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게도, 연말연시 일주일 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부대끼면서 늘 기다리는 것은 일요일 한낮의 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내 방, 무려 일주일간의 그 햇살 가득한 한낮을 차분하고 고요한 독서로 가득 채우겠다던 마음은 그러나 해를 넘기며 늘어지는 낮잠과 하릴 없는 소일들로 흘러갔고 이래서는 안되지 싶어 결심하듯 잡아든 올해의 첫 책이었다.
사위가 고요한 새벽에 마주한 검은 책장 속 창백한 그녀의 얼굴, 돌아보면 삶이 늘 '목마른 계절'인 것은 누구에게나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다른 천재와 함께 타고난 그녀의 고독과 집착에 함께 침잠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일제강점과 동족상잔으로 얼룩진 어두운 현대사와 결코 동시대로 합치시킬 수 없을 만큼 빛나고 또 그늘진 그녀의 시대에 한껏 경도되어 뮌헨의 회색빛 하늘을 동경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우연히 가닿은 손끝에 걸려든 서른 한 살로 인생을 마감한 그녀, 그리고 나는 새해를 맞으며 그 서른 하나가 되었다. 이제는 그 누가 뭐라해도 어른인 나이를 살아내야하는 나,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어찌할 수 없는 고독과 몸부림은 아프고도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참으로 많은 것을 지니고 태어난 그녀의 삶은 모든 것이 너무나 넘쳐나서 늘 모자랐는지도 모른다. 인식에 온 생애를 바치겠다던 그녀의 성정은 너무나 풍부했고 세상의 미세한 흔들림도 비껴가지 못할 만큼 예민한 촉수는 단 한 순간도 쉴 틈 없이 그녀의 심신을 뒤흔들었다. 나는 그녀가 이룬 지적 성찰과 인식의 순례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생에 걸친 그녀의 공개된 기록을 곱씹으며, 그녀만큼 살아낸 동년배로서의 공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지상에 외롭지 않은 영혼이 어디에 있으며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는 존재가 어디에 있겠는가마는, 그 외로움과 그 집착이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협하는 싸늘한 공기가 되어 돌진하는 세상 속에서 그녀는 단 하루도 제 정신으로 살아내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비범을 타고난 인물이 그 비범을 향해 내리꽂히는 세상의 무게를 감내할 수 있는 강한 심장 또한 선사받지 못했을 때 얼마나 처연하고 쓸쓸해지는가를 새삼 그녀에게서 느낀다. 한 평생을 공감의 대상에 연연해하는 동시에 인간의 비극이 홀로이지 못한 데서 온다는 이율배반 속에 몸서리쳤을 그녀의 삶은 어쩌면 반생이었기에 그나마 행복한 것은 아니었을까.
늘 인식에 목말라하며 정신의 결핍에 갈급해했던 그녀의 삶은 어쩌면 철없는 불꽃놀이였는지도 모른다. 순수하고 정갈한 양심으로 세상의 빛을 마주하려했던 그녀의 삶을 다시 읽으며 새삼 그녀의 존재에 감사했다. 운명적으로 평범할 수 없는 존재의 고독을 감히 내가 알 길 없지만, 사후 그 많은 동경과 선망의 가슴들을 그녀가 어디에선가 어루만지고 있다면 영혼이나마 따스하게 적셔지지 않았을까.
사후 40년이 다 되도록 끊이지 않는 골방의 숭배가 비록, 그녀만큼이나 세상을 무기력하고 권태롭게 느끼는 부유하는 영혼의 소녀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이라고 해도 시대를 앞서 불꽃처럼 살다간 전혜린이라는 한 존재의 의미를 반감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는 의와 식과 주만으로는 도저히 감당되지 않는 삶의 한 영역이 엄연히 공존하며, 무엇인가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그 어떤 것 때문에 지금도 끝없이 고통에 겨워하는 누군가가 세상 한 구석에는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전혜린,이라는 이름은 피폐해진 스스로를 돌아보고 세상으로 나아갈 원동력으로 삼을 충분한 이유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2004-01-04 02:27,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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