수와 레이첼의 공동체에서 떠난 자매의 삶의 여정 그리고 프림 빌리지의 유산인 모스바나가 퍼져나간 과정의 일부를 전해 듣는다. 시간이 갈수록 모스바나 자체가 아니라, 다시 만들 수 없는 프림 빌리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 계속해서 식물들을 심었고 그것만이 나오미를 살아가게 했다는 것도.

'지구 끝의 온실' 3부작 기사로 연재된 프림 빌리지 이후 자매의 이야기가 아영을 통해 세상에 나가고, 대응협의체의 디스어셈블러 살포 이전인 모스바나 증식 시점에 세계적으로 더스트의 1차 감소가 나타났다는 논문과 연구를 통해 프림 빌리지 사람들의 존재가 증명되기도 한다. 그리고 아영은 문명 재건 6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메일을 주고 받았던 레이첼을 만나 지수의 기억 칩과 그의 늦은 사과를 대신 전한다. 온실의 식물들을 불태우고 떠났던 레이첼은 이후 수십 년간 떠돌았고, 더스트 종식 이후 식물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고 죽을 곳을 찾다가 해월을 찾아갔었다고 했다. 지수와 레이첼이 삐걱거리며 주고받았던 마음은 끝내 만나지 못했지만, 어긋난 채 서로를 휘감던 감정의 실체는 패턴 안정화 스위치의 온오프와 무관한 진실이었을 것이다. 아영은 이후 레이첼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그에게서 받은 지도의 좌표를 따라 프림 빌리지가 있었던 말레이시아로 떠난다. 작은 표지판만이 자리한 그곳에서 아영은 사라진 지구 끝의 온실과 그에 얽힌 온기 어린 이야기를 떠올린다.

잘 짜여졌지만 간단치 않은 이야기였다. 거두절미하고 위기의 순간이 전면화되는 짧은 프롤로그에서 내성종이니 호버카니 하는 초면의 단어들과 외국 이름이 나와 당황했지만, 1장으로 넘어가 배경과 인물이 한국으로 전환되면서 그나마 안도하고 읽을 수 있었다. SF 문외한임에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단편집 모음이어서 부담이 적었고 낯선 개념과 현상을 쉽게 작품에 녹인 작가의 역량 덕분이라고 느꼈었다. 이번에도 비슷했지만 시공간을 오가는 장편이다 보니 복잡하기도 했고 서사도 장황해서 몰입도는 떨어졌던 것 같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과 그 마음"에 대해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은 와닿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재현하는 여러 방식 중 가장 미래지향적이면서도 내게는 매력적이지 않은 소재였다. SF 장편이라고는 [1984]밖에 읽은 게 없는 독자라 송구하다. 읽으며 이런 저런 느낌이 들기는 했는데, 세계를 종횡하는 이야기의 갈피를 따라 정리하다 보니 진이 빠졌다. 괜찮았지만 아주 좋지는 않았으니 아무래도 '세대감성'이란 건 존재하는 것 같다.

영화화 소식을 들었고 읽은 후 주요 인물의 배우들을 혼자 생각해보았다. 아영과 지수/이희수, 레이첼, 나오미, 아마라 등이 될 텐데, 아영은 김태리나 정수정, 지수는 김새론, 이희수는 문숙, 레이첼은 전종서나 이엘 정도가 생각났고, 어린 시절의 나오미와 아마라는 류호존([원세컨드]의 류가녀)과 젠데이아 콜먼이 떠올랐다. 떠올리며 아는 배우가 정말 적다는 실감을 했는데, 이런 캐스팅은 불가능할 것 같고 성사된다 해도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 것 같다. 어떤 역할로든 내가 좋아하는 김선영이 나오면 좋겠고, 작가가 카메오로 잠깐 출연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아무려나 아직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내가 모르는 수많은 배우들이 있을 테니 제작진이 알아서 하겠지만, 실제 영화화된다면 출연진의 9할 이상이 여자인 경이로운 영화가 될 것 같아 그것도 기대된다. 전에 [스펙트럼] 영화화 소식도 들었었는데, 그건 언제 볼 수 있으려나. 


김초엽
2021.8.18초판1쇄인쇄및발행, (주)자이언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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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4. 7. 17:07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태어나 1564년까지 살았던 인물로, 대표적인 작품 "천지창조"("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는 1508년 5월부터 1512년 3월까지 4년에 걸친 작업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재능을 인정 받은 영재로 일찌기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제자로 들어갔고, 15세에는 피렌체 군주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후원하는 전문 미술가 양성소 '산 마르코 정원 학교'에 입학해 조각을 익히기 시작했다고. 20대에 완성한 "피에타"상 "다비드"상의 성공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1503년 즉위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 조각을 의뢰받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천장화 작업을 반강제적으로 맡게 되었다고 한다. 조각가였던 그는 천장화 의뢰를 자신의 실패를 바라는 브라만테(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공사를 담당한 건축가이자 교황 절친)의 음모로 여길 만큼 부당하게 느꼈고 실제로 로마에서 고향 피렌체로 도망쳐 거부하며 버텼으나, 율리우스 2세의 회유와 협박 끝에 소환되어 작업이 성사되었다.

큰 줄거리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작업이지만 비망록 등 기록에 근거한 미켈란젤로의 삶과 가족의 일화, 로마와 피렌체 등 현재 이탈리아 지역의 관계와 역동, 전쟁이 일상이었던 당대의 시대상과 풍속, 주요 등장 인물들의 관계와 특징, 당대 미술 작업의 과정과 특성, 천장화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과 이후의 보수 과정 등이 매우 자세하고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어 책을 읽으며 다른 세계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흥미롭게 느껴진 건 신정일치 시대의 관습과 대중의 정서 같은 부분들이었는데, 후대의 시대 구분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고 한 시대가 끝나고 시작된다고 해서 대중과 사회의 삶과 정신이 기계적 단절과 고양으로 이어지지 않는 건 당연하지만, 종교가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중세적 삶이 지속되는 세계의 구체적인 사실들이 흥미로웠다. 역사의 진전이 사회 모든 분야의 균질적인 진보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도덕과 윤리와는 거리가 먼 종교계 지배 세력의 실상과 그럼에도 대중과 사회를 장악한 권위와 힘 역시 놀라웠다.


천장화를 의뢰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불 같은 성격과 추진력으로 모두의 두려움을 산 인물이었다. 추기경 시절부터 출세가도를 달렸던 그는 고급 매춘부를 비롯한 여인들 사이에서 세 딸을 두었고, 승진할 때마다 한 밑천씩 챙기며 부를 축적했다. 동료들에 대한 뇌물 공세로 교황에 오른 뒤에는 교회법이 금지한 수염을 기르고 사냥을 즐겼으며, 재위 10년 동안 수 차례 교황령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신성동맹까지 결성하며 직접 전쟁에 나섰던 전사이기도 했다. 말년에는 말라리아에 걸린 것을 비롯해 몇 차례 죽을 고비에서 의사의 권고를 무시한 채 왕성하게 먹고 마시며 극적으로 회복하는 놀라운 생존력을 보이기도 했다. 죽는 날까지 율리우스 2세에게 시달렸던 베네치아 대사가 임종이 다가오자 그를 상대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했다는 것이나 스페인 대사가 발렌시아의 정신병원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교황보다 덜 미친 편이라고 했다는 부분은 웃기기도 했지만, 오늘날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당시 교황들의 비종교적인 실체와 타락상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그런 율리우스 2세로부터 어거지로 천장화를 맡게 된 미켈란젤로는 교황 앞에서 굽실거리기를 거부한 극소수 인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4년 동안 자신의 스타일대로 비밀스럽게 천장화를 작업하며 교황이 분노할 때는 도망도 가고 때로는 대들기도 하면서 수 차례의 급료 협상에도 적극적이었다고. 최악의 권력자인 교황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던 최고의 예술가는, 명예와 인정을 갈구하는 완벽주의자이자 동시대 미술가 그룹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자기 비하와 타인에 대한 질시에 빠져드는 인물이기도 했다. 작업은 언제나 심신의 번뇌와 혹사를 동반하는 것이었지만 함께하는 소수의 조수들은 대체로 성에 차지 않았고 불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울증과 자기연민, 귀족 가문의 자손이라는 속물적 확신을 물려준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장인 취급밖에 받지 못하는 미술가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지만, 가족들은 그의 부양으로 살아가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근심거리를 제공했다. 

