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그를 만난 적이 있다. '페이퍼'에는 현저히 못미쳤지만 나름 공고한 애독자층을 형성했던 얇은 잡지 '베스트셀러'가 가판대에 놓여있던 시절, 교대역 근처 어느 사무실에서였다. 주로는 변호사니 법무사 사무실과 각종 은행지점이 즐비한 삭막한 교대법원검찰청역 주변에 이런 사무실이? 다소간 의아스런 마음으로 쭈삣거리며, 잡지일을 하던 친한 언니를 따라 들어간 곳에 그가 있었다. 그는 '베스트셀러'의 편집장이기도 했었지만, 그보다 더 내가 호감을 가졌던 건 그가 당시 꽤 적극적으로 진행된 전인권씨 구명운동의 중심에 있던 하이텔 들국화방의 시삽인가 뭐라던 언니의 말 때문이었다. 2000년쯤이 아니었나 싶다.
정말이지 어눌하고 답답한 말투와 수줍어하는 자태 외에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데, 이후에 박민규가 소설 쓴다고 편집장을 때려쳤다라거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무지하게 재밌으니 꼭 읽어보라는 식의 전언을 그 언니로부터 전해들었다. 그야말로 '일'면식이 있을 따름이니 내가 그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소설은 좀은 황당무계한 설정과 과감한 도약 내지 비약을 한껏 선보이는 진행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를 읽는 느낌이다. 몇 권의 책을 읽은 이후에야 몇 년 전 그를 마주했던 기억의 윤곽이 떠오를 정도로, 그다지도 대면의 임팩트나 존재감이 없는 존재. 그러나 그 존재감 없음 뒤에 숨어 분방하게 세계를 조물거리며 마음껏 난장을 부리고 비수를 날리는 일견 통쾌함이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그는 '못'과 '모아이'를 내세워 세계전복의 망상을 부석거리는 종이꿈으로나마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지기도 한다.
박민규에 대한 과대평가이거나 스스로의 단단한 오해이거나 혹은 그도 아니거나이겠지만, '핑퐁'을 문자 그대로 탁구소설 혹은 '못과 모아이'를 위한 슬프지만 진실 왕따성장소설 쯤으로 읽을 수는 없었다. 이 역시 박민규에 대한 과잉기대이거나 스스로의 자위적 독서이거나 뭐 둘 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작가만큼 자유분방하게 세계에 대한 무경계의 알레고리를 구사하는 것은 분명 보통 재주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좀 뜬금없이 무거운 인간이기도 하지만, 한편 세상에 엄숙하게 슬퍼하거나 애도할 일은 이제 정말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혹은 절망. 그의 소설은 그런 류의 애잔한 유쾌함 같은 걸 선사해준다. 이를테면 세계는 주로... 양쪽에서는 핑-퐁 거리고, 제물이 된 놈은 핵핵거린다. 핵핵거리기라도 할 수 있는 것은, 그 핵핵댐의 윤리와 별개로 그나마 아직 살아있는 개김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연민 어린 대견함 같은 것. 북핵 뉴스와 핑퐁의 알레고리를 혼자서 연관 지으며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즐길 수도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너무 말이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어쨌거나 박민규는 이렇게 막 나가는 리뷰도 뻔뻔하게 쓰게 만들어주는, 최소한 발랄한(?) 영감의 원천이다.
소설 어딘가에서 마주치는 못의 고민, 왜 하필 우리일까, 혹은 나일까.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기보다 더 눈에 띄지 않는 누군가들이 수십 명이나 있단 말이다. 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조차 나는 찌질이같은 자화상을 발견하고 작가의 자기동일시가 아닐까 혼자서 반가웠다. 돈이나 힘 있는 것들이 들으면 참 기가 막힐, 쥐 같고 새 같고 차마 못 같고 모아이 같은 것들이 세계의 존속을 건 탁구를 친다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그의 엉뚱한 상상력에서조차 불온하고 짜릿한 전복에의 고양감을 느끼며 결과를 예의주시했다. 어차피 맛이 간 인간들로 득시글한 세상에, 이왕이면 더욱 기괴하고 근본 없는 거짓말로 썰을 풀어주는 통쾌함 같은 것. 물론 한낱 웃기지도 않는 소설 따위로 뭐가 변하랴마는, 나는 언인스톨을 선택하는 그 순간이 즐거웠고 며칠 뒤 터진(?) 북핵사태 뉴스를 접하며 야릇한 기대마저도 가졌었다. 더 이상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그럴 수는 없다는 땅 속 깊은 곳에서 묻혀버린 단말마라 하더라도 이런 우스꽝스럽고 절멸적인 선택이라도 해야하는 때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아슬아슬 태평하게 말이다.
그러나 벌써 네번째 책을 묶어낸 베스트셀러 작가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그에게 혹시 '삼미...'가 대표작으로 굳어지지 않을까 하는 애정어린 우려 역시 없지 않다. 변주도 쉼 없이 도돌이를 치다보면 언젠가는 반복의 묘미나 미세한 변화의 신선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은 뻔하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박민규가 골몰하는 세계와 그려내는 인간들이 마음에 든다. 좀 잔인한 기대일런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불혹을 바라볼 그가 어느 학교 문창과 교수로 들어앉았다거나 '무규칙 이종예술' 행각의 연장선에서 어느 공중파의 나긋한(설마) 진행자로 방송인을 겸한다거나 하는 식의 얄궂은(?) 소식만 들려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가 무엇이건 써내는 한 애독자를 자청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그가 소신껏 날린 꽁트로 초딩들의 뭇매를 맞고 이익집단의 비수에 꽂히고 웃기지도 않는 고개숙인 사과를 날린다거나 하는 구설에 오를지라도. 어차피 세상도 디게 웃기다는 걸 생각하면 또 조까라마이싱을 어눌하게 날리는 작가 역시 그 웃김을 팔짱 끼고 지켜볼 수만은 없는 게 이 세상이란 걸 생각하면 악수라도 청하고 싶을 만큼의 뜬금없는 형제애가 솟구치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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