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와 후유증
2월의 마지막 이틀과 3월의 처음 이틀을 극명하게 대조적인 컨디션으로 보냈다. 뭉뚱그려져 흘러간 나흘이 꿈결처럼 느껴질 만큼.
2월 27일로 약속한 뒤 [어린 왕자] 속 여우의 마음으로 기다린 사촌이 오후 2시 넘어 도착했다. 창녕쯤에서 난 교통사고로 길이 막혀 예상보다 늦어졌고, 잠시 숨을 돌리고 함께 집을 나섰다. 흐린 날씨였고 바람도 좀 불었지만 수많은 갈매기들 사이에 오똑하니 홀로 있는 왜가리를 보며 운하해안로를 지나 해저터널을 걸었다. 건너온 맞은 편 미륵섬을 보며 여객선터미널까지 다시 운하해안로를 걷고, 강구안 골목에 자리잡은 백석 시들을 보고, 사촌이 궁금했다는 동피랑이교네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동피랑 마을의 벽화를 새단장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전부는 아니지만 메인로드라고 할 수 있는 곳들에는 처음 보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귀여운 바다 생물의 그림과 함께 고래, 해마 등의 이름으로 말장난을 한 시리즈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뭐야 싶다가 이어진 그림들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고 오랜만에 동포루에 올라 바라보는 강구안은 여전히 정감 어린 '호주머니 속 바다'였다. 내려오는 길 간판이 눈에 띄어 포지티브통영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부엌 패브릭 파티션에 걸어놓은 소품을 마음에 들어한 사촌을 위해 작년 5월에 구입했던 통제영 옆 가게에 갔는데 타로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쉬워하며 서문고개 쪽으로 서피랑에 가려고 길을 건넜는데 횡단보도 바로 앞 '포에티크'라는 간판을 보자 바로 그 집이라는 게 떠올랐다. 작은 가게일수록 힘들게 버티고 있을 요즘이라 많이 반가웠고, 사촌과 함께여서 낯가림도 잊고 사장님께 가게의 확장 이전을 축하드렸다. 사촌이 고른 몇 개의 소품을 선물하고 흔쾌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오는데 기분이 참 좋았다.
서피랑은 한적했지만 그래서 여유롭고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박경리 생가를 조용히 보고 "돌아와요 충무항에" 노래비를 보고 서포루에 올라 바람을 느끼다 보니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중섭의 작품 조형물이 있는 쪽으로 해서 중앙시장으로 내려왔다. 겨울 여행에서 제일 아쉬운 건 해가 짧다는 것, 27일의 일몰시간은 6시 20분이었다. 통영에 살지만 먹거리와는 별 일가견이 없는 터라 좀 꾸물대다가 지난해 책 모임 때 회를 샀던 곳에서 저녁으로 먹을 회와 멍게, 매운탕 거리 등을 사서 집으로 왔다.
사촌은 회랑 함께 마시자며 화이트와인을 챙겨 왔고, 평소 술을 먹으면 팔다리 등 관절이 아파 거의 안 마시지만 그날은 기분이 좋아 나도 조금 마셨다. 어렸을 때 함께 공연장에 가거나 좋아하는 노래들을 공유하곤 했었고, 사촌이 오기 며칠 전 <아카이브 K>라는 프로그램에서 '학전' 이야기를 한다며 톡을 보냈었다. 이런저런 cd와 lp를 들으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새벽이 됐고, 다음 날을 위해 잠자리에 든 게 3시. 하지만 오랜만에 들어간 술기운은 역시나 강렬했고 난 6시가 다 되어 겨우 잠이 들었다.
9시쯤 일어나 대충 준비를 하고 이번엔 사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순신 공원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아쉽게도 날이 흐려서 가슴까지 탁 트이는 전망을 마주할 순 없었고 잠시 데크길을 걷는 것으로 만족. 사촌이 궁금해 한 서피랑떡볶기집에 다행히 자리가 있어 떡볶이와 어묵을 먹고, 윤이상 기념관에 들렀다. 베를린하우스는 주말에는 열지 않아 기념관 2층과 공원을 둘러 보고, 박경리 기념관으로.
처음 혼자 왔을 때는 평일이어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작년에 지인과 왔을 때는 코로나19 때문에 휴관이어서 묘소에만 갔었는데, 일요일이어선지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전시품과 판넬들을 꼼꼼하게 보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리는데, 사람이 많기도 하고 하필 같은 공간의 한 무리가 눈치없이 떠드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을 피해 가며 사촌의 속도에 맞춰 대략 둘러보았다.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를 읽은 사촌이 꼭 보고 싶다는 곳이었는데, 자신들의 목소리가 꽤 방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듯한 그들 때문에 좀 아쉬웠다.