율리우스 2세가 독보적이겠지만 이전의 교황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교회는 세속화를 넘어 부패의 온상이었고, 그럼에도 인간의 힘으로 예측하거나 방어할 수 없는 자연재해는 진노한 하느님의 징벌로 간주되어 대중의 정신과 삶을 교회에 귀속시켰다. 이에 더해 당시 사람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환몽과 점성술, 전조와 예언적 지식을 신뢰했다. 특히 도미니코 수도원의 수사 사보나롤라는 메디치가의 피렌체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열광과 예술의 새로운 흐름, 당대의 삶에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온 복고주의 열기에 분노한 인물이었다. 그는 피렌체인들이 열광하는 악기와 그림, 단테와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책 필사본을 불더미에 던지라는 극단적인 호소와 함께 피렌체의 몰락을 예언했는데, 2년 후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피렌체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규모 침략군을 대홍수에 비유하며 열변을 토하면서 대중을 공포와 비탄에 빠뜨리던 사보나롤라는 1497년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설교와 예언 활동 중단 명령에 불응해 파문되고 다음 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타고난 천재적 재능과 치열한 노력으로 작업에 매진하며 긴 삶을 보낸 미켈란젤로의 가장 큰 버팀목은 흔들림 없는 신앙이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사보나롤라를 매우 좋아했으며 수십 년 후에도 그의 음성이 귓전에 생생하다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하느님의 진노가 인간 세계에 불과 유황의 천벌로, 홍수로 화할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은 미켈란젤로에게도 섬뜩한 의미로 각인됐고, 전반기 작품의 형상화에도 영감을 제공했다고.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하나인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의 발흥 자체를 멸망의 전조로 규정했던 사보나롤라의 메시지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시기와 사건은 후대에 명명된 것이지만 말이다. 당시 미술가들이 고급 매춘부들과 곧잘 어울리던 것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유흥과는 거리가 먼 금욕적인 생활자였고 기력 약화라는 성행위 후유증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인물이기도 했다는데, 그의 삶은 끌어간 가치와 신념에는 일관성이 있었던 것 같다.

오로지 작업을 위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인간 미켈란젤로에 대한 묘사나 수사는 대체로 부정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매사 불평과 불만이 많았고 주변에 친밀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초인적인 노력으로 이뤄낸 기념비적인 성취에도 불안과 수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볼품없는 용모와 기형적인 체구 등 외모를 자조하는 신세타령 같은 시들을 남기기도 했다는데, 그런 컴플렉스가 준수하고 역동적인 인물 구현의 기폭제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천재의 인간적인 면모라고 느끼기에는 좀 애달프다. 그가 천장화 작업을 하는 기간 바티칸궁의 벽화 작업을 하던 라파엘로가 빼어난 외모와 훌륭한 인품으로 사람들을 매혹하며 일군의 팬덤을 형성하고 사교적이고 화려한 생활을 했던 것과 대비되어, 미켈란젤로의 고독하고 외골수 같은 면모는 더욱 부각된다. 당시 많은 미술가들이 자신의 후원자를 작품에 새겨 불멸화하는 데에 적극적이었지만,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천장화 작업을 하면서도 그런 시도보다는 신체 구조와 움직임의 정밀함에 골몰하며 새로운 미학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성향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전에 다른 책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신체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려내기 위해 시체 해부까지 했다는 걸 읽고 깜짝 놀랐는데, 미켈란젤로 역시 시체를 해부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였다고 한다. 르네상스 거장쯤 되면 당연한 과정인가 싶기도 하고, 오늘날처럼 인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밝혀지기 전이니 직접 부딪치는 방법을 택하는 게 탐구의 정도인가 싶기도 하지만, 놀라운 일이다. 그는 인물을 그릴 때 항상 먼저 누드 상태를 완성한 후에 옷을 입히는 과정을 거칠 만큼 재현에 완벽을 기했고, 천장화는커녕 제대로 된 프레스코화 작업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과감한 단축법을 구사해 관객의 시선에서 천장을 바라볼 때 인물의 입체감을 살리는 표현에 성공했다고 한다. 애초에는 거부하고 4년간 고통스러워하며 작업을 끝낸 시점의 미켈란젤로는 30대 중반에 불과했고, 그는 이후 반 세기를 더 살았다. 1536년에 시스티나 예배당에 돌아와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를 제단 벽에 그렸고, 말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총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고 한다.

주인공 투탑은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이지만, 책에는 정말 많은 당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물론 율리우스 2세 시기 로마를 방문해 큰 환대와 자신의 합법적 태생 인정서를 들고 돌아간 뒤 [우신예찬]을 통해 교황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한 에라스무스, 교회 개혁 탄원을 위해 반체제 수도사로서 로마를 방문했다가 큰 환멸을 느꼈던 젊은 루터, 이름을 찾기 위해 다시 책장을 들춰볼 엄두가 안 나는 밀라노 볼로냐 베네치아 우르비노 페라라 피렌체 등등 이탈리아 지역 여러 공국의 군주들과 지배층이었던 종교인들이 그들이다. 분야의 장벽 때문에 한 권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인물들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동하는 덕분에, 수백 년 전 새로운 시공간을 추체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 독서였다. 400쪽이 넘는 본문에 꽉 찬 이야기들 중에는 기억하고 싶은 인상적인 부분들이 참 많았는데, 헛된 욕심이므로 접기로 한다.

배낭 여행 중이던 2000년에 나 역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수많은 인파에 밀리며 본 적이 있었는데, 아는 바가 없는 관계로 별 감흥이 없었다. 서양미술사 강의 시간에 미켈란젤로에 대해 들으며 예전 <방구석 1열>에서 나왔던 [아거니 앤 엑스타시] 영상을 보게 됐는데, 책 말미에 가장 최근인 1989년에 완료된 복원 작업을 통해 드러난 미켈란젤로가 조수진을 이끈 정황과 함께 그에 대한 언급("1965년 어빙 스톤의 소설 [고뇌와 환희]를 각색한 영화에서 찰톤 헤스톤이 연기한, 비계 위에 드러누워 혼자 고군분투하는 미술가의 이미지를 도려내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이 잠시 나온다. 복원 작업을 통해 그을음을 벗은 벽화가 가려졌던 진실을 알려준 것처럼, 실존 인물에 덧입혀진 신화의 빛을 걷어낸다고 그 예술혼의 위대함과 위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종횡무진 방대한 이야기들이어서 뼈대를 제외하면 곧 잊히겠지만, 인물과 사건 못지 않게 시대에 대한 호기심과 신정일치 세계를 살아간 대중에 대한 상상력을 증폭시켜준 고마운 독서였다. 


로스 킹•신영화(옮긴 이)
2007.4.27. 은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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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3. 20. 11:20

 

 

체코의 늙은 노동자 한탸는 35년간 폐지 압축공으로 일하며 서양 문명사의 근간이 된 철학자들의 사상과 문화예술의 정수를 흡수해 '뜻하지 않게 교양을 얻게 된' 자다. 지하 작업실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책들은 일거리를 넘어 일상을 지탱하는 삶의 양식이자 본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 책들은 곧 꾸러미로 묶여져 폐기될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 쥐떼와 파리떼가 들끓고 오물이 가득한 지하에서 인생의 빛이 되어준 책을 폐기하는 이율배반의 노동을, 한탸는 잦은 농땡이와 맥주까지 곁들이며 '성심성의껏' 수행한다. 폐지 더미 속에서 찾은 보석 같은 책들을 읽으며 몽상에 잠기고 아름다운 그림이나 멋진 장정을 발견하면 꾸러미를 멋지게 장식해 포장하는 것이다.

 

정부 방침에 의해 무의미한 쓰레기로 화하는 귀한 고서들을 일별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하는 일도 기쁨 중 하나다. 철학 교수에게 관심하는 책을 전하며 부수입을 챙기고, 비행에 관해 '작은 생명체와도 흡사한' 서가를 꾸리고 탐독하는 프란티크 슈투름에게 폐지 더미에서 발견한 책을 선사하는 일은 양자 모두에게 비밀스럽고 소중한 의례다. 더러운 지하 작업실에서의 노동으로 한탸는 늘 지저분하고 곳곳에 꽉 들어찬 책들로 집마저 평안한 휴식의 공간이 되지 못하지만, 은퇴 후 압축기를 구매해 자신만의 폐지를 꾸리며 여생을 보내기 위해 저축을 할 정도로 이 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있다.

