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에서 살다' 는 조은이라는 부드러운 이름을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본업(?)이 시인이라는 그녀의 시편들을 나는 아직껏 만나보지 못했지만,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조용히 풀어내는 산문은 내게 충분히 풍부하고 충분히 시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비슷한 느낌의 영화 'before sunset', 마치 9년이나 조용히 기다려왔던 듯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은 영화의 ost cd와 함께 내게 건네졌다. 침대 맡의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귀로는 줄리델피의 음성을, 눈으로는 조은의 문장을 음미하며 나는 오랜만에 참으로 순정한 영혼의 포만감을 느꼈다.
책 속의 그녀는 스스로를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평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온갖 납득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돋보이려 기를 쓰는 사람들로 가득찬 시끄러운 세상에서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귀한 존재감으로 빛을 발한다. 걱정스러울만큼 어둡고 불온해 보일만큼 냉소적이며 불안해 보일만큼 건강하지 못했던 그녀, 순수한 동심의 빛깔로 기억되지 못하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건조하게 회고하는 행간에서는 스스로를 쉬이 꺾을 수 없었던 강인한 영혼의 부드러움과 여유가 진하게 느껴진다. 주눅들지 않은 조용함과 소란하지 않은 열정이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님을, 가난한 집의 엉뚱한 고집장이 아이였던 그녀의 어린 날들과 극심한 정신적 성장통의 기록에서 어렵잖게 읽을 수 있다.
무엇이건 너무나 화려해진 세상이다. 텅빈 현재에도 불구, 너도나도 미래를 향해 내달려야 하는 세상인 것 같다. 과거에의 집착만큼이나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없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허한 현실에 대해 성찰할 작은 여유도 없이 우리는 모두들 참 바쁘고 각박하게 내몰리며 살아가고 있다. 조용한 열정을 품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급하게 휘몰아치는 세상의 물결 뒤로 침잠해버리고, 어지간한 자존감이 아니고서는 때때로 찾아드는 이유없는 허탈감이 너무 버겁다. 영혼과 정신이라는 말은 비현실적으로, 우울과 성찰이라는 말 역시 비생산적으로 치부되며, 정신없이 달리면 결국엔 모두가 결승점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환상만이 가득찬 세상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오늘이다.
소리 높임 없이, 자신을 내세움 없이, 크게 잘난 것도 없이, 적당히 맞춰주고 적당히 섞여들며 한 골목을 지키고 있는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작은 위안이었다. 주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나 자신을 돌아보게도 해주었고, 비타협적이되 조용할 줄 아는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우리 모두를 둘러치고 있는 가족과 이웃이라는 때로는 부담스런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도 그녀의 정신은 자유롭게 물결치며 세상을 유영하고 있다. 시인의 마음을 잃지 않고 작가의 눈을 감지 않으며, 그녀는 나와 같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은 이야기들을 우울하되 따스하게 전해준다. 나이를 잘 먹어간다는 게 그런 것 아닐까.
2005-02-07 01:33,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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