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와서 3학기째를 보내며, 어찌하다보니(?) 나의 주관심은 '빈곤'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홀로 생계를 꾸려가며 나름의 미래를 감당해야하는 시점에서 그나마 부끄럽지 않게 입에 풀칠할 직업군으로 선택한 직종이 사회복지 혹은 NGO 종사자였다는 결론이 작용한 결과다. 현재의 나의 직업이 공부방 실무자라는 것도 물론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대학원에서의 전공수업 선택은 잠정적 필수과목이 아닌 다음에는 늘 빈곤 혹은 아동에 맞춰졌고, 기말 페이퍼 등의 과제 선택도 역시 그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은 사회복지운동론 개별 연구 덕분에 읽게 되었다. 주제를 공부방 운동으로 정하고 보니, 공부방 운동의 모태이며 뿌리가 된 도시빈민운동 혹은 주민운동에 대한 자료들이 필요했고, 공부방에서 일하며 나름대로 필요나 관심에 의해 찾아보고 혹은 교육에서 들었던 내용들은 선택적 기억에 의해 댕강댕강 흐름을 짤라먹은 상태로 내 안에 있었다. 게다가 여전히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교적 NL과 PD의 구분이 명확했던 시절에 학교를 다닌 나는 이른바 NL계열이었고, 폄훼까지는 아니더라도 학교 안의 PD동아리 아이들에 대해 무관심 내지는 냉정한 편가르기식의 시선을 나름대로 주입시켰던(?) 선배들 덕택에, 도시빈민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때도 같은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도대체 왜 잘 지내지 못하는지 의아스럽고 짜증이 났지만, 같은 조직 안에서도 조직성 없는 자유주의자로 이른바 독사들한테 혹독한 비판을 받곤 했던 터라... 게다가 나는 끝까지 운동판을 지킬 그릇도 못되는 인간이라고 일찌감치 주제 파악을 하고 있던 터라,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던 것 같다.
도시 빈민운동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다보면 단행본으로 된 유용한 자료는 '아침'이라는 이 출판사에서 나온 몇 권의 책이 자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절판이라 학교 도서관에서 구해서 보니, 이 책을 집필한 저자는 이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했다. 80년대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한 때 운동은, 과잉이다 싶으리만치 각광을 받은 한 영역으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도시빈민 혹은 철거민이라는 운동의 주체세력은 연구 대상으로도 운동의 결과 무언가 개선된 세상의 주인으로도 대접받지 못한 채 그저 사회의 주변부,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 조용히 양산되고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도시빈민에 대한 관심으로 몇 권의 시리즈 연구서를 펴낸 한 출판사 대표(물론 그의 정체성의 일부다)에 의해 그나마 관심을 가진 후배들에게 빛바랜 몇 권의 책이나마 소중한 자산으로 남겨졌을 따름인 것 같다.
농민의 자녀, 노동자의 친구일수도 있지만 농민도 노동자도 아닌 비공식집단에 속한 도시빈민들은 60년대 경제개발 계획과 7.80년대 도시개발 계획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가난하고 정많은 순박한 달동네 사람들'로 미화되거나 '무식하고 겁없는 징글징글한 철거민들'로 비하되거나 하는 양극단의 이미지로, 가끔 매스컴을 통해 왜곡된 시선으로 주목 받은 것 이외에는 늘 무화된 존재로서 살고 있는 집단이다. 책을 읽고 있던 요 며칠 사이에도 오산의 철거민들에게 골프공을 날린 미친 경찰들 얘기가 오르내리고 있고, 도시재개발 뿐 아니라 거대 미군기지가 이전한다는 평택의 어르신들도 수십년에 걸쳐 몇 차례 계속된 철거에 이제는 남은 목숨을 걸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번듯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서민들은 엄두도 못낼 집값과 땅값을 자랑하는 서울 지역의 대부분은 불과 2,30년 전만 해도 저곡가정책, 소농제 유지 등 온갖 농촌 죽이는 정책에 떠밀려 아무런 대안 없이 서울로 서울로 온 가족이 봇짐 싸 올라온 철거민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떠밀리고 떠밀리며 자리잡은 서울의 대단위 판자촌인 사당동이나 낙골지역에 대한 이야기들도 생각해보니 90년대 초반 뉴스를 통해 접했던 기억이 나기도 했다. 봉천동 어디쯤이었나 용역깡패들에 의해 할머니들의 속옷에 연탄재가 짓이겨지고 할머니며 아줌마며 할 것 없이 폭행이 자행되던 어느 르포 프로그램을 보며 인간이 어떻게 인간에게 저럴 수 있는가 하는, 과연 내가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엄청난 절망감과 슬픔을 느꼈던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이 책에서 대표적인 철거민촌 혹은 빈민촌의 사례로 나오는 몇몇 지역 중 삼양동은,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미아동과 바로 옆이었다. 소중한 몇 백원의 용돈을 모아 너무 맛있었던 떡볶이를 사먹으러 가곤 했던 삼양시장 바로 윗편부터는 아마도 인간 이하의 삶을 이어가는 빈민들의 판자촌이 펼쳐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중학교 때 이사를 왔던 서초동 역시, 새로 입주한 아파트의 번지르르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진입로 한 켠으로 그때는 용도를 알 수 없었던 비닐하우스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닐하우스들은 자취를 감추고 무슨무슨 식당들과 사무실들이 들어섰고 결국 그 자리에서 떠밀린 사람들은 포이동, 개포동 등지의 어디론가를 흡수되어 버렸던 거다. 도시개발이니 국제회의니 아시안게임이니 올림픽이니 하는, 우리 사회 성장 신화의 이면에 가려진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성장을 위한 희생양이었던 동시대의 그들에 대한 나의 관심이 새삼 불편하게 느껴질 만큼, 그들의 삶은 처절한 인간 이하의 그것이었다. 그들의 짐승같은 삶을 담보로 내가 편히 살아왔다는 자책과 미안함을 지울 수 없으며 동시에, 그러한 사실마저 아무도 모르게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프고 답답하다.
과제 때문에 읽기는 했지만, 머리보다 가슴으로 읽은 책이라 리뷰가 영 잡기스럽지만... 현재 검색되는 빈민운동 자료 단행본으로는 가장 통합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한 지역에 대한 집중 탐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질적 연구 방법에 근거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결과를 내놓고 있다. 서문에서 저자는, 도시빈민에 대한 이론 정립과 자료 정리가 거의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고통 받는 도시빈민들의 문제 해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엮었다는 겸손을 보이고 있지만, 출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도시빈민운동에 대한 자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의 가치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7장으로 묶여진 도시빈민 운동 자료 모음이 아닌가 싶은데, 당시 운동을 주도했던 단체들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와 운동세력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있어 활자를 넘어 시청각 자료와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한편 도시빈민운동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주민운동정보교육원과 같은 단체들에서도 꾸준히 교육과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서의 기능이 좀더 추가된다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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