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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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흐려진 시야로 사물이 잘 변별되지 않는 실내, 휴대폰 작동 상황을 설명하는 기계 음성이 이어진다. 그곳에는 거동이 불편한 한 남자 야코가 있다. 그는 음성 명령으로 휴대폰 기능을 작동시켜 필요한 정보들을 얻고 여자 친구 시르파와 통화를 한다. 느릿하고 힘겨운 움직임으로 침대에서 휠체어로 이동해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는다. 그러다 어딘가에 걸려 휘청인 휠체어에서 떨어진 야코는 활동보조인이 도착한 후에야 도움을 받아 일으켜진다. 흔쾌하진 않겠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만큼 놀라운 일은 아닌 듯하다.
야코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시력을 상실했고 가슴 아래의 신체가 마비된 장애인이다. 음성 지원되는 휴대폰이 종일 함께하는 친구이고 잠깐씩 방문하는 활동보조인이 살림을 챙겨준다. 아들을 걱정하며 수시로 전화하는 아빠에게는 짐짓 명랑히 응대하며 가급적 빨리 통화를 마치려 하는 편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두 손과 팔로 휠체어를 밀어 베란다에 나가 전자담배를 피울 때면, 마주친 적도 없는 자신을 험담하는 이웃의 낮은 말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온다. 잠시 쓸쓸한 표정이 되지만 그뿐, 그에게는 익숙한 일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는 야코의 큰 즐거움은 그를 "땅다람쥐"라고 부르는 여자 친구 시르파와의 통화 그리고 시각을 잃기 전까지 섭렵했던 영화들이다. 야코는 미국의 B급 영화 거장 존 카펜터를 가장 좋아하는 주관이 뚜렷한 영화광이고, 적잖은 dvd들을 여전히 간직한 그의 말에는 각종 영화의 디테일이나 인물들이 늘 자연스럽게 섞여든다. 시르파와 일과처럼 통화하면서 오늘의 기분, 지난밤의 꿈, 몸의 상태 등 자잘한 일상을 나눌 때도 영화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악몽에 시달리는 그에게 [타이타닉]을 권하는 시르파와 영화 취향은 다르지만, 동병상련의 현실에서 주고 받는 격려와 위로는 서로에게 큰 힘이다.
그는 매일이다시피 달리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어딘가로 끊임없이 질주하고, 잠결의 끝에서 힘겨운 호흡과 진땀으로 깨어나기 일쑤다. 두 발, 두 다리, 달려가는 뒷모습을 비추는 꿈은 반복되면서 조금씩 진전된다. 마지막 꿈에서 멈춰선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세상에 나온 자신인 듯 휠체어를 탄 한 남자가 있다. 시르파를 만나러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몸의 괴리가 매일 꿈에서 그를 달리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통화로밖에 달랠 수 없는 두 사람은 바람을 담은 노래를 틀어놓고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둘 중 하나 죽기 전에 만날 수 있을까?" 담담한 한 마디에 심정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시르파와 야코는 택시 두 번, 기차 한 번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다. 1천 킬로미터 떨어진, 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쉽게 엄두를 낼 수 없는 길이다. 막연하게 기약하는 만남이 실제로 가능할지 알 수 없고, 가장 친밀한 관계인 두 사람에게는 살아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완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인 두 사람은 주로 가볍고 밝게 일상다반사를 나누지만, 치료 과정의 기로에선 시르파는 어느 날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한다. 마침 온라인 도박으로 예기치 못한 큰 돈을 얻게 된 야코는, 주문처럼 언급하던 만남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활동보조인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갑작스럽게 일정을 맞출 수 없자 한시가 급한 야코는 홀로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다. 택시와 기차를 예약하고 홈시어터 장비를 주문하고 활동보조인에게 부탁해 챙긴 dvd를 가방에 넣고는, 집앞으로 온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시르파에게 향한다. 무사히 기차역에 내려 직원의 도움으로 플랫폼에 선 야코, 휠체어에 올라 혼자인 그의 근처를 서성이던 누군가 눈앞에서 손을 휘젓더니 가방에 손을 댄다. 기척을 느끼고 반응하자 사라지지만, 홀로 나선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위험은 이제 시작이다. 기차에 올라타 시르파에게 출발을 알리고 말을 걸어오는 '스콜피온스맨'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가던 야코는 그의 도움으로 목적한 역에 내린다.
하지만 스콜피온스맨은 플랫폼에서 접근했던 치한이었고 앞을 못 보는 야코를 위협하며 어디론가 끌고 간다. 마약중독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강도 행각을 벌이는 스콜피온스맨과 인질이 된 야코 앞에 포악한 빚쟁이까지 나타난다. 위기를 넘기려는 야코의 임기응변은 통하지 않고, 도박으로 딴 거액의 존재를 알고 더욱 흉포해진 빚쟁이는 시르파까지 들먹인다. 목에 칼을 겨누고 긋는 시늉을 하는 빚쟁이의 협박과 폭력에 죽을 고비를 맞은 야코는 폭발한다. 어떻게든 그들을 달래 상황을 벗어나려던 야코는 자신에게 닥친 억울함과 절박함을 절규하듯 외치며 죽더라도 한푼도 줄 수 없다고 포효한다.
