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노촌 이구영 선생의 팔십 년 이야기'. 이 책의 부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더구나 격랑의 역사를 정면으로 맞선 인생을 책 한 권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테지만, 그나마도 없었다면 이 귀한 인물을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사할 따름이다.
노촌 이구영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신영복 선생님의 수업 시간이었다. '인물 현대사'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며 신영복 선생님은 책 속에서도 언급되는 몇몇 에피소드를 말씀해주셨다. 교육사회학 특강이라는 제목으로, 후반부 반절은 중국 고전을 재해석하는 수업이었는데 한 감방에서 4년을 보낸 인연으로부터 노촌 선생님이 걸어온 인생길에 대한 간략히 전해주시며 이 책을 권해주셨다.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라는 단정적인 제목부터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진실의 실마리를 담고 있는 듯 하다. 난마처럼 얽힌 세계사의 격동을 고스란히 겪어낸 노촌 선생님의 일생은 세계화니 지구화니 하는 표어 속에서 점차 우리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요즘에 생각하기에는, 어이없을 만치 민족에 대한 순정한 믿음과 의리를 지켜내기 위해 극한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헌신의 결정체다.
당대 문장가의 후손으로, 구한말 의병으로 떨쳐 일어섰던 선친의 아들로, 그러나 근대의 구태를 벗지는 못했던 선대보다 더욱 진일보한 정신의 무장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실 속으로 뛰어든 노촌 선생님의 일대기에는 거창한 무용담도 화려한 영웅의 면모도 없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역사와 민족에 바쳤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늘 음지며 고난이었고, 그 중에서도 눈에 띄지 않고 돋보일 것 없는 변두리 세포에 불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뒤로 한 일신의 영달이나 기득권에 대한 미련, 심지어 기억조차 없는 것 같다.
세상의 기운이 지금처럼 속스럽지 않았을 시절이라고는 해도, 그렇듯 무연하게 자기자신을 가야할 어떤 곳을 향한 하나의 도구로 갈음하고 묵묵히 한평생을 정진할 수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아연하게만 느껴진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제법 큼지막한 것들까지 온통 나를 둘러싼, 내가 내보이는 욕망만을 따라 살고 있는 나로서는 내가 태어난 이 가벼운 세상을 탓하는 것으로도, 이 도저한 인물의 발걸음이 너무나 커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는 반성을 불러온다.
작지만 큰 그의 인생에서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이 자리한 이 땅이 그저 남과 북으로 길게 뻗어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불과 수십년이 지난 뒤에 돌아봐도, 명백히 가야할 길이었던 한 길을 놓쳐버린 우리의 역사가 노촌 선생님과 같은 인물을 얼마나 많이 시간의 그늘 뒤로 묻어왔을까. 굳건히 세워진 반상의 차별 위에 당쟁과 정쟁을 일삼으며 기득권을 팔아 나라를 말아먹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고고히 학문의 길에 정진하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역사 속으로 뛰어든 자들이 있다. 모든 역사가 가지고 있을 이러한 양면에 유독 전자가 빛 발하고 더러운 상속으로 배를 채운 그들의 후손이 더 많은 것을 가지려 발버둥치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불행인지도 모르지만, 그나마 세인의 시선 뒷전에 이런 자랑스런 일가가 있고 인물이 더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며 확인하고 안도하곤 한다.
2005-02-11 16:25,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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