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못다 한 이야기]
1992년 10월, 미국 여행 중 세인트루이스의 한 대학에서 유학생들을 관객으로 연 작은 공연이라는 자막에 이어 승용차에서 내려 이동하는 김광석 아저씨의 모습을 담은 짧은 인트로 화면, 그리고 시작된 공연의 첫곡은 "친구"다. 익숙한 기타 반주와 첫 소절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에 반응하는 마음은 순식간에 긴 시간을 건너뛰었다. 십대 시절 언젠가 이어폰을 끼고 우면산을 내려오며 수차례 반복해 들었던 김민기 선생님의 목소리에 담긴 "친구" 그리고 이후 김광석 아저씨의 목소리로 전해지던 조금 더 물기어린 "친구"의 기억. 공연장에서 눈을 감고 노래에 빠져들던 때가 생각났고, 온전히 노래에 취하고 싶어 눈을 감으려다 눈앞의 모습을 놓치는 게 너무 아까워 눈을 크게 떴다. 수십 년 전 계몽아트홀, 마당세실극장, 학전소극장 그리고 또 어딘가, 그때도 충만한 순간들이라 느끼며 빠져들었지만 새삼 정말 얼마나 귀한 순간들이었나.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지나간 순간이 다시 올 수는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음질도 화질도 당연히 좋지 않고 포커스 아웃되는 순간들도 엄청 많았지만, 시각과 청각의 결합 그리고 스크린의 힘은 압도적이어서 새삼스럽게 감동적이었다. "기다려 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부른 후의 짧은 이야기 그리고 "사랑했지만", "말하지 못한 내 사랑"에 이어 객지의 유학생들에게 전하는 담담한 위로의 말, 마지막 곡은 "먼지가 되어"였고, 공연 후 뒤풀이 자리로 옮겨 노천 카페에서 라이브로 부른 "나의 노래"가 더해졌다. "나의 노래"에서 카메라는 김광석 아저씨에 집중하기보다 자리에 앉거나 주변에 서서 노래를 듣는 이들을 많이 비추었는데,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군가 이 영상을 본다면 감회가 정말 새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분 남짓 짧은 영상은 성의없이 마무리됐다. 엔딩 타이틀과 함께 "거리에서"가 다시 한 번 흘렀고, 타이틀이 짧기는 하지만 너무하다 싶을 만큼 노래가 중간에서 뚝 끊겨버렸다. 30년 전 홈비디오 촬영본이니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아쉬움은 감수하며 보았지만, 엔딩 타이틀 자막의 속도를 조정한다거나 하는 식의 작은 성의로도 영상 종료 시점을 보컬 중간이 아니라 간주를 페이드 아웃하는 식으로 맞출 수 있지 않았을까.
중학생이던 시절 그룹 동물원에서 독립해 "기다려 줘"를 타이틀곡으로 1집 음반을 낸 그의 계몽아트홀 콘서트에 갔던 게 생애 첫 공연 관람이었다. 고등학생 때 학전소극장에서 열린 김광석 안치환 콘서트 즈음 그가 디제이를 맡은 불교방송의 "밤의 창가에서"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고, 이후 그의 공연에 참 많이 갔었다. 감수성 예민한 시절부터 보고 듣고 감응했던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의심할 바 없이 어른의 것이었고, 영상 속에서 노래하고 말 건네는 그 역시 세상을 잘 아는 어른처럼 보였지만 서른도 채 안 되었을 시절이다. 잊고 지내다가 오랜만에 듣고 보니 정말 일찍 떠나셨구나 싶고, 그 소식을 듣고 정신이 나갔던 대학 시절 겨울 방학 공활을 하며 지내던 자취방에서의 내 모습이 꿈처럼 떠올랐다. 몇 년 전 다큐 [김광석]이 제기했던 의혹의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엔딩 크레딧 시작 부분에 나오는 이름에 마음이 잠시 멈칫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게 오히려 이상하다 싶고 모르는 채로도 편견의 그늘을 아주 걷어버릴 수 없는 것 역시 개운치 않았지만, 그래도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김현식 아저씨의 공연, 살아계시지만 김목경 아저씨의 공연도 이렇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가, (그럴 수도 없겠지만)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재현되는 것이 좋은 것일까 싶어지기도 했다. 아무려나, 추억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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