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로켓]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허름한 입성의 한 사내가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 마이키 세이버, 그가 도착한 곳은 고향인 텍사스의 전 아내 집이다. 문 앞에서 잠시 멈칫하다 전화를 건 그는 잔뜩 허세를 부리며 선물처럼 자신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만, 문을 연 장모 릴의 표정에는 경계하고 무시하는 빛이 역력하다. 이어 나온 전 아내 렉시 역시 불청객인 마이키의 너스레를 일축하며 접근금지 명령 운운, 집 밖으로 내쫓는다. 하지만 집 경계 밖으로 물러나서도 막무가내로 자신의 구차한 상황을 소란스럽게 늘어놓던 마이키는 결국 집안 입성에 성공한다.
포르노 배우 동료였던 마이키와 렉시는 십여 년 전 결혼했고, 마이키는 오래 전 집을 떠나 홀로 떠돌았다. 배우로 활동하며 제법 인기가 있었던 그는 과거와 허황된 꿈에 취해 제멋대로 살아왔고, 엘에이에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갈 데 없는 신세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러 곡절과 사연이 있었던 둘은 여전히 서류상 부부이지만, 마이키는 이혼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찾아올 만큼 정신 없고 뻔뻔하다. 렉시와 릴은 한마음으로 그를 백안시하지만, 월세를 분담하겠다는 제안에 임시 기거를 허락한다. 거처 문제가 해결되자 마이키는 마리화나 배급책인 옛 이웃을 찾아가 동네에서의 거래로 돈을 모으고, 어수룩한 성인이 된 옆 집 꼬마 로니와 어울리며 그의 차를 얻어타고 동네를 누빈다.
격렬한 적의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은근슬쩍 렉시의 침대로 들어가 섹스도 하면서 마이키는 무료하지만 안정된 일상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입만 산 한량 사위가 못마땅하지만 애초의 약속대로 월세를 내고 렉시와 동침하는 기색을 알아챈 릴은, 마이키에게 정착하거나 당장 떠나거나 택하라고 압박한다. 하나뿐인 딸이 채팅앱 성매매로 생계를 꾸리는 현실이 가슴 아프고 또 다시 상처 받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당장 갈 곳 없는 마이키의 선택은 안주, 잠시나마 제법 가족 같은 화기애애함을 장착한 세 사람은 마이키가 쏘는 외식을 하러 함께 동네 도너츠 가게로 향한다. 마이키는 온갖 생색을 내며 원하는 도너츠와 음료 주문을 종용하고, 렉시와 릴은 흔쾌히 호의를 받아들이며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외식 덕분에 앳되고 매력적인 도너츠 가게 알바노동자를 발견하고 한눈에 반한 마이키 역시 흔쾌하고 만족스럽다.
다음 날 자전거를 타고 도너츠 가게에 찾아가는 마이키는 들떴다. 부재 중인 알바노동자의 이름과 근무일을 알아내고 다시 찾아가 능구렁이 같은 아재개그를 늘어놓으며 접근하는 마이키, 관심을 즐기는 듯 레일리는 살갑고 웃음이 많다.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이자 지루한 일상이 답답한 열여덟 레일리는 자신의 끼와 섹시함을 잘 알고 있는 맹랑한 소녀, 예명은 스트로베리다. 도너츠 가게에 자리를 잡고 마리화나를 거래하는 마이키에게 근처 정유공장 노동자들로 판매망을 확대하라는 조언을 할 만큼 거침이 없고, 조금씩 가까워지며 카운터 안에 자리잡기 시작한 마이키와 노닥거리면서 눈치껏 가게 주인을 눈속임하는 데도 능숙하다.
삼촌과 조카 뻘인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지고 스트로베리의 적극적인 어필로 커플 비슷한 관계로 급발진한다. 엄마의 트럭을 몰고 출퇴근하는 스트로베리는 매일 가게에 죽치는 마이키를 집(이라고 속인 부잣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더욱 과감해진다. 자신의 전직을 알고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스트로베리에게서 마이키는 사랑과 그를 이용한 재기의 욕망을 동시에 느끼기 시작한다. 도너츠 가게에서의 키스를 목격한 스트로베리의 섹스파트너에게 집까지 찾아가 경고했다가 온가족의 응징을 당하는 민망한 신파를 통해 두 사람의 마음은 더욱 가까워진다. 엄마의 외박에 마이키를 집으로 초대한 스트로베리와 사랑을 나누며 도발적인 스타성을 확신한 마이키의 마음은 이미 고향을 떠나고 있다.
