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06. 1. 25. 01:00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이 짧은 동화의 마지막 문장이다. 어느 리뷰에선가 읽고 이 말이 뇌리에 진하게 남아 책을 찾아 읽었다. 100만 번을 살았다는 말. 한 번 사는 인생도 이리 고달픈데 어떻게 100만 번을? 생명 있고 감각이 있는 존재라면, 의식까지는 모르겠지만... 인생과 묘생이 굳이 다를 건 없을 거라고, 어쨌건 그 자체로 분명 삶에 따르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이 생이 끝나면 아무 것으로도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굳이 또 태어나야 한다면 자기 존재를 지각하지 못하는 무엇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편이다. 물론 세상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면 그조차도 불가능할런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100만 번을 태어나고 죽은 이 엄청난 고양이. 임금님의, 뱃사공의, 마술사의, 도둑의, 할머니의, 여자아이의... 그러니까 늘 누군가의 고양이로, 사랑받으며 한 생을 살고 한 생을 마감했으나 죽음이 아무렇지 않았던 고양이다. 하지만 이 도도한 고양이에게 삶이 의미롭지 못했던 것은 언제나 태어나고 죽기를 무려 100만 번이나 반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100만 번이나 태어나 살아가면서도 언제나 자기 자신밖에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갈구하지 않았으나 당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동안, 고양이는 세상 모든 것이 시시하고 시시했으며,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좋았을 뿐이었다.
 

100만 번이나 끊임없이 사랑받았으나 늘 누군가의 소유격 속에 존재했던 고양이가 온전히 자기만의 고양이로,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거듭난 것은, 멋진 얼룩무늬 도둑고양이로의 환생.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로 태어난, 하지만 100만 번이나 끔찍히 사랑받았던 기억으로 충만한 고양이는 이전에 없었던 혼란에 시무룩해진다. 자신에게 향하는 사랑이 너무나 끊임없고 당연하여 도무지 관심 없었던 고양이에게, 하얀 고양이의 시큰둥한 반응은 자못 충격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많이 서툴다. 무의식 중에도 늘 스스로를 향하던 마음의 시선이 누군가에게로 분산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혼돈투성이가 되어버리는 것, 이 도도한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너무 좋아하는 고양이는 하지만, 동화책 속의 고양이답게... 두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꼬리를 내리고 고백을 한다.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그리고 초스피드, 하얀 고양이는 귀여운 새끼 고양이를 많이많이 낳아버렸고, 고양이는 더 이상 100만 번이나 살고 죽었던 과거를 언급하지 않게 되었으며, 심지어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할 정도가 되어버린다. 급기야 할머니가 되어가는 하얀 고양이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해버리던 고양이는, 실로 울음을 그친 하얀 고양이 곁에서 밤낮을 오열하다가 조용히 움직임을 멈춰버린다. 그리고 명문장,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선거를 하고 나서라 그런지 어이없게도 책장을 덮으며 '한 순간을 살아도~'하는 노래가 생각나 버렸지만(정말 어이없다. 제목은 '아, 민주정부'다..;;), 이 도도한 고양이의 100만 한 번째 삶이 주는 교훈(?)이 요즘 내가 많이 생각하는 문제들과 딱 맞닿아있다고 생각했다. 인생도 동화책처럼, 만나야 할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나 아닌 누군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 다음에야 환생이 필요 없는 종지부에 이른다면 얼마나 선명하고 간결할 것인가. 물론 누군가를 만나 극진한 자기애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그런 스스로에게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를 혹은 세상을 진심으로 좋아할 필요는 분명 있는 것 같다,고 방금 동화책을 읽은 사람답게 생각해 본다. 지금의 나로 태어나기 전, 나는 몇 번이나 누군가의 그 무엇으로 살았던 걸까. 전생 같은 거 궁금해한 적 없는데, 문득 궁금해진다.




100만번산고양이
카테고리 유아 > 4~7세 > 그림책일반 > 세계명작그림책
지은이 사노 요코 (비룡소,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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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