 

중노인이 된 한탸의 고독한 삶을 채운 것이 책만은 아니었다. 그도 한때는 멋내기를 좋아하는 청년이었고 어머니가 떠준 보라색 양말과 유행하는 샌들을 신고 설레며 만났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순간에는 낭패와 치욕이 함께했고 '똥바가지 쓴' 만차와의 어이없는 이별은 몇 년 후 재회해 함께한 여행에서도 우스꽝스럽게 반복됐다. 어느 날 거리에서 따라와 집안으로 스며든 집시 여자는 그를 위해 감자수프를 끓이고 불을 피우고 사랑으로 충만한 순간들을 나누었지만 자취없이 사라졌고, 게슈타포에 의해 비극을 맞았다. 폐지를 모아 지하 작업실로 가져오는, 필름 없는 사진기 앞에서 한껏 포즈를 취하는 두 집시 여자와 집시 경찰의 성공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동네 집시들에 대한 선의의 시선은 '이름 모를' 집시 여자가 한탸에게 남겨준 마음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한탸는 40년간 철도원으로 일했던 외삼촌과 닮았다. 일이 유일한 기쁨이었던 그는 은퇴 후 국경 지대의 폐역에서 낡은 선로 변경 장치를 사들여 집 정원에 설치하고 레일과 기관차까지 갖춰두었다. 무를 좋아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화장해 무밭에 유골을 뿌리고, 거기에서 자란 무를 수확해 함께 나눠먹은 사람도 외삼촌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은퇴한 노인들이 즐거워하는 가운데 자신의 기관차 운행에 몰두하곤 하던 외삼촌은, 선로 변경 초소에서 뇌졸중으로 죽음을 맞았다. 폭염 속에 보름이나 방치된 시신을 수습한 한탸는 외삼촌이 애지중지 모아둔 금속 조각들을 관 속에 쏟아부으며, 아름다운 꾸러미를 장식할 때처럼 공들여 그를 떠나보냈다.

 

외삼촌의 죽음 이후 부브니에 엄청난 크기의 수압 압축기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한탸는 직접 보러 나선다. 그곳에는 세련된 유니폼과 장갑, 천장의 환풍기, 컨베이어 시스템 등을 갖추고,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는 새로운 인간들이 있다. 효율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대의 일꾼인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은 맥주 대신 우유와 코카콜라를 마시고, 휴식 시간에는 그리스 휴가 계획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온몸을 담그며 오랫동안 일해온 진창 같은 자신의 현장과는 사뭇 다른, 매끈하고 규격화된 변화를 목격한 한탸는 모욕감에 휩싸인다. 고대 그리스의 정신에도 책들에 숨겨진 가치에도 무지하고 무관심한 젊은이들의 여유로움과,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그를 이어온 책들을 사랑하면서도 그리스는커녕 일이 밀릴까봐 하루 휴가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거대한 수압 압축기로 대표되는 새로운 현실의 충격파는 한탸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부브니에서 돌아온 한탸는 작심한 듯 맥주 대신 우유를 구해다 마시고, 이전과 달리 책들을 폐기하는 일에만 기계처럼 매진한다. 부속품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일을 대하고 성심껏 사랑했던 한탸는 다른 사람이 된듯 열중해 일을 해치우고 쓰레기까지 싹 치우며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보이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상부에 보고를 마쳤다는 소장의 결별 통보다. 상심한 마음에 추억 속 만차를 떠올린 한탸는, 그가 여러 차례 초대했던 프라하 교외 클라노비체의 저택을 방문한다. 천사의 조언과 잇따른 사랑과 온전한 의지로 자신의 집을 갖게 되고, 사는 동안 즐기고 죽으면 무덤을 덮을 노예술가의 천사 조각까지 얻게 된 만차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 '책을 혐오한'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는 만차는, 한탸에게 부브니와는 다른 결의 각성을 선사한다.

 

얼마 후 아침, 한탸의 오랜 작업장에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이 배치를 받아 당도한다. 한탸에게는 다음 주부터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상공 비행 경험을 담은 책 한 권을 프란티크 슈투름에게 선사하는 것이 마지막 기쁨이 되었고, 거리에서 조우한 철학 교수와 나누던 수수께끼 같은 대화도 끝이 났다. 사랑하는 압축기에서 강제 분리된 한탸가 느끼는 것은 존재를 덮친 모멸감과 배신감, 황망함과 허무함이다. 타데우스 성인의 기도대 앞에서 기적을 바라며 기도하는 한탸의 뇌리 속에는 묵시록의 압축기가 된 자신의 압축기가 모든 걸 파괴하고 거대한 정육면체로 압축되는 망상이 떠오른다. 거대한 마지막 꾸러미 속에는 프라하도, 평생 스며든 텍스트와 사고를 품은 한탸도 압축되어 있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 "내 놀라운 기계가 나를 배신한 것이다."

 

한탸는 환상 속을 걷듯 방황하고, 머리속에는 주마등처럼 모든 일들이 지나간다. 기대로 들뜬 데이트는 여지없이 망가지고, 잘못한 것 없이 용서를 비는 일이 당연했던, 낭패와 불운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한탸에게 구원이 된 것은 지하 작업실에서의 폐지 압축일이었다. 소장의 구박과 욕설에도 자신만의 리듬과 속도로 일하며, 세계의 축소판인 하나의 우주를 구가했던 시공간이 있어 한탸는 살아갈 수 있었다. 그속에는 한탸를 매료시킨 사상과 예술이 있었고 고대 그리스 이래 문명과 정신의 계보를 이어온 수많은 인물들이 신기루처럼 방문해 함께했다. 그러나 한탸는 전환의 시대를 맞은 새로운 흐름에 의해 하루아침에 추방되었고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카페의 의자를 부수고 사람들을 위협한 거인, 아름다운 시를 읊기 위해 누군가의 목에 칼을 들이댄 남자를 떠올린다.

 

존엄을 위한 '승천'을 결심한 한탸는 35년간 부려온 폐지들이 가득한 압축통 안에 자신을 위한 '작은 은신처'를 마련한다. 비감어린 자기연민 따위 없이 그는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읊조리며 통으로 들어가 책 속에 안겨 버튼을 누른다.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느니 여기 내 지하실에서 종말을 맞기로 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변화가 몰아치는 세계에서 한탸는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 사라져버리기를 택했다. 고독과 실패가 호흡처럼 자연스러웠던 외골의 삶, 그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이름이다. 어쩌면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하고 사라져버린 집시 여자의 이름, '일론카'.

 

 

모임의 3월 책이었고 나의 추천으로 함께 읽었다. 몇 년 전에 읽고 책 정리할 때 처분했었는데 유난히 마음에 들었던 제목이 가끔 떠올랐지만, 내용은 마치 영화처럼 드문드문한 이미지로만 몇 장면이 남았다. 책을 알게 된 건 아는 이의 트위터에서 였는데, 체코가 배경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무척 인상적으로 읽고 뭔가 벅찬 느낌을 받았던 기억 그리고 얇은 두께여서 서울에서 안산을 오갈 때 읽었는데 오전의 한산한 지하철과 창으로 들어오던 햇살의 기억은 희한하게도 선연하다. 서양문명사의 인물들이 무시로 등장하는 한탸의 내면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지만, 혼자이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자주 소란해지는 까닭에 제목이 요즘의 내 상태를 표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시 생각이 난 것도 같다. 아무래도 나랑 잘 맞는 것 같으니 소장해야지 싶어 중고서점에서 다시 책을 샀고, 다시 읽으며 이렇게 새로울 수가! 수시로 놀랐다.

 

처음에는 1960년대 배경이라는 점 때문에 한탸의 체념과 회의의 상당 부분을 전쟁과 연관시켜 읽어내는 과하게 개성적인 오독에 빠졌는데, 마침 얼마 전에 본 [페인티드 버드]가 2차대전 당시 동유럽을 배경으로 한 체코 영화다 보니 자꾸 함께 떠올라 시너지를 냈다. 필요 이상의 모래성을 쌓고 있다는 느낌이 들 즈음부터 조금 더 한탸라는 인물에 집중하게 됐던 것 같고,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말처럼 한탸의 일생은 모순과 상실, 아이러니의 동의어처럼 느껴졌다.

