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발견'한 '경성 트로이카'의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이관술을 주인공으로 한 안재성 작가의 새 책이 나왔다.(실은 좀 됐다, 지난 8월의 일이다.) '경성 트로이카'의 여성 주역들이었던 동덕여고생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등의 교사이자 이순금의 이복오빠였던, 대다수 조직원들의 검거로 와해되다시피 한 '경성트로이카'의 후신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 준비그룹(경성재건그룹)' 활동을 위해 이재유와 단둘이 와신상담 목숨 건 길을 떠났던, 이재유가 검거된 뒤에도 '경성준비그룹'의 활동을 지속하며 '경성콤그룹'을 결성하고 일제하 최후의 저항조직으로 명맥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바로 그 이관술이다.
'경성 트로이카'에도 많은 혁명가들이 등장하지만 워낙 이재유의 존재감이 눈부셨던 까닭에, 사실 해방 이후까지 활발히 활동했던 이관술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감이 있었다. 물론 이름 없이 사라져간 많은 혁명가들이 그렇겠지만, 그 역시 이재유의 카리스마에 가려져 그저 조역 정도로 머무르기에는 아까운 빛나는 삶을 살았다. 남 부러울 것 없는 경제력과 명예를 두루 갖춘 집안의 장남이었던 이관술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택해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다. 사상과 이념보다는 조국의 독립이라는 현실적인 과제를 우선시했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 가까웠던 그는 동덕여고에 부임해 교사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의 의거와 그에 대응하는 학교측의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고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와 한계를 절감하고 공산주의를 선택한다.
만석꾼 집안의 수재로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이관술의 삶은,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단 한 번의 좌회전(?)을 거쳐 죽는 날까지 흔들림없이 직진한다. '경성 트로이카'에서 이재유와 콤비를 이루며 마치 암행어사와 보좌역처럼 그려졌던 이관술은 그러나, 이재유의 검거 이후에도 고군분투하며 옛 동지들을 규합해 결국 '경성콤그룹'의 재건을 이루고 해방 이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에서 새 조국 건설에 열정을 바쳤다. 저자의 기록에 따르면, 해방 후 우익 성향 단체인 '선구회'의 여론조사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5순위에 꼽힐 만큼 대표적인 항일 운동가이자 민족의 지도자로 국민들의 신망을 받는 영향력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의 분단 고착 및 공산주의 씨말리기 공작에 힘 입어 그는 '정판사 위폐사건'에 연루, 투옥되고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총살형으로 삶을 마감하고 만다.
생전에 그가 남긴 회고록의 제목이자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라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는, 식민 조국이라는 거대한 감옥에서 태어나 지하 활동과 검거 고문 투옥이라는 쳇바퀴를 돌며 한 생을 살았던 그가 남긴 참으로 절절한 소회다. 해방된 조국에서 자신이 맞이할 운명을 그가 예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심과 정의의 길을 따라 비타협적으로 묵묵히 살아 온 이들에게 결국 현실은 배반 혹은 죽음이라는 양단의 선택을 강요할 뿐이었다. 스스로 배반하지 않으면 역사가 배반해버리는, 끝까지 가봐야 처참한 죽음과 연좌로 이어지는 불행 말고는 달리 별 볼 일 없다는 것. 어쩌면 현대사 고비마다에서 마주치는 안타까움보다, 우리가 더욱 눈여겨보고 민감해져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어진다. 저자는 책 서두에서, 이관술의 유족을 만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잠시 후, 영하의 모진 바람이 불어대는 부평역 광장에 때 아닌 울음바다가 행인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경환 할머니와 이관술의 두 외손녀 손옥희 씨와 박경희 씨, 또 이들을 태우고 온 손녀사위들까지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단지, 이관술을 그린 작가, 그의 생애의 일부분이나마 긍정적으로 복원한 작가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통곡을 터뜨린 것이었다. ... 이렇게까지 한이 깊은지 짐작 못했던 내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 한 맺힌 삶을 살아왔는가를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경성 트로이카'에 은혜(?) 받은 것에 비하면 이 책은 다소 맥 빠지고 지루한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전자가 망자들로부터 발신된 초역사적 영감 같은 것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이 책은 '쓰기 위해' 저자가 무척 애를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표제로 내세운 '1902-1950 이관술'은 단지 그의 생몰연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반쯤은 그 시대에 관한 글쓰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관술이 살았던 시대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이 다소 어수선하고 방만하게 서술되고 있어 한 인물을 내세운 책 치고는 산만하고 집약성이 떨어지는 게 아쉽다. 어쩌면 그 만큼 주인공에 대한 자료가 빈약했거나 혹은 그가 '영웅으로 선택'될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드러지는 존재감과 후대의 독자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의 활자로 살아숨쉬는 영웅의 재생산보다 더욱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불과 몇십 년 전의 '역사' 마저도 픽션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는 갈기갈기 찢긴 현대사 복원의 노력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비단 유족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함만이 아니라,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거라고 느껴질 만큼 너절하고 빈곤한... 뿌리를 잃은 오늘, 여기, 우리들의 삶과도 깊이 관계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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