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라는 게 있어서 다행이다. 요일 개념 없는 날들이 이어지는 일상에서, 뭔가 하나가 마무리되고 시작되는 느낌은 새롭다. 1월의 마지막 날, 힙하게 늦잠으로 시작했다. 특별히 피곤했던 것도 아니고 심하게 늦게 잔 것도 아닌데 시계알람 휴대폰알람 다 못 들은 나에게 좀 서운했지만 엎질러진 물. 대신 아침겸점심겸저녁을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 들으며 먹기로 하고, 두어 시간 이번 주에 봤던 영화에 대해 정리를 했다. 햇살독서가 고프기는 했지만, 100%는 아니더라도 정리를 하고 넘어가는 게 내 마음에 더 좋으니까.
일요일이니 도남관광지 쪽으로 나가볼까 했으나 5시가 다 되어 좀 애매했다. 케이블카파크랜드를 크게 한바퀴 돌고 봉평동으로, 오늘도 골목 입구에서 대건성당을 찍고 통영관광해양공원으로 향했다. 요즘 자주 걷는 경로인데, 이렇게 가면 공원까지 최단거리보다 많이 걸을 수 있고 약간의 오르막도 있어 운동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좋다.
통영대교 아래 해안로와 공원 사이에 방파제는 아니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길쭉한 길이 있는데;;; 공원을 구석구석 걸으면서 여기는 안 가봤단 생각이 들어 걸었다. 왼쪽은 배를 묶어놓는 구조물들이 있어 오른쪽과 정면에만 낮은 가드가 있었는데, 끝까지 다가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에서 장피에르가 호텔방 창으로 뛰어내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가드는 낮았지만 무서울 정도는 전혀 아니었고 실수로 빠진대도 수심이 깊어보이지 않아 별 일 없을 것 같았는데, 너무 뜬금없는 장면이 갑자기 떠올라서... 사람 참 신기하네 싶었다.
끝에서 돌아나가며 통영대교를 봤는데, 어떤 사람이 걸어서 지나가고 있었다. 와, 저거 정말 내가 해보고 싶은 건데. 부러워서, 실례다 싶으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사진을 찍어버렸다. 1월의 마지막 산책에서 저 사람을 보게 된 건, 조만간 다리 걸어 건너기를 시도해보라는 계시가 아닐까? 생각만 해도 약간 후달리는데 잘할 수 있을까? 다리 걸어 건너기 위해 친구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떠들며 함께 건널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일요일이라 엄마랑 통화를 했다, 찔리니까 짧게. 설연휴에 가족이라도 5인 이상 모이지 말라는데, 솔직히 실효성이 있는 방침인지 모르겠고 그 5인이라는 것도 너무 자의적인 기준이라서 별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설연휴에 서울에 갈 예정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설에는 내가 일을 그만뒀다는 것과 통영으로 이사했다는 것을 엄빠에게 말하기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세자매]의 난장판을 보면서 (비교하기도 민망하지만) 내가 얘기하면 일어날 난리가 저거보단 심하지 않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더랬다.
사실 엄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상상이 안 되는데... 기억에 엄빠가 내게 화를 냈던 건 15년쯤 전 내 마음대로 부천으로 이사할 때가 마지막이었고. 안양에서 부천으로의 이사와 서울에서 통영으로의 이사, 현재 백수, 그 사이에 모두 15살씩 더 먹었다는 차이가 엄빠의 반응에 어떻게 작용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암튼, 나는 12일 후에 엄빠한테 모든 걸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덜기로 했다. 너무 이기적인 것도 같지만 이미 저질렀고 돌이킬 수는 없으니, 엄빠가 서운해하든 화를 내든 솔직한 게 낫겠지. 마음아, 쫄지도 말고 변하지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