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나어릴때 2022. 8. 17. 23:4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슬로우를 잔뜩 건 샤방한 화면에 등장하는 댄디하고 섹시한 청년, 한눈에 봐도 매력이 넘치는 그는 여유롭게 자신의 멋짐을 뽐내며 카페에서 거리로 나선다. 같은 시각, 창밖으로 저 멀리 다른 세상처럼 시티뷰가 펼쳐진 호텔방에서는 엄청 긴장한 중노년 여성이 자신의 매무새를 정돈하며 좌불안석이다. 나이도 스타일도 심리 상태도 대조적인 두 사람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인트로는 조금 짖궂지만 이후 전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입부다.

 

얼마 후 여성의 호텔방에 청년이 찾아온다. 극도의 내적 갈등과 불안함으로 혼돈에 빠진 낸시와 그런 낸시를 자연스럽게 리드하며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청년 리오 그랜드. 자신의 선택과 호기심을 변명하듯 이런저런 말을 내뱉으며 혼자만의의 처절한 전투를 치르는 낸시에게, '실증적'이니 '환원적' 같은 고급 단어를 사용하는 리오의 화법은 무의식적인 편견과 긴장을 낮춰주고 약간의 안도감을 안긴다.

 

그들의 목적은 섹스다. 몇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첫 번째이자 마지막 상대였던 낸시에게 섹스는 일종의 의무방어전이었다. 얼마 전 퇴직하기 전까지 종교 교사였던 그는 학생들에게 순결과 정절을 강조하며 직업 생활과 윤리에 충실한 삶을 오랫동안 살아 왔다. 자녀들은 장성해 떠났고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일상의 중심이던 일터에서 떠나온 낸시는 이제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것들, 자신을 억누르던 것들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터다.

 

늦게나마 낸시는 자신을 사로잡는 궁금증을 직접 해소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섹스가 선사하는 충만감, 스스로 억압했던 몸을 통해 오르가슴과 해방감을 느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여 적지 않은 돈과 그보다 더 큰 용기를 들여 섹스 워커 리오 그랜드를 호출했지만, 오랜 세월 짓눌렸던 고정관념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다. 와중에 사이가 좋지 않은 딸의 전화까지 혼란을 가중시키고 돈만 날릴 위기에도 처하지만, 부끄럽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편안함을 선사하는 리오와의 만남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리오와의 첫 만남과 섹스에서 신선한 자극과 미처 몰랐던 성적 쾌락을 경험한 낸시는 조금 더 담대해진다. 각자의 고유한 몸과 욕망을 긍정하고 서툴고 어설픈 모습도 사랑스럽게 수용하는 리오에게 느낀 신뢰가 더해지자,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던 다양한 체위의 우선순위까지 메모하며 낸시는 몸에 밴 계획성을 드러낼 만큼 편안해진다. 변화와 적극성을 이끌어내는 리오의 부드럽고 젠틀한 퍼스널 서비스는 고독한 노년을 앞둔 낸시에게 나타난 놀라운 신세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솔한 몸과 마음의 대화가 거듭되며 애초의 긴장이 사라진 자리에 전직 선생의 강력한 오지랖이 찾아든다. 이전의 만남에서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나눴던 각자의 이야기에 고무된 낸시는, 세 번째 만남에서 리오의 본명과 본업을 찾아봤고 알게 되었음을 천진한 표정으로 털어놓는다. 경악한 리오와 어리둥절한 낸시, 육십 년 넘는 인생의 굳건한 장막을 걷어내준 리오의 마법에 홀렸던 낸시는 경계를 넘어버렸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리오는 고성과 과격한 몸짓으로 호텔방을 엉망으로 만들고는 떠나버린다.

 

그들이 다시 만난 곳은 카페, 세 번의 만남을 가졌던 호텔의 1층이다. 난생처음 성적 쾌락과 해방감을 안겨준, 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깨우쳐준 리오와 그렇게 끝낼 수 없었던 낸시는 다시 만남을 청했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이다. 어색하게 홀로 앉은 낸시에게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은 깜짝 놀라며 알아보는 과거의 제자다. 의외의 장소에서 민망한 관계의 상대를 기다리다 조우한 제자가 반갑지 않은 낸시와 달리 그는 수다스럽다. 그리고 얼마 후 나타난 리오와 서먹하게 재회한 낸시는 자신의 진심을 전하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주문한 커피를 전하러 온 과거 제자의 미심쩍은 눈초리에 리오는 중고거래 운운하며 거짓말을 둘러대지만 낸시는 편견의 굴레를 벗기로 결심한 양 말을 잇는다. 교사 시절 여학생들에게 너희는 걸레라며 폭언을 서슴지 않았던 낸시, 아니 수잔이 호텔방을 벗어난 자신의 세계에서도 다른 삶을 살기로 선언하는 순간. 눈짓으로 리오의 동의를 확인하고 둘의 관계를 제자에게 가감없이 이야기한 수잔은 시간이 아깝다며 마지막으로 예약한 호텔방에 리오와 함께 올라간다. 리오와 섹스를 나누고 거울을 통해 자신의 벗은 몸을 수잔의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오랫동안 부정했던 몸과 욕망에 대해, 뒤늦게 마주한 삶의 고독과 공허에 대해 자기만의 돌파구를 찾는 낸시의 솔직함과 용기, 갈등과 혼란이 엠마 톰슨의 연기 덕분에 현실감을 더했던 것 같다. 어쩌면 멋모르고 벌였을 친구들과의 난장과 그로 인한 엄마의 외면, 어린 시절의 고충과 난관을 이상적으로 승화시킨 리오 그랜드 캐릭터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경직된 낸시의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선사하는 만큼 판타스틱한 요정질과는 어울렸다. 엠마 톰슨의 관록과 대릴 매코맥의 신선한 존재감, 두 배우의 이상적인 케미 덕분에 더욱 빠져들어 본 것 같다.   

 

금기와 본능의 경계를 넘나들며 성적 욕구와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보여주지만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았고, 누구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인간을 공허와 외로움에서 구원하는 것이 성적 경험만은 아니겠지만, 그 부분에서 남모를 결핍과 콤플렉스를 강하게 느꼈던 낸시를 통해 솔직하고 유쾌하게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점도 좋았다. 미니멀하게 축소된 공간과 딱 필요한 만큼의 등장 인물을 통해 각자 다르지만 모두가 겪는 고민과 문제를 밀도 있게 펼쳐보이는 솔직하고 유쾌한 영화였다. 


8/16 cgv서면 임권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