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고, '벼랑에서 살다'라는 인상적인 제목에 잠시 멈칫한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사진의 '김홍희'라는 이름 석자와 출판사 마음산책. 너무나 많은 작가와 꼭 그만큼의 남다른 감성과 특별한 자의식들이 있다. 많이(?) 이름나지 않은 조용한 작가들의 수필류 읽기를 즐겨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굳이 이런 글들을 묶어 책으로 낼 까닭이 있었을까 하는 심드렁한 독서도 있었던 지라 초면의 마주침에서는 그냥 지나쳤던 것 같다.
지난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던 일요일. 오랜만에 주어진 며칠 간의 휴가를 여유롭게 보냈지만 숨가쁘게 돌아가는 생활로의 복귀가 못내 부담스러웠던 나는, 오전 내내 하루 종일 집안에 쳐박혀있을 것인가 연휴 동안 그냥 흘려보낸 시간을 간만의 서울행으로 만회해 볼 것인가 고민하느라 마음이 분주했다. 별 것도 아닌 결정에 꽤 골머리를 앓다가 외출을 결심하고 나선 길은 인사동과 대학로를 향하고 있었고 그 때 책장 앞을 서성이다 골라든 책이 바로 '벼랑에서 살다'였다.
안국역까지 가는 한 시간여 동안, 오랜만에 여유롭게 책을 읽는 스스로를 분열된 자아인 양 의식적으로 느끼면서도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 행간으로 빠져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책날개의 소개뿐. 하지만 독신의 여류작가라는 사실로부터 먼저 상상하게 된 어떤 높은 자의식과 완고한 고독보다도 더 그녀 주위를 두텁게 감싸고 있는 것은, 그녀가 살고 있는 공간을 에워싸는 따스한 시선과 소박한 사람들과의 느슨하나마 여유로운 관계들이었다.
다소 시적이고 상징적인 제목에 비해, 책 속의 내용은 무척이나 사실적이고 상냥한 기록으로 채워져있다. 작가는 화려하지 않은 동네의 한 구석 집을 차지하고 사는 소박한 이웃의 삶에서부터 조근조근하게 책장을 채워나간다. 물론 평범치 않은 글쓰는 직업에 아직까지는 평범치 않은 혼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감성과 정신은 분명 남다른 무언가가 있겠지만, 내 보기에 그것은 특출난 정체성마저도 부드럽게 감싸는 작가의 깊고 너른 사람과 세상을 향한 애정이 아닌가 싶다.
벼랑. 자칫 위태롭다고만 느낄 수 있는 그 곳은, 어쩌면 한없이 내려앉기로 혹은 한없이 비워내기로 한 어떤 자의 가장 편안하고 안온한 공간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안달복달하는 삶에서는 순간순간이 늘 벼랑이지만, 이미 저만치 물러앉아 있는 사람에게 벼랑이란 그다지 큰 의미가 아닐런지도. 약함과 두려움을 감추지 않지만 담담하고 평온하게 혼자인 그녀의 일상과 감상을 들여다보며, 그 여유와 다사로움을 배우고 싶어졌다.
2004-01-24 00:19,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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