 

악취와 오물과 파리떼와 쥐떼들에 둘러싸인 실존과 그리스 로마 시대로부터 이어진 지식과 교양을 사유하고 희구하는 정신, 그 간극을 오가며 살아가는 한탸의 경험과 인식은 비현실적이지만 낭만적이고 우울하지만 우습기도 하다. 그럼에도 구체적 개인보다는 그의 경험 속에 등장하는 군상들과 그의 삶이 표상하는 지향 같은 상징적인 부분으로 자꾸만 생각이 미치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동서양의 지성들을 섭렵한 한탸의 삶은 대단히 지적이면서도 일차원적이고 비루한 경험들이 하나로 응축된 것이었고, 그 혼재의 낙차에서 배어나오는 유머와 아이러니는 인간사의 희극과 비극을 유려하게 담고 있는 게 아닐까. 좋았지만 쉽지는 않았는데,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지난해 초의 책이 25쇄라서 놀랐다. 모임에서는 반응이 그저 그러했기에 이 책이 이렇게나 많이 읽히는 이유가 뭘까 새삼 궁금해지기도 했다.  

 

1960년대의 체코라는 시공간적 배경과 헬레니즘을 원류로 한 서양지성사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다 보니 등장하는 수많은 레퍼런스의 의미나 맥락을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욕심 낸다고 알아챌 수 있는 게 아니다 싶어 패스하며 읽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한탸가 꽉 쥔 '나의 노발리스'만은 궁금해 따로 찾아봤다. 노발리스는 18세기 후반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주요 작가로, 첫 번째 약혼녀 소피의 죽음에 깊은 영향을 받아 1800년에 <밤의 찬가>라는 작품이 발표했는데 1801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많은 작품과 저작이 유고로 남아 폭넓은 분야에 영감을 주었고, 문학 작품에 드러난 사랑과 죽음에 대한 찬미와 짧은 생애로 인해 낭만주의를 상징하는 작가로 여겨진다고.

 

아무려나, 문명의 집적과 세련된 야만이 교차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고수하며 살아가던 주체가 결정권을 상실하며 마주한 극한의 현실과 나름의 단호한 자기 해방은 인상적이고 서늘했다. 실패한 몽상가이거나 광인이거나 골방의 천재이거나 할 한탸의 독백과 회상은 때로 블랙코미디처럼 실소를 자아내고 때로 디스토피아의 속살을 헤집듯이 아프지만,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지키고 끝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선뜩한 단호함이 시대착오적이거나 사회에 대한 부적응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짧은 소개글로 알게 된 작가의 삶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물과 어둠,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것들의 향연 속에서, 옮긴 이의 말마따나 결국 연민과 사랑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세상에 작가가 존재하는 이유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보후밀 흐라발
2016.7.8.1판1쇄 2021.1.4.1판25쇄, (주)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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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3. 17. 23:58

 

 

공학자이자 예술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자연과 인간, 사물 등에 대해 연구한 기록과 작품을 통해 그의 방대한 예술 세계를 과학적으로 탐색하는 책이다. <모나 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그린 르네상스의 거장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놀랍고도 다양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저자(마틴 켐프는 '다 빈치의 예술과 과학'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인 영국의 미술사학자라고)의 관심과 전공 분야 덕분인지 책은 '독특한 경력', '주시', '신체와 기계', '생명의 지구', '작품 이야기', '리자의 방, 레오나르도의 사후' 등의 목차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레오나르도는 각종 연구와 작품을 위한 메모와 스케치 등의 기록을 매우 충실히 했던 인물이었고 80% 정도가 소실되었음에도 6,000쪽이 넘는 친필 자료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분석과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창작 활동을 수행했고, "자연이 보여주는 모든 외적 다양성이 실은 내적 통일성의 징후"라는 전제 아래 "우주의 조직, 즉 전체로서의 우주가 그것의 모든 구성 요소들, 무엇보다 인간의 몸이라는 소우주 혹은 '더 작은 세계'에 반영된다"는 학설을 고수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적 근거 위에서 자연을 깊이 관찰하고 분석하고, 동물은 물론 인간(1507~8년 겨울 산타마리아 누오바 병원에서 행복한 죽음을 직접 목격한 100세로 추정되는 노인, 남긴 기록에서 '베키오'라고 부른다고)도 직접 해부하는 등 경험적 탐구를 통해 완벽한 시각적 표현과 자기 이론에 철저한 작품을 추구했다고.

 

책은 다 빈치의 골몰과 그 흔적들을 여러 가지 스케치와 기록, 구상이 구현된 작품과 저자의 설명으로 꽤 자세히 보여준다. 고도로 발전된 기술문명의 결과를 당연한 현실로 누리며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전혀 궁금증을 가져본 적 없는 과학적이고 근본적인 각종 원리들을 직접 탐구하고 그 결과에 의거해 창작 활동에 매진한 다 빈치의 명석하고 왕성한 정신 활동이 놀라웠다. 그는 인간의 여러 감각 중 시각을 우월하게 여기고 실제 사물과 현상의 구체적인 시각화를 위해 뇌와 눈의 구조와 각 부분의 기능을 연구했고, 빛을 통한 시각 정보 처리 과정과 감각 및 지식 영역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도 나름의 이론을 정립했다고 한다. 또 공학자로서 비행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새의 날개와 유영을 관찰하며 '거대한 새' 즉, '우첼로'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던 기록(실물 제작 증거는 없다고), 그리고 2003년 영국의 서식스 구릉지대에서 그의 '우첼로'를 구현한 실험을 통해 그의 통찰과 설계도가 어느 정도 유효함이 입증됐다는 사실 등도 흥미롭다.

 

이외에도 물의 운동 상태 관찰을 통해 '순환, 회전, 전환, 타진, 경사화, 상승, 하강, 소모, 충격, 해체' 등 관련한 64개의 목록을 작성하고 소용돌이 형태의 분석을 통해 선형적이고 곡선적인 요소와 나선형 구성 등에 대해 얻은 통찰로 인간의 머리카락이나 장식, 옷주름 등의 완벽한 표현에 이르렀다는 것, 건축에 있어 "어떤 기능에 본질적으로 완벽하게 부합되고, 부족함이나 넘침이 없는 형식인 필연성"을 달성하기 위해 기하학과 비례에 몰두하며 사물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공간감, 원근법 효과의 기술을 창안했다는 것, 운하와 지하 수로 건설을 위해 자연의 지형과 거대한 물의 흐름을 관찰하고 물리학과 지질학을 결합한 연구를 통해 성서의 '대홍수' 묘사에 합리적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 등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밖에도 놀랍고도 대단한 연구 사례들이 즐비한데, 과학적 호기심이 제로에 가깝고 내 깜냥으로 소화도 이해도 어려웠던 부분이 많이 제대로 정리할 수 없는 게 좀 안타깝다.

 

1452년에 토스카나의 빈치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십대 중반쯤부터 피렌체의 조각가이자 다방면의 예술을 섭렵한 안드레아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활동하며 성장했고, 최소한 30년간 피렌체 등 궁정에 고용되어 일했으며 로마와 프랑스에도 머물렀다고 한다. 말년에는 프랑스 왕가의 부름에 앙부아즈에서 머물며 작업하다가 사망해 생 플로랑탱 부속 예배당에 묻혔다고. 주로 귀족이나 왕궁에 고용되거나 후원자들을 위해 일했기에 계약이나 협상에 관한 기록, 임금 체불 해결을 호소하는 편지 등이 남아 있고, 그가 작품 활동의 대가로 현금이 아닌 특정 지역의 물에 대한 수익권을 받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시공을 뛰어넘은 천재의 또 다른 면모와 시대의 일면을 상상해볼 수 있어 재미있었다.

 

이 책으로 만난 다 빈치는 과학과 기술, 예술이 경계를 넘나들고 전쟁이 빈번하던 시대의 잘나가는 종합 예술가, 화가로 조각가로 건축가로 다양한 분야의 기술공학자로 또 궁정의 일과 관련한 여러 분야의 예술 컨설턴트로 살아갔던 최고의 르네상스인이었다. 서양사에서 손에 꼽히는 중요한 인물이고 소수의 완성작에 비해 엄청 많은 자필 기록들이 남아 있어 셀 수 없이 많은 연구들이 계속되고 있고, 출생지와 활동지 및 말년의 거주지와 온전히 보존되지 못한 묘지에도 그를 기념하는 공간이 조성되어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때가 되면 각종 기념 행사들이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수백 년 동안 그에 대해 무수한 저서들이 출간되었고, 현대의 권위 있는 연구자 중 한 명일 저자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다 빈치의 연구와 작품 활동을 조망한 셈이 되겠다.

