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1:30


진솔하고 부담없는 산문집 읽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철저히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 고심한 결과라도, 나의 선택이 100%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삶이 책에서 멀어질수록, 내게 낯선 작가들은 많아지고 그만큼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아지며 선택의 폭은 좁아지는 까닭이다.
 

황인숙 시인의 글을 처음 만났다. 그녀의 시 한 편 접한 일 없는 나의 선택에 일단 힘을 실어준 것은 책 말미에 실린 고종석의 발문이었다. 상대를 귀하게 여기며 다감하게 쓰여진 그 글은, 일면식도 없는 작가를 향한 시샘마저 불러일으키는 예쁜 글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이 내 모교가 있는 동네 해방촌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벼랑에서 살다'의 좋은 독후감이 이유였다. 
 

많은 사람들이 한 고비라 여기며 나잇병을 앓는다는 서른살이 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두 살을 더하자니 어감도 이상하고 뭔가 속에서 삐걱거린다. 너무 무감한 것이 오히려 이상해 바하만의 '삼십세'를 읽으며 억지로 의미를 부여했던 나의 서른은 아무래도 너무 심심했나보다. 나이를 먹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조금씩 관심이 가는 것이 혼자 사는 여인들의 일상이기도 하다. 물론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그들과 나는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마음 속 깊은 곳에 담은 꿈마저 외면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주 자질구레한 이야기들까지 담아낸 그녀의 만필에는, 내가 궁금해하는 글쓰는 사람의 일상 혼자사는 여인의 일상 사십대의 일상이 고루 들어있다.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쓸 필요가? 할 정도로 솔직하고 꾸밈없이, 그녀가 거치는 일상의 일들이 마치 일기처럼 보여진다. 타고나길 한자에 문외한인 자신의 이야기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범한 실수담, 모르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그녀에게서는 느껴지는 것은 사십대 소녀의 아기자기함과 여린 마음이다. 발문에서 보인 작가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조금은 알 듯도 하다.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작가가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풀 한 포기 베어지는 아픔도 함께 느낄 줄 아는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만이 작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은 수정되었지만. 하지만 황인숙의 글을 읽다보면 어지러운 세상살이 비껴서지 않으면서도 사심없이 본래의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천상 소녀의 여리고 깨끗한 마음이 느껴진다. 착한 사람이 더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어린 시절의 믿음을 그녀의 만담 속에서 다시 만났다.


2005-01-13 04:54, 알라딘



인숙만필
카테고리 시/에세이 > 에세이
지은이 인숙 (마음산책,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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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