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나는 '오빠 생각'이라는 노래 앞에서 진지한 의구심과 거부감에 몸을 떨곤 했었다. '오빠 생각'이라니. 철없던 시절 눈만 마주치면 싸우기 바쁜 혈육 이전에 적이나 마찬가지였던 하나의 오빠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떠올릴 오빠가 없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정말이지,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던 '그 오빠 생각'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표제작의 제목이라는 점 외에는 크게 의미 둘 바 아니지만, '오빠가 돌아왔다'라는 강렬한 제목 앞에 늘 떠오르는 생각 조각이다. 그런 오빠를 가진 나였음에도,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에는 진정 서울 가신 오빠가 뒤춤에 비단구두라도 감추고 돌아온 양 반갑고 황송한(?) 마음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읽은 지 한참 됐지만, 실은 마이리뷰를 썼다가 서버 불안정으로 모두 날려버리기도 했었지만, 심한 집착형 인간임에도 불구 무엇 하나 쌓이는 것이 없는 나날이 너무 오래 되어 삶이 허망하던 차. 새해와 함께 벌이는 나홀로 캠페인 '마이리뷰를 쓰자'도 실천할 겸 다시 골라잡았다.
이 책은 탄핵 정국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봄, 안양에서 광화문을 왕복하는 전철 안에서 첫 장을 넘겼었다. 거의 열달의 시차가 있지만 불과 며칠 전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만큼 비슷비슷하고 그러그러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물론 '김영하표'에 대한 기본 기대는 가지고 있었지만) 별 생각 없이 펼쳐들었던 돌아온 오빠는 내게 심한 유쾌함과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역시 그는 얄미울 만큼 탁월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었던 것이다.
여덟 편의 작품은 각각 상이한 소재로 상이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가볍고 간명한 문체 속에 겹겹의 의미들을 포진시켜 놓고 읽는 이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의 재주는 전 작품에 걸쳐 기복없이 발휘되고 있어 좀처럼 녹슬지 않는 그의 필력에 감탄하게 만든다. 그의 글 속에 배어있는 특유의 어떤 쿨함은 여전하지만, 흐르는 시간을 흡수하며 함께 나이 먹은 그의 주인공들은 이제 타고난 치기와 냉소만을 트레이드 마크 삼지 않는다. 또 가장 그답지 않은 테마라고 생각했던 가족과 사랑 따위(?)가 때로는, 개별 존재를 압도하는 하나의 가치로 보여지기도 한다. 물론 끊을 수 없는 혈친애를 뛰어넘는 엽기성으로 가득한 해체 가족의 우스꽝스러움을 내보이고, 사랑과 연애에 수반되는 비밀스런 모멸의 기억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으로 헛헛한 웃음을 자아내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우연히 비디오로 '주홍글씨'를 보게 되었다. 많이 보도가 되었었다는데, 사전정보가 전혀 없었던 나는 영화를 보며 내내 어찌 이리도 소설과 같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책을 다시 뒤적이다 보니 드는 생각이, 그의 소설은 모두 다르지만 모두 너무나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딱히 어느 작품의 누구랄 것은 없지만 그가 주인공들에 불어넣은 숨결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기운들이 각기 '김영하'라는 택을 달고 숨쉬며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느낌. 훗날 언젠가는 살아남은 주인공들이 모두 만나 돌아오는 장면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김영하의 발랄한 단편에서, 한 고비 넘어 귀환하는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2005-01-13 04:05,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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