 

인물로 보는 서양미술사 강의를 신청하고 계획서 상 첫 번째 주제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해 좀 알아야겠다 싶어 선택한 책이었고, 소장도서 검색 결과로는 예상할 수 없어 서가를 한참 서성거린 끝에 너무 두껍지 않은 분량으로 낙점했는데, 막상 첫 번째 강의 주제는 강의계획서가 업데이트된 결과 라파엘로였다. 독서의 동기가 무화되어 당황스러웠지만, 역사적 위인으로만 박제되어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고 어떤 생동감이 이미지에 더해진 것 같다. 문외한으로서 학술적인 전문성 함량이 높은 내용이 좀 버겁기도 했고 '인간적 면모' 좋아하는 자로서 가끔은 지루하게도 느껴졌지만 말이다. 생애에 대한 기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살라이와 프란치스코 멜치에 대해서도 약간 호기심이 생겼는데 언젠가 적당한 책으로 그의 삶에 대해서도 읽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마틴 켐프•임산 옮김
2006.4.5초판제1쇄인쇄 4.10발행, (주)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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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3. 8. 17:01

 

 

바람기 잘 날 없는 아빠와 그로 인한 고통을 독한 말로 쏟아내는 엄마로부터 독언 면역력과 개폐식 귀와 눙치는 재주를 습득하며 성장한 재인, 재욱, 재훈은 둘째의 출국을 앞두고 적당히 데면데면한 여행을 함께하고 휴게소 음식을 거부하는 셋째의 의견을 존중해 국도변의 한 식당에서 바지락칼국수를 먹는다. 그저그런 맛의 칼국수에는 형광색 조개가 들어 있었고, 여행을 마친 삼남매는 각자의 삶터로 흩어진다.

 

첫째 재인은 연구원으로 일하는 대전의 과학단지로, 둘째 재욱은 중동 지역 사막의 플랜트 현장으로 떠났다. 터울이 큰 막내 재훈은 얼마 후 고등학생 뒷바라지가 힘겨운 엄마의 즉석 결정으로 미국 남부 조지아주 시골의 교환 학생이 되었다. 아마도 함께한 식사 이후 세 사람은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털어놓기 애매한 초능력을 갖게 되었고, 그를 인지한 직후 남매들에게는 각각 "Save 1, 2, 3"라고 적힌 카드와 함께 손톱깎이, 레이저 포인터, 열쇠가 택배로 도착한다.

 

가장 먼저 변화가 일어나고 감지한 것은 재훈, 잦은 지각의 핑계로 알맞은 80년대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어느 날부터 자신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에 즐비한 고층 건물들과 엘리베이터들은 재훈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지만, 교환 학생이 되어 떠밀려온 조지아의 염소 농장과 전교생 백 명이 안 되는 작은 학교에서 그의 초능력은 무의미하다. 왕따와 인종차별을 거쳐 만난 학교 친구 테이트와 피비와 개비, 그리고 홈스테이의 안주인 케일라와 그의 아버지인 페리 할아버지 정도가 재훈의 일상에 함께하는 지인들이다.

 

플랜트 현장의 사무직인 재욱은 몇 년 전 큰 사고를 당했고 회복 후에도 몸의 반응 상태가 전과 같지 않다. 언젠가부터 때때로 시야가 붉어지곤 했는데 두 달 정도 관찰한 결과, 어떤 문제가 벌어지는 방향과 장소에서 그 붉기의 강도가 더해진다는 걸 알게 됐다. 즈음 재욱 앞으로 레이저 포인터가 당도했고, 불빛 없는 사막에 장난 삼아 레이저를 쏘아보곤 하며 발신자와 용도에 대한 의구심은 조용히 밀쳐두었다. 사무직과 현장직 간 기싸움에서 막내인 재욱은 비교적 잘 처신하며 초기 적응을 마쳤고, 머리를 잘라주며 가까워진 현장직 산제이와는 또래로서 조금씩 친해진 참이다.

 

대전으로 돌아와 손톱을 깎던 재인은 손톱깎이가 부러졌다. 여러 번의 시도에도 마찬가지 결과, 재인의 손톱은 무기처럼 강력하고 날카롭게 거침없이 자란다. 연구원답게 잘라낸 손톱을 현미경으로 관찰해 성분을 분석한 재인은 룸메이트이자 소울메이트인 경아에게도 비밀로 부치고 사내 1인 프로젝트를 통해 손톱을 배양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배양에 성공한 손톱에서 추출한 물질로 바이오플라스틱 만들기에 성공하자, 재인은 사고 위험이 상존하는 실험실에서 부상을 입지 않도록 동료들의 가운을 남몰래 가져와 수선하느라 바쁜 주말을 보낸다.

 

삼남매에게 당도한 미션카드의 "Save 1, 2, 3"은 이러한 과정을 경과해 조금 더 나아가야 만날 수 있다. 재훈은 페리 할아버지를 통해 버섯 먹은 사람들의 위험을 알게 되었고 친구 셋을 구한다. 재욱은 붉어진 시야를 따라간 사막에서 위험에 처한 두 소녀를 조우하고 나름의 전략적인 접근으로 산제이와 함께 소녀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낸다. 재인은 제멋대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 아빠 때문에 황폐해진 엄마 그리고 데이트폭력을 당한 경아의 전남친을 퇴치하는 데에서 무기가 된 손톱의 초능력을 발휘한다.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가 내가 읽은 정세랑 작가의 첫 번째 책이었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책도 영상도 보지 못했지만 기발하고 분방한 상상력이 현실과 결합된 작품이라고 들었다. 상상력이 심각하게 결핍된 편이어서 그런 이야기에 별로 흥미가 없지만 산문집을 재미있게 읽었어서 얇은 소설을 택했는데, 이게 '요즘' 소설의 어떤 경향인지 작가의 고유한 개성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사건의 개연성이나 인과관계를 따지는 건 옛날 사람이나 할 짓이지만, 나는 옛날 사람이므로 맥락 없는 우연과 설명되지 않는 돌발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잘 몰입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짧은 소설이어서 읽기에 지겹지는 않았고 전혀 모르던 분야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세한 묘사와 설명이 새롭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작가의 말'이었다. 제목에 쓰인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작가의 친구, 막내는 친동생의 이름을 실명 그대로 빌려왔는데, 실제로 연구원으로 일하고, 사막 파견을 다녀온 친구들과 조지아 염소 농장에서 생활했던 친동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소설의 토대가 되었다고.

 

"아무것도 아닌 우연, 아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에는 매우 부합되는 귀엽고 가벼운 소설이었다는 느낌이고, 초능력 부적응자인 내게는 블링블링한 표지 만큼이나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새로운 세계였다. 작가의 소설을 더 찾아서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의 다정함과 친절의 총량을 늘리고자 하는 마음만은 반가웠다.

 


정세랑
2014.12.17.1판1쇄인쇄 2021.9.7.1판8쇄발행, (주)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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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3. 7. 23:49

 

 

최승자 시인이 1994년 8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인터내셔널 라이팅 프로그램(IWP)에 참가하며 그리고 이후 한 달간 샌프란시스코 버클리에서 체류하며 남긴 기록들이 묶인 산문집이다. 초판 발행이 1995년 4월이고 마지막 일기가 1995년 1월 16일이니 미국 체류 당시에 쓴 내용을 거의 그대로 출간했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엄청 생생하고 솔직한 글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제대로 시를 읽은 바 없이 그의 현재에 대해 알려진 정보에 기대어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읽었었다. 강렬하고 고독하고 독보적인, 그러나 비극적인 삶의 주인공이 된 시인이라는 이미지와 내멋대로 덧대었던 감상적 시선이 완화되기도, 어떤 면에서는 강화되기도 한 독서였다. 마음에 진하게 파장을 일으킨다거나 아주 좋다고 느끼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궁금해졌고, 주로 기고문이었던 이전 책과 달리 온전히 자발적이고도 개인적인 글들이어선지 시인의 한 시기에 대해서만은 조금 알게 된 느낌이다. 의외로 무척 재미도 있어서 금세 읽었다.

