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이 변했느니 아니니, 조용히 말이 많다. 혹시 그가 변하고 싶었다면 변했다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편이니까. 짧기는 했지만 조금 여유가 있었던 추석연휴, 오랜만에 엄마아빠집에 갔다가 열다섯부터 스물아홉까지 십오년 동안 살았던 내 방, 늘 혼란하고 늘 소란한 영혼의 안식처였던 그 곳에서 선물처럼 내게 온 그의 새 책을 읽었다. 십수 권의 책을 내면서도 짐짓 외면하는 듯 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들어있다고 했으나, 내게는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았다.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를 낚던 그가 이제는 바다로 나아가 호랑이를 낚겠다고 하는 것도 별로 새롭지 않았다. 그의 소설을 이야기할 때 너무나 당연히 따라붙는 존재의 비의니 시원을 향한 여정이니 하는 말들, 이제는 하나의 관용구처럼 되어버렸지만 숨이 붙어있는 한 존재를 앓을 수 밖에 없는 누군가를 위해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여전히 새로운 변주다. 모두다 같은 영혼이 없듯이, 모두다 같은 길을 거슬러가더라도 결코 같은 길은 아니다. 그래서 난 그의 책을 기다리고, 읽으며 위로를 받는다. 나이듦이 결코 일률의 속화가 아님을, 언제나 비슷한 이야기로 지겨우리만치 비루하게 자아를 좇는 그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그 처치곤란의 삶들에 감사한다. 시간이 흐르고 삶이 반복되어도, 결국 타고난 것들은 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소설의 기저에는 자전적인 요소가 깔려있다고 믿는 내게, 윤대녕의 남자주인공들은 모두 작가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소설에는 늘 스테레오 타입화된 주인공이 등장한다. 성마르고 건조한 사내와 예민하고 불안한 여인,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글을 쓰는 영빈과 그림을 그리는 해연, 그리고 그들의 곁을 맴도는 히데코. 회사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하다가 첫 책을 묶어내고 권고사직을 당한 영빈,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다 마침내 전업작가의 길을 결심하고, 제주도로 내려간 그는 심지어 전업낚시꾼처럼 되어버린다. 삶의 고비인가 싶을 때마다 환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호랑이를 잡겠다는 결심조차 생뚱맞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현실적인 그의 주인공. 불화할 수 밖에 없는 시대를 관통한 젊은 날의 그는 가족들과도 조화롭지 않았고, 가족과 시대를 뒤로 하고 떠난 그 곳에서 인류 최초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바닥을 맞추며 자신의 근원을 만나는 듯한 경이로움을 접한다. 수족관과 물고기 그림으로부터 일상의 구원을 얻는 해연, 유복한 가정의 외동딸로 행복하게 자라던 그녀는 아무 일 없는 일상에 지쳐버린 엄마의 배신과 아빠의 무기력으로 인해 커다란 삶의 균열을 맞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바다를 떠돌며 물고기를 낚던 아버지를 결국 바다에 내어주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생활의 바다에 내던져진다. 자기 나라를 떠나 한국에 체류하는 히데코, 그녀 역시 일찌감치부터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떨치던 동급생 사기사와 메구무를 향한 야릇한 동경과 동일시 그리고 일종의 질시 속에서 한 편 소녀적의 연정이 남긴 불가해한 낙인과 이별로 인해 생의 바닥과 같은 공포와 혼란 속에서 방황을 거듭한다. 내 존재의 뿌리가 어디인가를 의식적으로 생각지 않아도, 존재의 중력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듯 부유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실은 우리 삶의 본질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그러한 의문에 대한 당위적인 추구가 있다. 읽다보면 나는 자주 안심이 된다.
영빈과 해연, 히데코와 메구무. 어쩌면 억지스런 우연이 만들어낸 그들의 인연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반드시 만나야 할 같은 피를 지닌 사람들은 우연이건 필연이건 결국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고 알아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곳이 붕괴된 성수대교의 한 귀퉁이건, 집 근처의 지하까페이건, 인파로 북적이는 신촌기차역 주변이건, 사실 그건 관계가 없다. 비현실의 현실을 살아가는 그들 중 두 사람은 어쩌면 행복한 미래를 예감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결국 생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떠나고 만다. 삶은 결국 살아남은 자의 몫이듯, 고독과 혼란 또한 온전히 살아남은 자가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아빠가 된 작가의 주인공은, 이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지 심지어 불안해하는 여인을 달래며 일상을 버티는 일에 대해 독려한다. 마침내 호랑이를 잡으면, 세상과 화해하고 타인과 조화로울 수 있는 것일까. 다 큰 어른의 성장기를 보는 듯, 아주 조금은 물러진 작가의 촉수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세파에 찌든 항복이거나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물러섬이라기보다 그토록 찾아헤매던 불가해한 삶의 비밀이 혹은 존재의 비의가, 결국은 새로운 삶의 잉태와 성장을 지켜보면서 나이듦 역시 하나의 성장임을 긍정하는 순리와 같은 화해 속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작가가 스스로 밝히는 청년으로 살았던 80년대와 90년대로의 회귀와 거기서부터 내딛는 발걸음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이 존재를 탐색하는 작가를 굳이 광장으로 거대담론으로 불러내는 억지 의미부여는 아니었으면 하고 바란다. 나에게는 여전히 걸개그림이 주는 격정과 벅찬 감동 만큼이나 손바닥만한 엽서가 주는 미세한 떨림과 공감이 절실히 필요하니까.
2005-09-21 02:18, 알라딘
|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번이면 족할 듯. (0) | 2011.05.15 |
---|---|
일상에 착 달라붙어있는 군사주의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 (0) | 2011.05.15 |
부담없는 만남, 마르크스의 재림 (0) | 2011.05.15 |
from 'to cats' (0) | 2011.05.15 |
조금은 피곤한 여행. (0) | 2011.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