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1:22

발간된다는 소식을 접하고부터 기대로 기다렸고, 바쁜 와중 틈틈의 독서로 이른 봄내 책장을 덮치락하면서 참 행복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부터 마음의 감동을 온전히 끄적여두고픈 욕망이 가시질 않았지만, 책의 두께만큼이나 장대하고 거대한 한 생의 기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 것인지 갈등하다가 그만두는 반복이 여러 번 있었다. 워낙이 기록에 집착하는 스스로를 위한 숙제로 오늘은 꼭! 했더니 처음 떠오른 진심어리되 유치한 제목, '목사님 사랑해요!'.

94학번인 내게 그가 행한 사회적 활동은 대체로 과거형으로 각인되어있었고 그의 죽음은 위대한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정도의 소회로 지나쳐갔었다. 대학 시절 가끔 그의 시집을 들춰보기는 했었지만, 그 질박한 언어와 진심어린 가슴에 감동했다기보다는 주로 교지에 들어갈 화보를 고민하다가 막힐 때 불순한 의도로 뻗치는 손길이 가닿는 몇몇 시집의 리스트 중 하나였다. 오히려 문성근이나 문호근의 활동으로부터 그들의 아버지임이 연관되어 가끔 떠오르는 정도였다. 이후로는 '윤동주 평전'을 읽으며 알게 된 그의 어린 시절이나 고구려인의 기개를 이어받은 북간도 아름다운 젊은이들에 대한 가슴 뻐근한 선망의 기억.
 

1918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1994년 마감한 그의 인생은, 우리 현대사의 최격동기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꽤 극적인 운명의 궤적을 그리며 맞아떨어진다. 물론 위대한 누군가의 삶에 대한 사후 해석의 경우 역사와 사회와 개인의 개연성은 결과론적 분석을 통해 온갖 유의미한 가치들이 덧붙여지곤 하지만, 내가 느낀 문익환의 경우에는 그것이 어떤 선민의 운명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만큼 지극한 것이었다.
 

호방하고 대아적인 북방민족의 기질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소시민적 가족 이기주의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국가와 민족을 향하는 정의와 실천의 결사체인 가족공동체의 일원으로 태어난 문익환. 훤칠한 키에 창백한 피부, 왕성한 학구열과 예민한 감수성에다 어린 시절 이미 속된 세상 저 너머를 희구하는 성직에의 꿈을 간직했던 병약한 신체의 소유자. 내 속의 노란 관심을 굳이 감추지 않겠다는 고백 하에, 청년기까지의 그의 모습은 진정 내가 충분히 열광할 만한 좌파 순정만화의 주인공과 같은 모습이다.
 

윤동주, 장준하, 정경모 등 그의 인생에 적잖은 영향을 준 지인들과의 만남과 관계, 단 두 명의 통역관만이 배석한 정전협정의 순간을 목도한 개인적인 경험 등은 그가 거인으로 운명지워진 선택받은 자라는 내 속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주었다. 후진을 양성하며 성서 번역에 매진하는 성직자로서의 활동에 전념하던 그가 인생의 중년기를 지난 후 사회 문제에 직진 투신하는 모습은 마치 고요한 삶 속에서 내공 수련을 마치고 강호에 내려와 그 어떤  시련에도 꿋꿋이 대적하며 만면의 여유를 감추지 않는 고수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면 너무나 불온하고 가벼운 비교가 될까. 
 

물론 작가 김형수의 대상에 대한 극진한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경도가 행간 곳곳에 묻어나고 때로는 심하다 싶으리만치 먼저 감동한 흔적이 없지 않지만, 나로서는 소소한 에피소드 하나마저도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재야 활동과 방북, 수도 없는 구속과 투옥을 불러 온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굳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역사 위에 그가 남긴 발자국이 피워낸 아름다운 인간의 향기를 우리 시대의 어둠과 그늘이 너무나 멀리 날려버리고만 왔다는 아쉬움, 사후 10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느끼는 후예로서의 안타까움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자꾸만 작아져가는 나의 조국에 혹은 그런 조국 덕분에 가끔씩 마음이 위축되는 나에게,  미래를 긍정하고 역사의 전진에 믿음을 더해줄 수 있는 또 한 사람의 감사한 발견. 체 게바라니 마르코스니 하는 동시대를 함께 한 파란 눈의 그들을 향한 관심 못지 않게, 문익환 목사님이 젊은이들 사이에 자랑스러운 '우리의 사람'으로 회자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더불어 결코 아름답지 않은 시대와 시절을 통과하는 중에도 진정 치열한 삶을 통해 주위를 온통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우리 모두의 내부에 분명히 있다는 확신이 아주 천천히 역사의 진보를 이뤄낼 수 있기를.


2004-05-27 02:10, 알라딘

 


문익환평전(역사인물찾기15)
카테고리 시/에세이 > 시/에세이문고 > 시/에세이문고 일반
지은이 김형수 (실천문학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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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