 

구경이나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시인은 난생처음 해외 경험인 IWP의 요청으로 무더운 여름, 집에 틀어박혀 자신의 시를 44편이나 번역했다고 한다. 번역 과정에서 그 시를 쓴 사람이므로 자신은 알고 있고 느낄 수 있는 단어 하나가 가진 여러 가지 뉘앙스의 비율을 영단어로 바꾸며 살릴 수 없었던 난감함을 설명하면서, '아 슬픔이여'라는 시구에서도 그 컨텍스트 안에 풍자와 경멸감, 진짜 슬픔 같은 감정의 뉘앙스와 비율이 나뉘어진다는 예를 든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고 그래서 시는 독자의 마음에 각기 다른 반향을 일으키는 것도 같지만, 그래서 내게는 시 읽기가 어려웠던 것인가 싶기도 했다. 어느 시에서는 '청춘'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가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아 아예 'XX'로 바꿨는데, 그 시를 읽은 동료 남성 시인들 몇이 생각지도 못했던 성적인 단어를 언급해 나중에 다시 시집을 묶을 때 '청춘'으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른 맥락에서 나온 일화였지만 시의 '어려움'이 그런 걸까 싶어졌다. 

 

책에는 시인의 의외의 면모들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었다. 우선은 과천에서 시 번역을 하며 수영을 배우러 다닌 것부터 나로서는 신기했고, 직접 옷을 디자인하고 만들어 입기까지 한다는 것, 식욕이 별로 없고 소식하는 건 이미지 그대로였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즐긴다는 것 역시 그랬다. 음식과 옷에 대한 관심이 우주와 세계를 이루는 생명체와 어떤 질서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로부터 사상의학이나 역학, 점성술과 양자물리학 등에 대해서도 공부하며 근원적 연결고리를 탐구하는 모습 그리하여 한 총체로서의 인간이자 가장 용이한 대상인 자신에 대한 관찰과 실험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시인은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지녔지만 별로 감상적이지는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대단히 분석적이고 지적으로 면밀한, 세계와 섭리에 대한 완결적 이해를 추구하는 완벽주의자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 어떤 과부하가 걸려버린 것은 아닐까 싶어서 주제넘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IWP가 진행되는 아이오와시티는 인구 6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로, 인구의 절반이 대학 재학생이고 나머지는 교수와 가족 등 관련자들이 중심인 대학 도시이자 주민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각종 문화예술을 즐기고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문화가 정착된 독특한 도시라고 한다. IWP를 주관하는 아이오와대학의 문예창작과는 대학 졸업자여야 입학할 수 있고 학생들 중에는 이미 시인이거나 소설가인 사람들도 있으며, 여러 지역의 대학을 다니면서 최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일들로 유랑하듯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아이오와시티에 모여들기도 한다고. 세계 각지의 문인들을 초청해 생활은 물론 여행 경비까지 지원하며 몇 개월간 워크숍과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IWP 역시 그런 흐름 속에 있는 전통인 듯했고, 그를 통해 작은 대학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이 다양해지고 풍부해지는 선순환의 과정이 지속되는 것 같기도 했다. 

 

주로 문학서를 번역했던 시인은 영어 회화와 특히 히어링에 대한 큰 우려를 안은 채 미국으로 향했는데, 피지 출신의 너그럽고 적극적인 룸메이트가 '통역자' 역할을 자처한 덕을 톡톡히 보며 일종의 일시적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IWP 주관의 워크숍이나 파티에 참여하고, 주최측이 준비한 밴을 타고 다운타운에 나가 장을 보고, 이따금 지역에서 열리는 문화예술 행사나 관광으로 혹은 마음이 맞는 몇몇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주변의 서점이나 헌책방에서 책들을 탐색하고, 강변을 산책하고, 때로는 방에 처박혀 생각에 골몰하는 등의 생활상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이오와대학 기숙사 메이플라워 8층에서 함께 생활하는 수십 명의 참가자들 중 친하게 지내거나 자주 만나고 교류하는 인물들, 이런저런 역할로 그들을 돕거나 함께하는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들의 인상과 그들과의 다양한 일화들이 꽤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읽다 보니 전혀 모르던 그들이 어느샌가 아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룸메이트인 쇼나, 페미니스트 작가 베릴과 수를 비롯한 다양한 나라의 작가들과 아이오와대학 문창과에 재학하며 IWP 참가자들의 이동을 돕는 마크와 마틴 등이 주요 인물이었는데,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 얼굴에 웃음을 띠고서 하이, 헬로 하고 돌아다니려니 얼굴에 탈바가지를 쓰고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라던, 반사회적인 한국인의 이미지를 줄까봐 마지못해 이런 저런 파티에 참석하던 시인이 몇 달이 지난 후 그들과의 헤어짐에 울컥 아쉬움을 느끼고 스스로도 낯선 포옹으로 이별을 하는 장면에서는 괜히 나까지 서운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글 자체는 담담하지만 청춘을 지나 경험하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캠퍼스 생활의 분분한 활기가 낭만적으로 느껴졌고, 물론 잘 맞지 않는다거나 싫어한다고 직접적으로 기록한 이들도 있었지만 다정함과 호감을 감추지 않고 서로를 궁금해하며 북돋아주고 살피는 이들의 관계와 소통이 든든하고 애틋하게도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런 느낌을 받은 데에는 글이 쓰여진 시기와의 시차도 한몫했다. 1994년의 세계는 휴대폰과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는 지금과는 달리 아날로그적인 생활 방식이 지속되던 시절이고 일상 생활의 양상이 질적으로 급속하게 변화하기 전의 시대니까. 시인은 당시에도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썼고 컴퓨터도 사용했지만 디지털 기반의 생활 양식이 본격화되기 전이다 보니 필요한 연락은 유선전화나 팩스로 해야 했고, 자료는 복사를 하거나 물성을 가진 책으로 마련해야 했다. 각자의 방에서 작업하는 서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IWP의 작가들은 전해야 할 이야기를 누군가의 방문 틈에 쪽지를 밀어넣는 일도 잦았다는데, 휴대폰 하나만 없어도 즉시적이고 직접적인 일방의 소통이 남용될 수 없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만큼 청량하게 느껴졌다. 구체적인 날짜로 시작되는 글들이 이어지다 보니 한번씩은 그날의 나를 생각해보게도 되었는데 흐른 세월 덕분에 즈음의 기억만이 떠올랐지만, 지금과는 아주 달랐던 근과거의 생활 세계가 선사하는 향수 같은 것이 밀려오기도 했다.

 

명석하고 예민하고 분석적인 개인이자 시와 번역으로 언어를 다루는 작가로서, 문화예술을 존중하고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소도시이자 거대한 미국 변방의 문화관찰자로서 시인이 경험하고 참여하고 관찰하며 느낀 바를 기록한 부분들도 흥미로웠다. 글에는 일상적으로 열리는 '리딩' 행사에 대한 시큰둥한 감상과 판단의 변화, 유러피언 백인들로부터 시작되어 언어의 보물창고 역할을 하는 블랙 랭귀지와 신조어들의 사회문화적 확장, 페미니즘적 실천으로서의 문학과 개인주의에 근거해 페미니즘으로 사회적 외연을 확장하는 문학에 대한 견해, 소수자의 정체성 찾기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층위의 사건과 현상 들에 대한 이야기가 즐비하다. 외부자이자 일시적 내부자로서 자신의 기존 경험과 인식에 비추어 관찰하고 분석한 많은 이야기들 중에는, 시차로 인해 이미 당연해졌거나 익숙해진 부분들도 많지만 시의성과 무관한 시사점을 제시하는 느낌이었다.

 

1995년 4월에 책을 펴내며 시인은 "이 일기에 나오는, 필경은 아마도 내 눈에만 보일, 꿈틀거리며 새로 태어나려 애쓰는 내 자신의 모습이 내게 힘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굉장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면서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토로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과거형으로 설명하거나 몸의 상태 혹은 우울증 같은 단어를 빌어 상황을 객관화하는 방식의 쓰기라고 느껴졌고, 그것이 시인의 성격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자주 시인이 행간에만 숨겨둔 말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는, 아이오와에서의 시간들이 이후의 날들에 따뜻하고 애틋한 힘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주제 넘은 상상을 했다. 시인은 "나는 프로그램화된 사회에서 살아왔다"로 스스로 정의한 '사회학적인 나에 대한 발견'과 운명처럼 만난 점성술 책을 통한 '심리학적인 나에 대한 발견'을 가장 큰 수확이라고 글을 마무리하는데, 내게 더 큰 공감을 전한 구절은 뒤표지에 문정희 시인이 쓴 "뜻밖에도 아이오와는 그에게 최초로 뜨거운 해방의 기억과 사랑을 안겨준 것 같았다"라는 문장이었다.

