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2. 5. 31. 22:57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발표된 통영 출신 소설가 김용익의 소설집 두 권 중 첫 번째 책이다. 표제작 "꽃신", "동네술", "겨울의 사랑", "서커스 타운에서 온 병정", "밤배", "씨값"이 한국어로, 마지막으로 "The Wedding Shoes(꽃신)"이 영문으로 실려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한국전쟁 이후 부산과 통영을 무대로 펼쳐지는데, 시간적 배경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짧은 소설임에도 처음에는 읽으며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단편이니 더욱 그렇겠지만, 나는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되어 어리둥절한데 화자는 거두절미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이미 상황 안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생활상과 사회문화적 환경, 이따금 등장하는 낯선 어휘나 사투리 때문에 물 흐르듯 읽히지 않기도 했고, 몇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토속성과 향토적인 요소들도 거리감을 더했다.

 

그럼에도 더러 등장하는 서정적인 문장들이 있었고, 내세울 것 없고 보잘것없는 인물들의 애틋한 마음과 안타까운 상황이 잘 그려져 한두 작품을 읽은 후부터는 그럭저럭 몰입할 수 있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개벽한 부산과 통영의 옛 모습과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고, 몇 세대만에 완전히 변화한 의식과 정서의 격차를 확인하는 일도 흥미로웠다. "겨울의 사랑"과 "밤배"가 내게는 인상적이었는데, 콤플렉스인 '언청이'를 비밀에 부치고 다방(이름이 '푸른 돛', 아무 상관없지만 오랜만에 시인과촌장을 떠올리며 반가웠다.)에서 일하는 지안에게 다가가지만 끝내 어긋나고 실패하는 몽치의 비극적인 연정이나 부산에서 통영행 밤배를 타는 군상들의 묘사, 미국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고 귀향길에 오른 화가 조상만의 내면을 통해 전해지는 세계의 내외를 막론한 격세지감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급속히 사라져가는 전통과 밀려오는 현대의 격랑에 휩쓸리는 인물들과 욕망들이 처연했던 "꽃신", 시대의 장난에 휘말리는 개인의 운명을 웃픈 소극처럼 그린 "동네 술", 깊은 연민을 속으로 감춘 채 허세를 부리는 딕과 그를 이해하고 작은 인류애를 완성시키는 조군이 등장하는 미국 배경의 "서커스 타운에서 온 병정", "소나기"의 농촌 생활 밀착형 다크버전 같았던 "씨값"도 그러고보니 확 빠져 읽지는 못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아련하고 아이러니하고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 꽤 좋아하는 편임에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아무래도 '매력적이지만 우수에 찬' 인물이 아닌 서사와 사건 못지않게 음울하고 마이너한 인물들만이 즐비했던 덕분인 것 같다. 뭔가, 나의 그늘에 한 치의 판타지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고집 같은 게 행간에 단단히 자리잡은 느낌. 아무려나, 내게는 그러하였다.

 

김용익은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해방 이후 몇 년간 부산대에서 전임강사를 하다가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1958년부터 고려대와 이화여대에서 강의했고 1965년에 미국으로 이주해 다시 한국에 돌아온 것이 1995년인데 그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영어로 발표되었고 1960년대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고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위상에 비해 한국에서는 거의 통영에서만 존재감을 가진 소설가라는 느낌이다. 책 말미 해설에, 언어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강용흘이나 독일의 이미륵과 가깝다고 짚은 부분이 있었는데 약간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이후 스스로 번역과 개작을 거쳐 한국에서도 작품을 발표했고, 이 책의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다.

 

김용익을 처음 알게 된 건 몇 년 전 통영을 여행하면서다. 이후 통영에 살며 긴 산책을 할 때 정량동에 있는, 형과 동생의 이름이 나란히 붙은 김용식김용익기념관을 밖에서 보며 지나치곤 했었는데 얼마 전 도서관 강의 답사 덕에 처음 들어가보았다. 통영읍장의 아들이었던 그들의 생가 자리에 조성된 기념관이라고 하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아주 큰 집은 아니지만 적당한 마당에 작은 연못과 물레방아를 만들어놓았고 내부는 몇 칸으로 나눠 그들 가족과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와 자료 들이 전시되고 있다. 해외에서 오래 생활했다지만 한국에서 짧은 말년을 보냈고 통영에 묻혔다고 하는데, 기념관에 그가 쓰던 펜 정도의 유품도 하나 없는 점이 의아했다.

 

아무튼. 통영에 살며 이름을 자주 마주치는 관계로  '통영 한정 추앙'에 대한 의구심을 동반한 궁금증이 있었고, 책방을 꿈꾸는 자로서 약간의 의무감도 느끼며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던 차에 도서관 강의 덕분에 한 권을 먼저 읽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큰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작가나 작품에 대한 순수한 호감이나 호기심으로 시작된 독서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만품감동을 추구하기에 세상에는 너무 많은 읽지 않은 작품들이 있으니, 굳이 서운해하지는 않으려 한다. 

 

 

김용익
2018.11.30초판1쇄 2020.11.20.2쇄, 남해의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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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