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참 좋아서 바로 이어 읽었다. 전작에서 스페인의 마요르카로 떠나 어린 시절을 회고했던 저자는 어느 해 1월 콜롬비아의 카리브 해안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가의 옆 자리에 앉아 혼자 책을 읽던 어린 여자와 합석 제안을 한 40대 후반의 남자, 스쿠버 다이빙 중 폭풍을 맞닥뜨린 경험과 이런저런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여자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원래 말이 많은 편인가 봐요?" 반문하는 남자와의 대화는 금세 어긋나고, 남자의 한산한 해변에서의 밤 수영 제안은 거절당한다. 잠시간의 유쾌하지 않은 만남에서 여자는 남자의 별명으로 떠오른, 다이빙하러 갔을 때 탔던 보트의 이름을 거론하는데 첫 글의 제목이기도 한 "빅 실버"다. 저자는 둘의 대화를 전하며 빅 실버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거리낌도 품지 않은 사람"(12쪽)"이라고 표현하는데, 짧은 글 속에 여러 가지 의미가 중층적으로 엮여 있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에피소드였지만 내가 오래 알았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시작부터 몰입도 100%의 공감을 느껴버렸다. 그래, 그 역시 빅 실버였다.
이어지는 글 "폭풍"에서는 난파한 결혼 생활과 보트로 헤엄쳐 돌아가지 않은 다행스러움에 대해, 다음 글 "그물"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떠난 아홉 살 시절처럼 좀은 막막하게 새로운 삶 앞에 선 쉰 살 시절에 대해 말한다. 남편과 이혼하고 두 딸과 함께 살게 된 저자의 첫 번째 집은 런던 북부의 재정비 추진 중인 낡은 아파트 7층 집이었다. 손 볼 것이 많은 오래고 허술한 집에서 저자는 물리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불안정하지만 새삼스러운 자각과 전환과 활기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80대 초반의 배우이자 서점 주인 실리아의 호의로 고인이 된 시인 남편의 헛간을 서재로 쓸 수 있게 된다. 실리아의 헛간은 고요함과 차분함, 적당한 불편이 공존하는 공간이었고 이 책을 비롯한 세 권의 책이 그곳에서 완성된다. 전기 자전거를 마련해 7층 아파트와 헛간을 오가며 글쓰는 일상이 평화로운 듯 흘러가지만 수호천사라 찬사를 보냈던 실리아가 친구에게 자신을 흉보는 말을 엿듣게 되기도 하고, 자전거를 주차할 때마다 나타나 시비를 거는 이웃 진에게 지속적인 불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어느 파티에서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60대 후반의 빅 실버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 어떤 일상에도 소소한 다사다난함이 함께할 수밖에 없고, 그 모든 것들이 사유와 기록의 단초이자 작고도 큰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치명적인 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며 저자는 처음부터 어머니는 아니었던, 엄청난 용기로 삶을 개척한 한 여자의 일생을 회고한다. "그리도 사랑하던 상류층의 앵글로 색슨계 백인 프로테스탄트 가족으로부터 도망쳐 무일푼의 유대인 역사학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전개 중이던 인권 운동에 가담했다. 똑똑하고 글래머러스하며 재치가 넘치던 20대 초반의 어머니는 끝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주위의 어느 누구도 어머니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 어머니는 타자술과 속기술을 배웠고 남자 상사들 마음에 들 만하게 웃차림하는 법을 배웠다. ... 아버지가 정치범이 된 동안 어머니가 우리를 먹이고 뒷바라지할 수 있었던 건 빠른 타자술 덕이었다."(108쪽) 마지막 몇 주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어머니가 유일하게 핥아 넘길 수 있는 특정 상표의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터키계 형제의 잡화점에 자주 드나들고, 임종 후에야 그 사실을 전하자 후에 터키 커피를 사며 유리잔에 마신다는 말을 기억하고 은 세공한 터키 커피잔을 선물한 형제의 이야기는 뭉클하고 짧은 소설 같아서 머릿속에 장면들이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침대 옆에서 간병하며 어둠 속에 책을 읽는 딸을 위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위엄을 얹어 조명을 요구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낭독회에서 불쑥 마주하는 예상치 못했던 충격, "엄마와 내 머리가 맞닿으면 그건 고통이었고 또한 사랑이었다."(115쪽)고 기록하는 저자는 도움을 줬던 친구들을 보러 떠난 1992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자신이 있는 위치에 X자를 표시해 보낸 엽서를 통해서도 어머니의 흔적을 만난다. 그리고 어머니가 엽서에 적었던 "내가 지금 있는 곳 X"는 그대로 다음 글의 제목이 되어 새로운 만남들을 선사한다. 빅 실버를 만난 파티에는 '장례식에서 울었던 남자'도 있었고 그는 저자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주간, 지리적인 방향 감각을 모두 잃었다."(120쪽)고 느끼는 시기에 오래 함께한 연인을 보낸 후 자신도 느꼈던 방향 감각의 상실감을 공감하며 일주일간 휴가를 내 기사 노릇을 자처한다. 장례식에서 울었던 남자와 그의 새 연인 제프, 그의 지인 클라라와 함께하며 저자에게는 새롭게 친밀한 관계들이 생겨난다. 저명한 교수이기도 한 클라라가 드라이브 중 막히는 차 안에서 고뇌에 찬 표정으로 무언가 메모하는 쪽지를 저자가 훔쳐보는데 거기에 적힌 내용은 "토마토 아보카도 레몬 라임",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공통의 화젯거리가 꽤 많은 클라라와 저자는 함께 수영장에 가고 집에서 요리를 하기도 하면서 제법 괜찮은 친구 사이가 된다.
실은 이런 식의 어설픈 요약과 기록이 무의미한, 그냥 쭉 읽으며 느끼고 시간이 지나 기억이 가물해지면 다시 한 번 읽으며 느끼는 게 가장 좋을 법한 책이었다. 무언가를 읽고 명료하게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학창 시절의 독서와 훈련이, 대체로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세계를 반영하는 남성 작가들이 쓴 큰 사건이나 현상 위주의 서사에 기반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었다는 걸 이런 책을 읽으면 새삼 느낀다.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자신에의 천착을 누락한 채 거대한 세계와의 연결을 강요당한 측면이 존재했던 것 같고, 그런 관성에 따르면 너무나 소소하고 하찮은 이야기들이어서 무엇을 중요하게 느끼고 받아들여야 할지 애매해지는 혼란이 어쩌면 이런 책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소중한 부분인 것도 같다. 살면서 겪는 갖가지 일들과 마주치는 사람들로부터 발산되고 흡수하는 감정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흘러가거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그 자체를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로 반짝이거나 하는 건 순전히 경험하고 느끼는 당사자의 몫이라는 걸 절감하게 되는 이야기들. 한없이 확장하는 여러 겹의 이야기들이 가득한 이 책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은 삶의 비용으로 만든 글이며 디지털 잉크로 만들어졌다."(161쪽) 3부작 중 세 번째 책은 여전히 아직인 것 같은데, 출간 소식을 머지 않아 만날 수 있음 좋겠다.
데버라 리비•이예원
2021.3.25.1판1쇄펴냄, 플레이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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