 

일기를 쓰지 않은지 꽤 됐지만, 일기에 모든 것을 쓰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쓰지 않은 것에 대해 함부로 추측하거나 알은 체하는 것이 실례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꾸만 쓰여지지 않은 마음을 상상하며 책장을 넘기게 됐던 이유는, 우습게도 시인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던 것 같고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시간 속에서 생동하는 이들의 어떤 날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읽고 나니 한 편의 소설 같기도 하고, 얼굴이 지워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동료들과 어울리며 찍었다는 사진들이 궁금했지만 당연히 실려 있지 않았고 그 편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시인의 호감을 통해 나 역시 호감을 느낀 몇의 이름은 혹시 번역된 책이 있을까 해서 검색도 해보았는데 찾지 못했다(다른 맥락이지만 시인이 [굶기의 예술]을 통해 폴 오스터에 대해 느끼는 친밀함과 찬사는 반갑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했다.).

 

 

"어떤 나무들은 바다를, 바다의 소금기를 그리워하여 바다 쪽으로, 그 바다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바다 쪽으로 구부러져 자라난다고 한다. 그런 나무들이 생각났다."(51쪽)

"나는 내 시에게 아무런 깃발도 들려주고 싶지 않고 아무런 상표도 붙여주고 싶지 않다."(219쪽)

"무슨 일이든지, 무슨 분야든지, 시 쓰는 일, 번역하는 일, 하다못해 삯바느질하는 일에서까지도 결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생각된다. 자기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 자기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221-222쪽)

"벗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잘 벗어지질 않는다. 내가 그렇게 심각하게 의식하지 못했었던, 내가 걸치고 있는 줄도 몰랐었던 이 빌어먹을 무의식적·관념적·억압적 망토의 존재를, 그 결코 쉽게 벗어던질 수 없는 그 망토의 무게를 나는 이곳 아이오와에서 톡톡히 느끼고 있다."(266쪽)

"나는 언제나 나 자신으로 꽉 차 있어서 나 외부의 것에는 흥미를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꽉 채우고 있는 나 자신은 죽음처럼, 송장처럼 내 내부에 누워 있기만 한다. 이 내 내부의 송장을 어서 치워버리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일어나 문을 열고 나로부터 나가다오."(329쪽)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나는 의식 상태에서 보자면 큰 혼란을 겪지 않는 사람인데, 언제나 내 무의식은 저 혼자서 커다란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내 의식은 그것조차 접수하기 싫어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결국은 내 몸과 내 몸을 통해 보이는 현상들이 내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가를 보여준다."(336쪽)

 

 

읽으면서 기억하고 싶거나 인상적이거나 무척 공감이 되거나 하는 구절에 수십 개의 포스트잇을 붙여놨었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 번 서두의 '시인의 말'들을 읽고서, 이것도 부질 없는 강박이지 하며 다시 떼었는데 그래도 결국 몇 구절은 옮겨두고 만다. 워딩은 휘발되고 인상만 남은 몇몇 구절들을 다시 찾는 건 관두기로 했더니 아쉽기도 하지만, 모두 적어두려는 욕심은 이 책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다. 개정판 '시인의 말'은 짧은 시처럼 간결하다. 400쪽에 이르는 긴 이야기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아이오와는 좋아했었다.”라는 단정한 한 문장으로 갈음된다는 것이 세월과 인생이 주는 선물일까. 고작 산문 두 권이었고 한참 전의 기록들이지만, 이제 시인의 이름에 내맘대로 드리웠던 그늘을 걷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찬찬히 시를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고 어줍잖은 감상을 앞세우지 않고 '시'로서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 읽기의 즐거움과 추진력을 다시 얻은 느낌이다.

 


최승자
2021.12.10초판1쇄인쇄 12.20발행,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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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2. 27. 11:59

 

 

절대 하룻밤에 읽을 수는 없었다. 직전의 두 권 짜리 책이 무척 술술 읽혀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목차도 내용도 흥미롭고 궁금한 것이었음에도 대체로 책장을 펼치면 졸음이 오고 지루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드물게 조금 아는 부분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걸 보면 무지의 소산이겠지만, 글씨가 작고 어렸을 적 ‘교과서’ 같은 구성과 집필이어서 공부 안 하던 소시적 습관이 나도 모르게 나온 건가 싶기도 했다.

 

아무려나, 대출기한까지 연장하며 꼭 다 읽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결과 거의 일주일 동안 느릿느릿 읽어내는 데에 성공한 나를 칭찬한다. 초판을 19쇄나 찍은 후의 개정증보판이고, 저자도 재미있게는 몰라도 쉽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힌 걸 보면 그냥 대중서일 뿐인데, 이렇게 힘들게 읽은 원인은 나의 지식 수준에서 찾을 수밖에 없겠다. 구구절절 쓴 이유는 앞으로 역사 공부를 꾸준히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책 읽다가 자꾸만 헷갈리는 부분들에 지쳐서 유튜브를 찾아본 결과 나름 마음에 드는 채널을 알게 되어서 기쁘기도 했고 괜히 든든하기도 하다.

방대한 유럽사를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설명하면서 중요한 부분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전체 목차나 각 절의 구성 등에 노력한 흔적이 느껴졌고, 주요한 사건의 과정이나 인과관계를 정리한 도표와 지도 등도 적절하게 들어가 있어서 깨알 같은 본문과 대비되는 시각적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각 절 마지막 부분에 박스로 처리된 '역사 메모'를 제외하면 저자의 주관적 견해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은 점도, '교과서처럼' 읽기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었다.

역사 관련 책을 많이 읽지 않아 초면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부분에 수록된 영국, 프랑스,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 러시아의 '유럽의 왕가 연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참조하기에 좋을 것 같아 따로 메모를 해두었는데, 굳이 넣지 않아도 될 부분에 성의를 보여준 게 고맙게 느껴졌다. 아무튼 의외로 고전했지만 다 읽고 나름의 정리도 한 번 하고 나니 유럽사에 대한 흐릿한 밑그림 정도는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뿌듯했고, 그러나 앞으로 '하룻밤에 읽는' 따위 수사에 현혹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윤승준
2004.1.20.1판1쇄 2011.10.28.1판19쇄 2012.9.28.2판1쇄발행, (주)알에이치코리아

 

 

 

 

 

역사를 다룬 책에서는 숱하게 전쟁이 등장한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주역은 극소수 영웅에 한정되고 민간인의 참상은 피상적인 언어로나마 서술이라도 되면 다행이다. 권력의지 1도 없는 인간으로서 인접 지역에 자리잡은 집단/국가의 팽창에 따른 필연처럼 서술되는 전쟁의 동기에 공감할 수 없었으나,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온 역사라는 건 상식이고 그러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인류의 몫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도중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포털 메인의 기사나 트위터를 통해 조각조각 소식을 접하며, 내가 누리는 안락한 시간과 여유로운 독서가 민망해진다. 전쟁이 조속히 멈추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그리고 외면하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는 다른 전쟁, 다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슬프고 무력한 일이지만, 멈추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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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2. 2. 22. 15:11

 

 

중세 유럽이 배경인 영화들로부터 시작된 관심이 서양사의 큰 흐름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오랜만의 역사 관련 독서로 확인한 것은, 어릴 적 세계사 시간에 배운 내용은 당연히 까맣게 잊혀졌고 교과서에서 강조됐던 커다란 사건은 그 전말도 인과관계도 오리무중인 채 키워드로만 기억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서양사에 대한 대략적인 교양이 바탕이 되어야 소설이든 영화든 더 잘 이해하며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럼에도 역사 서가의 두껍고 방대한 책들을 당장 소화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조금은 편법처럼 선택한 책이다. ‘편력'이라는 제목을 보고 일단 쉽게 한 번 훑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빌렸는데, 목차를 주마간산으로 본 탓인지 생각처럼 큰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흥미로운 주제를 쉽게 풀어낸 덕에 재미있게 읽었다.

