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

[모리타니안]

나어릴때 2021. 3. 17. 21:4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리타니의 어느 마을에서 결혼식 같은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에 취한 가운데, 밖에 경찰들이 찾아왔다는 말에 긴장의 기색이 역력한 한 얼굴이 비춰진다. 얼마 후 그는,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휴대폰 기록을 몰래 삭제한 채 자신의 차로 경찰들을 따라나선다. 그의 이름은 모하메두 오울드 슬라히, 어린 나이에 장학생으로 뽑혀 독일 등지에서 유학한 마을의 자랑이었던 그의 행방은 이후 묘연해진다.

 

몇 년 후, 로펌에서 일하는 인권 변호사 낸시 홀랜더는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 중인 슬라히의 변호를 맡게 된다. 9.11 테러의 충격은 잔존하는 상황이지만, 재판도 기소도 없는 무기한 수감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변호를 자청했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법치국가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쿠바의 미군기지 내에 설치한 철옹성 보안의 무법지대, 수용자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각별한 줄을 통해야 하는 곳이다. 

 

군검찰관인 스투 역시 9.11 테러를 조직한 배후로 지목된 슬라히에게 사형을 구형하기 위해 그에 대해 파고드는 중이다. 스투는 9.11 당시 테러에 이용된 비행기 조종사였던 절친한 친구를 잃었다. 신념에 찬 원칙주의자인 스투에게 정의는 폭력으로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적을 심판하는 동시에 사랑했던 친구와의 우정과도 결부된 중요한 문제다. 

 

모니타리안인 슬라히를 접견하기 위해 낸시는 불어 통역을 도울 후배 변호사 테리와 함께 쿠바에 있는 관타나모 수용소로 향한다. 억울한 누명으로 재판도 없이 기소되어 8년째 관타나모에 수감 중인, 고문과 강제 자백으로 죄인이 되고 희망을 잃은 채 살고 있는 슬라히는 그들의 접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의 침묵을 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낸시와 테리와의 시간이 흐르면서, 슬라히는 아주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낸시와 테리의 설득과 진심으로 그는 마침내 재판에 임하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항소로 그로부터 7년을 더 수감되었고, 14년 2개월 만인 2016년 10월 17일에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석방될 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 홍보의 포인트는 조디 포스터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을 맡았다는 것이었고 명불허전의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보고 난 후의 인상과 여운이 가장 강렬한 인물은 실제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슬라히 그리고 그를 연기한 타하르 라힘이었다. 엔드크레딧과 함께 영화 속 실제 인물들의 쿠키영상이 보여졌는데, 몇 년 전 미국인 변호사와 결혼해 아들을 두었다는 슬라히의 모습은 그런 극한 상황을 통과한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밝고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밥 딜런의 "The Man in Me"를 부르는, 마침내 열린 재판에 화상으로 출석해 아랍어에서 자유와 용서는 한 단어라며 자신을 고문했던 이들을 용서한다고 말했던 그의 모습은 뭉클하고 인상적이었다. 고문 강제 시스템에 대한 분노 못지 않게 슬라히라는 한 인간의 숭고함에 대한 존경심이 크게 다가오는 영화였다. 


영화를 예매하고, 제목이 어디서 들어본 말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 찾아보고서야 '모리타니 사람'을 뜻하는 말이란 걸 알았다. 내가 세계 모든 국가명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영화에서 모리타니안인 슬라히가 당연히 모국어 혹은 식민통치국의 언어만을 구사할 것이라고 짐작한 미국인들과 다를 바 없다. 검색에 따르면 모리타니는 남대서양 그리고 모로코, 알제리, 말리, 세네갈과 국경을 접한 북서 아프리카의 아랍국가로 면적은 한반도의 4배가 넘고 인구는 500만 명이 채 안 되는 나라라고 한다.

 

영화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는데... 객석 중앙에 앉은 내 기준으로 전후좌우 삼각점에 앉은 중노년남녀 세 커플이 영화 상영 내내 떠들고 들락날락거리고 휴대폰빛으로 퍼포먼스를 벌여서 정말 거슬렸다. 안타깝게도 극장 출입구는 앞쪽이었고 그들이 왔다갔다 한 횟수는 도합 여섯 번, 최악의 동시다발 무례가 이어지는 관람 환경도 영화만큼이나 놀라워 적어둔다. 그럴 거면 대체 왜 극장에 오는 걸까, 통영에서 자주 겪는데 그럴 때마다 신기하고 짜증스럽다. 슬라히가 말한 자유와 용서를 여기에 적용할 필요는 없겠지.  


3/17 롯데시네마통영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