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청춘에게고함
토요일, 이따금 빗방울이 날리고 바람이 겨울처럼 불었다. 그리고 낙원동,에서 고대했던 '내 청춘에게 고함'을. 주말 오후 인파로 넘쳐나는 대로를 가로질러 들어선 낙원의 골목에서 처음 마주치는 것은 급격한 이물감을 담은 냄새다. 비릿하고 역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고깃덩이들이 풍기는 냄새. 차마 하늘로 솟아올라 퍼지지도 못하고 좁은 골목 가게 처마에, 하늘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에 가둬진 진한 연기는 이방인에게 청구하는 낙원의 입장료일까. 이제는 이삿짐이건 무엇이건 실어날으며 먹고 살아야하는 낙원 상가는 십 년 전 '정글스토리'가 담아냈던 비루한 열정조차도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지만 아무나 헤집을 수도 없는 최후의 소도만 같은 낙원동, 시인이 마지막 머물렀던 이제는 없어진 극장의 전설도 이정우의 글에서 비밀스럽게 엿보았던 게이게토의 유산도 모두 잡아먹어버리고 외지인의 침입도 세월의 습격도 태연한 불협화음으로 밀어내는 듯한 그 곳. 마지막으로 남겨진 메마른 오아시스처럼 황량한 의지를 땅 속 깊이 심어놓고서, 갖가지 먹거리로 찾아드는 범속한 사람들을 눈속임하며 땅의 정체성을 감추려 애쓰고 있는 것 같다. 입구에 둥지를 튼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 아껴 틀어주는 영화처럼 애틋하게 반짝거린다. 4층까지 올라가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하는 엘리베이터가 실어날으는 사람들 역시 어쩐지 비슷한 향수를 담고 있는 느낌. 마주 보고 있는 영화관과 무도장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퇴락한 도시의 변두리 같은 옥상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종로타워와 무슨무슨 스위트라는 번듯한 레지덴스 건물에 가로막혀 버렸다. 이렇게도 버틸 수 있는 건, 그래도 '낙원'이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내 청춘에게 고함이 시작되었다. 울림을 담은 제목에 끌렸지만, 실은 그 무엇보다도 진부하고 상투적이다. 영화 역시 다르지 않았다. '청춘'이 불러내는 많은 것들. 혼란과 방황, 무모함과 대책없음 그리고 때로 무기력과 이른 환멸. 누구의 청춘에나 질료로 쓰이는 그것들이 나의 시간과 만나게 되면 '내 청춘'만은 유독 아프고 아릿하다. 상투성의 힘은 누구에게나 공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아닐까. 세 편의 에피소드는 '베티블루'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그리고 '강원도의 힘'의 어느 지점을 연상시켰다. 생물학적으로 청춘을 통과한 나의 시선은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가족도 애인도 혼란스런 일상의 구성물일 뿐인 정희와 환상에도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근우와 관계의 균열을 확인한 후에도 미련의 끝자락을 놓지 못하는 인호. 불온하고 거친 숨결을 눌러줄 조르그의 베개 대신에 정희는, 현실에서 마주칠 수 있는 가장 가치전복적인 사건에 호흡을 고른다. 나날을 습격하듯 닥치는 시간을 늦추는 것으로도 모자라 먹으려 애쓰던 근우는, 시간과 무관한 비현실의 탐닉으로 빠져들지만 그렇다고 신랄한 현실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한 날들을 지난, 진심에 의뭉스러울 수 있는 나이를 살아가는 인호는 이미, 다시는 안 그럴께 라는 말을 금세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잘못 놓여진 신발 한 짝을 누군가 걷어차 잠시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리는 황망함, 쯤의 생각을 담고 영화관을 나섰다. 바람은 여전히 세차고, 아마 모든 이의 분신이었을 주인공들이 떠오른다. 청춘이 그다지 새롭지 않듯이 영화도 그랬다. 그렇지만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는 건, 그 진부함 속에서 내 청춘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옆에서는 서울영화제가 열리는 중이었다. 집어온 프로그램에서 발견한 영화, '말라 노체'. 그러나 기회는 토요일의 심야 상영뿐이다. 그것은 청춘의 놀이, 어쩔까 싶다. 오는 길 내내 '안녕, 또 다른 안녕'을 들었다. '낙원'을 뒤로 하고 와선가, 주말을 보내며 기분이 좀 그랬다.
2006-09-11 02:23,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