책에는 서설 '서양사로 세계의 문을 열다'로부터 저자가 선정한 94가지 장면에 대한 글이 시대순으로 담겨 있고, 1권 마지막에 저자의 특별한 연구 주제라는 존 밀턴에 관한 글 5편이 실려 있다. 꼭지마다 다양한 사건과 인물과 현상 등을 주제로 구성된 글들은 짧지만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칼럼처럼 느껴졌는데, 선정된 장면에 대한 간명하고 친절한 설명에 그로부터 비교하거나 참조할 수 있는 한국의 상황 혹은 저자의 사유와 주관이 첨언되는 형식이었다. 오랫동안 서양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며 관련 번역 작업을 해 온 노학자가 후세대들에게 지난 역사를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가 책 전반에 걸쳐 세심하게 담겨 있다. 어느 정도는 출판사를 믿고 빌려왔기에 관점에 대한 우려는 별로 하지 않았고, 다행히 저자의 글에서는 국수주의적인 시각이 느껴지지 않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짧은 글들의 묶음이어서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얻기는 어려웠지만, 유사한 주제로 이어지는 몇 편의 글들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해당 부분에 대한 맥락을 잡기에는 좋았던 것 같다. 도판과 사진이 풍부하게 삽입되어 있고, 주제로 다루는 인물이나 사건 등과 관련된 소설이나 특히 영화에 대한 소개가 무척 많았는데 실제 역사와 형상화한 작품의 차이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짚어준다. 저자는 서설에서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세계사 과목이 존재감을 거의 상실한 교육 현장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는데, 그러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넘어서보려는 노력처럼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독자의 관심을 배가시켜주는 것 같았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나 인물을 다루는 영화들이 대체로 블록버스터인 까닭에 나로서는 제목만 들어본 작품들이 많았는데, 덕분에 그냥 지나쳤던 영화들이 새삼 궁금해졌고 중고 dvd로라도 사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대로 올수록 각종 사료들이 많아지기 때문인지, 고대와 중세를 다루는 부분은 다른 역사 관련 책들에서도 마주친 내용들이 적지 않았는데 근대와 현대에서는 저자의 관심과 관점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승리한 남성'이 주인공이었던 역사 기록의 특성과 한계는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근현대 부분의 몇 꼭지에서 글 쓰는 여성과 여성 참정권 운동의 주역들을 다룬 부분은 반가웠고 헬렌 켈러가 식민지 조선에 방문했던 이야기와 당시의 사진은 나만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신기하고 신선했다. 1권에 비해 2권에서는 좀 더 지엽적이고 미시사적인 주제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어느 정도는 현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시대적 상황이나 연관성 때문인지, 읽는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울 정도로 '국가경쟁력'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나오는 건 개인적으로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얇지 않은 두 권의 책 전반에 저자의 사적 견해가 꽤 꼼꼼히 배어 있는 것에 비해, 의아하거나 거슬리는 부분이 단 두 군데(1권의 흑사병 부분에서 '작은 선물'이라는 표현, 2권의 아리안족 인구 정책 부분에서 '출산장려정책 하나만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부분)에 불과했다는 건 은근히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몇 달 전 책 모임에서 정한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를 읽으며 수시로 부대꼈던 걸 떠올리며, 이 저자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찾아 보니 저자는 예전에 궁금해서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의 역자이기도 했고, '스탠다드한'(그런 게 있다면) 서양사 책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바람에 부합할 것만 같은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의 역자이기도 했다. 무척 재미있게 읽기도 했지만 자신의 연구 분야에 진심이고 관점에도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는 '박상익'이라는 저자를 알게 된 게 큰 수확인 책이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은 탓에 읽으며 수십 개의 포스트잇을 붙여뒀지만 따로 메모나 정리를 하지는 못한 아쉬움에 목차를 옮겨둔다.  


1권

제1부 고대
1 인류는 모두 하나
2 크로마뇽인의 공감주술
3 람세스, 모세, 그리고 프로이트
4 알렉산드로스의 세계시민 정신
5 어린 시절 꿈으로 트로이를 발굴해낸 하인리히 슐리만
6 패자도 동화시킨 로마인의 정치적 지혜
7 한니발의 계산착오
8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9 ‘반달리즘’과 피맛골

제2부 중세
10 문맹의 샤를마뉴, ‘유럽 통합의 씨앗’을 뿌리다
11 중세 대학의 탄생
12 중세 유럽의 대학 생활
13 12세기는 번역의 시대
14 중세 전성기의 종교·문학·건축
15 중세 베네치아의 ‘날개 달린 사자’ 브랜드 마케팅
16 와트 타일러의 난과 지배 계층의 ‘꼼수’
17 안경 제조법, 중세 유럽에선 ‘1급 비밀’
18 중세의 삶과 죽음
19 화약, 중세 유럽의 ‘비대칭 전력’
20 줄무늬의 이중성
21 우물 안 개구리 중세 유럽인이 꿈꾼 ‘외계’
22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
23 간발의 차로 뒤바뀐 잉글랜드의 운명
24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칼레의 시민’

제3부 근대 Ⅰ
25 대담한 오류 덕분에 항로를 찾아내다
26 천연두로 몰락한 아스텍 문명
27 목숨보다 신용을 중요시한 바렌츠 선장
28 루터의 만인사제주의와 근대
29 ‘정신의 귀족’ 자부한 세계시민 에라스뮈스
30 유럽 부흥의 계기 마련한 레판토 해전의 빛나는 승리
31 세르반테스, 에스파냐의 번영과 몰락을 문학에 담다
32 분열의 시대에 더욱 빛난 지성 몽테뉴
33 바로크적 지성, 파스칼
34 미혼 여성이라는 약점을 장점으로 활용한 엘리자베스 1세
35 영국 여왕의 ‘007 스파이’
36 가이 포크스 데이, 극심한 갈등도 세월 흐르면 ‘축제’로
37 세 분야에서 천재성 보인 뉴턴
38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근대’
39 루이 14세의 절대권력, ‘시간’이 심판하다
40 표트르 대제 개혁의 한계
41 18세기의 그랜드 투어, 해외 관광여행의 효시
42 18세기 유럽의 위조 미술품 거래
43 정통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
44 영국의 천재 공학자 브루넬

제4부 밀턴
45 종교가 권력이 될 때 얼마나 무섭게 변질되는가
46 권력 앞에 당당한 영혼
47 생각을 숨기고 정직한 표정을 지으면
48 존 밀턴, 한국 지식인에게 ‘영혼’을 묻다
49 언론 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

 


2권

제5부 근대 Ⅱ
50 ‘원숭이’로 조롱받았던 다윈, 승패의 관건은 도덕성
51 다윈과 글래드스턴,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
52 선진기술 과시한 런던 박람회
53 17세기, 어린이가 어른으로부터 독립하다
54 아미스타드호 선상 반란
55 100년 전 프랑스 “목욕할 때도 몸 보지 마”
56 ‘철혈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 세계 최초로 사회보장제 도입
57 괴테의 모국어 자랑, 관건은 ‘풍부한 콘텐츠’
58 산업혁명 선두주자 영국이 독일에 뒤처진 이유
59 옥스퍼드 영어사전, 초판 간행까지 71년 걸려
60 나폴레옹 시대 신병의 72퍼센트는 키 150센티미터 이하
61 페달 없이 발차기에 의존한 최초의 자전거
62 리스본 대지진 참사를 현명하게 수습한 폼발 총리
63 후세가 잘못 이해한 토머스 칼라일의 《영웅 숭배론》
64 “머리 위에는 별, 마음속에는 도덕” , 철학자 칸트
65 카를 마르크스의 다양한 모습
66 인문학 천재 존 스튜어트 밀
67 페미니즘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68 ‘영국의 양심’ 윌버포스, 쓰레기통 정치를 바꾸다

제6부 현대
69 영국 자유당의 사회개혁, 중산층 외면으로 ‘흔들’
70 여성 참정권에 바친 일생, 에멀린 팽크허스트
71 여성 참정권 부르짖으며 죽음 택한 에밀리 데이비슨
72 전쟁 계기로 일터 나간 영국 여성, 보답으로 참정권 획득
73 무능한 국방장관 수홈리노프, 러시아 왕조 멸망 불러
74 사상 최악의 참호전 벌어진 1차 세계대전
75 극한의 전쟁터에서 꽃핀 ‘크리스마스 평화’
76 빨간 마후라의 원조가 된 ‘붉은 남작’, 리히트호펜
77 전승국들이 강요한 베르사유조약, 더 큰 재앙의 씨앗 되다
78 레닌 사망, 신학생 출신 스탈린이 우상화 작업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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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히틀러, 신무기 ‘V1’ 발사 개시, 전쟁 이길 것으로 착각
90 히틀러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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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오바마 부친과 화해한 미 백인, 동족끼리도 ‘소통’ 안 되는 한국
98 프랑스 고령사회
99 스위스 시계산업의 흥망


박상익
2014.12.22초판1쇄인쇄 12.23발행, 도서출판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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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