무일푼에 맨몸으로 돌아온 지 몇 주만에 돈과 사랑과 미래를 거머쥔 마이키의 뇌리에서 자신을 받아준 렉시와 릴은 지워진다. 불편한 소파 신세를 면하려 질척거리며 차지한 침대에서 렉시의 요구는 거추장스럽고, 마리화나 거래로 제법 두둑하게 모은 돈으로 당당하게 생활비와 월세를 지불하며 목소리도 커진다. 극적인 변화의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상대는 순진한 로니뿐, 그의 차를 얻어타고 스트로베리와의 일들과 자신의 계획까지 모조리 털어놓으며 마이키는 희망에 부풀었다. 수다에 장단을 맞추며 운전하던 로니는 길을 잘못 들고 마이키의 지적에 방향을 튼 차는 고속도로에서 엄청난 사고를 내고 만다. 급히 차를 돌리고 너무 놀라 토하는 로니에게 마이키는 자신의 동승을 비밀에 부치라고 요구한다.
십수 명의 부상자를 낸 고속도로 22종 추돌사고 소식이, 대선 이슈를 제치고 뉴스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유례없는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까지 감행한 파렴치한에 지역의 분노가 몰리고 금세 밝혀진 범인 로니는 구속된다. 신세 조진 착한 이웃을 안타까워하는 렉시와 달리 마이키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좌불안석, 하지만 소심한 것인지 충직한 것인지 로니는 공범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는다. 한숨 돌린 마이키가 고향을 떠날 이유는 더욱 분명해졌고, 사고 직후 뜸했던 도너츠 가게에 꽃다발을 사들고 간 그는 스트로베리에게 내일 아침 함께 엘에이로 떠나자고 프로포즈한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따분한 고향을 떠나는 것은 스트로베리 역시 바라던 바다.
귀가해 엉뚱한 말들로 이별을 고한 마이키 앞에, 렉시의 연락을 받은 마리화나 배급책의 자식들이 나타나 빼돌린 마리화나와 숨겨둔 돈을 압수한다. 새 출발을 앞두고 청천벽력을 만난 마이키는 옷 갈아입을 시간을 청한 뒤 벌거벗은 채로 동네를 달려 배급책을 찾아가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배급책은 날이 밝기 전에 텍사스를 떠나라며 장거리 버스 티켓을 살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내밀고, 돌아올 때처럼 다시 빈털터리가 된 마이키는 스트로베리의 집 앞으로 간다. 현관문이 열리고, 망연자실한 마이키와 달리 빨간 비키니 차림으로 그를 맞이하는 스트로베리의 농염한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극중 누구도 웃기려는 의도가 없어 보였지만 캐릭터도 대사도 상황도 어이가 없어서 웃겼고, 그게 바로 블랙코미디겠지만 너무나 미국적이어서 재미있기보다는 대체로 황당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반화이겠지만 작품에서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삼았을 때는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이미지와 어떤 특성이 메시지와 결부되는 부분이 있을 텐데, 텍사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보니 더 그랬을 수도 있겠다. 도너츠 가게 근처 정유공장과 굴뚝, 공장과 집 근처를 지나가는 기차, 과거 노예무역이 이루어졌다는 항구 등 지역의 변화와 현재를 담은 배경과 장면 들을 삽입한 것도, 단지 제작 시기가 맞아 떨어졌던 걸 수도 있지만 대선 이슈를 실내 텔레비전 사운드로 계속 흘려보낸 것도 의도와 함의가 있을 텐데 싶었지만 알아챌 수 없어 아쉬웠다.
릴과 렉시의 공간에서 대사만큼이나 두드러졌던 텔레비전 사운드가 대선을 비롯한 크고작은 갈등들을 내내 다루다가 로니와 마이키의 교통사고라는 직접적인 균열이 전면화된 후에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는 게 기억나고, 애국심 운운하며 성조기 패턴의 담배 종이를 선택하는 마이키의 취향이 마초 이미지에 너무 부합해 인상적이었다. 도너츠 외식에 반색하는 렉시와 릴의 가난하고 누추한 일상, 그들을 돌봐준 유일한 사람이 대를 이어 마리화나 배급책으로 활약하는 이웃이라는 사실, 아내가 죽은 후 집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던 아버지와 그를 뒤로 하고 모든 걸 뒤집어쓴 채 구속된 로니의 운명 같은 것들이 쓸쓸한 느낌으로 남았다. 보수성이 지배적인 지역의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을 마이키와 렉시의 허름한 현재를 생각하니, 스트로베리의 반짝이는 젊음과 당돌한 아름다움은 시간과 함께 어떻게 변해갈까 싶어 아련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시간이 맞으면 볼까 했었던 기억이 있어 기획전 극장 상영이 반가웠던 영화다. 예전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궁금했는데 놓쳤고 이 감독의 작품을 한 편도 보지 못했는데 "인간들의 추한 단면을 최대한 솔직하게 표현해 유머로 승화시키는 션 베이커의 연출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소개 때문에 혹했던 것 같다. 감상을 말하자면, 영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내내 웃기긴 웃겼는데 그야말로 계속되는 실소여서 보는 동안 실시간으로 감정적인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징그럽게 배역 그 자체 같은 배우들의 명연기는 대단했지만, 내게는 꽤나 피곤한 농담 같은 영화였다.
7/5 cgv서면 임권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