그들은 유일한 길잡이인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떠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야코는 안간힘으로 휠체어를 움직여 공포의 공간에서 빠져나오지만 무언가에 걸려 쓰러진다. 저 멀리에서 들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실낱 같은 희망이 살아나지만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어딘가에서 나타난 개 한 마리가 그를 보고 짖는다. 바닥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오는 개에게 조근조근 말을 붙이는 야코, 그를 발견한 개 주인은 다행히도 친절한 사람이었다. 몇 시간 사이 생사를 오가는 악몽을 경험한 야코는 마침내 시르파의 집 앞에 닿는다. 사투 끝에 처음 만난 시르파와 야코는 감격에 겨워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본다'. 챙겨온 [타이타닉] dvd를 꺼내며 환하게 웃는 야코, 그리고 영화는 처음으로 '완전한' 시야의 화면을 보여준다.
기억하고 싶어 줄거리를 구구절절 적었지만, 영화의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는 야코의 얼굴과 상반신 외의 모든 것을 포커스 아웃한 화면과 섬세한 연출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인트로 타이틀 자막의 내용을 설명하는 여성의 음성 해설이 계속 나왔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어서 의아해졌는데 그 소리는 야코의 일상 배경 사운드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작된 영화의 화면은 마지막 두 사람의 조우 장면을 빼고는 내내 야코의 시야를 반영한 포커스 아웃으로 연출된다. 처음 흐릿한 화면의 야코의 방 역시 의아했는데, 그가 시각장애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의미를 깨달았고 약간 소름이 끼쳤다. 답답하기는 했지만 때로는 오히려 몽환적인 느낌이 들 때도 있었고, 당사자의 감각을 직관적으로 재현하는 놀라운 방법이자 과감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방전으로 대마초를 공급받을 만큼 공인된 물리적 고통을 경험하며 비좁은 실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야코는, 오랫동안 좋아한 영화 그리고 멀리 있는 여자 친구와의 소통을 힘과 희망 삼아 살아간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이불밖은 위험하다는 말을 입증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베란다에만 나가도 사정을 알지 못한 채 험담하는 이웃의 목소리가 들리고, 무모하게 나선 길에는 위험이 가득한 데다 악당의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도 처한다. 하지만 야코는 독립적이고 유쾌한 성격의 영화광이고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위해 도전을 감행하는 중년 남성이며 난치병을 앓고 있는 시각 장애인이기도 한 존재다.
영화는 단순한 서사와 주인공의 감각에 입각한 과감한 연출로 관객의 선입견과 편견을 통쾌하게 전복시킨다. '불운과 불행의 표면을 넘어'(이 역시 비장애인인 나의 편견일 것이지만, 아직 내가 극복하지 못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한 사람의 개성과 욕망과 취향을 생생하게 구현하고 당사자성의 극대화를 통해 타인의 감각과 감정을 추체험하게 만든다. 물론 90분도 안 되는 간접 체험의 한계는 명백하고 장애/비장애 여부를 떠나 누구도 타인의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또 최선의 선택을 통해 경계를 향해 나아가는 느낌이다.
야코의 힘겨운 움직임과 시각 장애로 인해 겪는 불편함들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올라왔고, 악당들의 볼모가 되고 홀로 버려지며 겪는 일들은 물론 혼자 가는 길에 놓인 자잘하지만 거대한 위험 요소들이 조마조마하고 위태해서 나도 모르게 온몸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기연민에 빠지기보다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 움직이는 야코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시스템일 것이다.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흘리는 이웃과 같은 사회의 인식은 인간 사회에서 당장 어쩔 수 없다 해도, 용기를 내 거리에 나선 '사랑에 빠진 남자'가 보이지 않는 장애물들에 수시로 공포를 느끼고 급기야 범죄의 타겟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예방할 수 있는 일일 테니 말이다(물론 그랬다면 영화가 성립되지 않았겠지만.).
두 사람의 만남으로 환하게 영화가 마무리되면 주인공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이 실제 다발성 경화증과 시각 장애를 가진 배우라는 간명한 자막이 나온다. 그리고 시작되는 엔딩 크레딧은 문자에서 점자로 변환되어 올라간다. 음성 지원으로 시작되는 인트로, 주인공의 시각과 시야를 반영한 화면, 등장하지만 얼굴도 신체도 거의 나오지 않는 다른 배우들, 점자를 시각화한 엔딩 크레딧까지 완벽하게 감동이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관객이 나뿐이었는데, 아무런 방해 요소가 없으니 더욱 몰입이 되었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아름답고 충격적이었다.
기발하면서도 좋은 영화를 보면 '감독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어지는데, 이 작품은 그 수준을 넘어 '영화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다니!' 하는 놀라움과 어떤 각성을 선사했다. 예상치 못한 감동으로 울컥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고 나오니 12시가 다 되었고, 영화만 봤을 뿐인데 하루의 마무리가 무척 아름다워 세상에 고마워졌다. 기사를 찾아 보니 테무 니키 감독과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은 함께 공부하던 친구였고, 배우로 활동했던 그의 실화를 각색하며 감독은 자신의 여동생이 앓고 있는 혈액암을 시르파의 병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여러 모로 아름다운 영화를 만나게 되어 행복하다. 나 북유럽 영화랑 잘 맞는 것 같은데, [6번 칸]은 언제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
3/10 cgv서면 임권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