박경리 기념관을 나와 향한 곳은 봉평동, 전혁림 미술관과 봄날의 책방에 들러 구경을 하고 사촌과 나에게 책도 선물하며 기분 좋게 나왔는데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섯 시가 안 됐는데 벌써 하늘은 어둑했고, 연휴가 무색하게 봉평동은 그냥 일요일 저녁 같은 분위기였다. 사촌이 단백질보충식단을 알려준다며 사온 식재료와 전날 끓인 매운탕, 엄마가 보내준 반찬들이 냉장고에 가득하기도 해서, 저녁은 집에 가서 먹기로 하고 내성적살롱 호심의 커피와 쿠키로 봉평동 구경을 마쳤다.
봉평동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통영에서 처음 본 체인인 맞은 편의 비촌치킨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사촌이 치킨을 주문했다. 가게 주인이 직접 배달을 오신 건지 강아지가 함께였는데 무척 귀여웠다. 둘 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의 컨디션은 최상이어서 전날과 다름없이 이런저런 노래를 들어가며 수다를 떨었다. <아카이브 K> '동아기획' 편을 보기 위해 기어이 SBS 아이디를 찾아내 휴대폰으로 틀어 놓고, 소시적 스크랩북까지 꺼내 보며 그야말로 추억에 젖었다. 다음 날은 비 예보도 있고, 화요일 영업 준비를 위해 점심 즈음에는 대구로 출발해야 하는 사촌의 일정을 감안해 느긋하게 늦잠 자고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잠자리에 든 건 역시나 새벽 3시가 넘어서였는데, 단지 속이 미식거려 눈이 떠졌고 아침 8시였다. 다시 잠들기엔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사촌이 깰까봐 나름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미식거림과 어지러움은 더해가고 몸이 으슬으슬했다. 십수 년 전 지리산 둘레길 여행에서 이렇게 죽나 싶었던 토사곽란을 경험한 적 있었는데, 강도는 그에 비할 바 아니었지만 명백히 그러한 증상. 맛있는 밥을 함께 먹고 배웅하고 싶었지만, 사촌의 상비약을 얻어 먹고 손을 따도 앉아 있기가 힘든 상태였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기진해졌다. 미안하게도 사촌은 자기가 만들어 온 빵으로 혼자 아점을 챙겨먹고 대구로 떠났고, 나는 겨우 배웅하고 돌아와 토하기를 반복하다가 쓰러져 잤다.
밤에 잠시 깼지만 미식거림과 어지러움이 가라앉지 않았고 냉장고의 매실청이 떠올라 마시니 그나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지만 무언가를 먹을 수는 없었다. 다행스럽게 잠은 왔고, 몽롱한 채로 또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나서 목이 마르면 매실청을 탄 따뜻한 물을 마시고 몸살기운이 밀려와 애드빌을 먹고 또 잤다. 계속 굶었는데도 희한하게 배는 안 고프고 그렇게 잤는데도 애드빌의 기운을 빌면 또 잠이 오는 게 고마웠다. 이틀을 비몽사몽 앓고 나니 오늘에서야 좀 괜찮아졌는데, 사촌도 집에 도착하니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어제는 가게 일찍 마무리하고 쉬었다고 한다.
잠 제대로 못자고 낮에는 바쁘게 돌아다니고 새벽까지 떠드는 반복이기는 했지만, 겨우 이틀이었는데... 나이 먹어 그런가 싶어 서글프기도 하고 어쨌거나 낫고 나니 어이없기도 하다. 안 먹던 술과 그로 인한 통증과 불면이 직접적인 원인이기는 하겠고, 이틀간 굶으면서 계속 잤더니 나아진 건 다행이지만. 주로 혼자 있다가 누구 왔다고 마음이 좀 들뜬 건 사실이지만, 몸이 이렇게나 안 받쳐주다니. 앞으로 누구 올 때마다 이런 식이라면 스스로 무척 한심할 것 같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수련(?)을 해야겠다.
아무려나 사촌과 함께한 시간은 참 좋았고, 1년 반 만에 대구를 벗어난 사촌도 재밌었다고 말해줘서 더욱 좋았다. 엄마와는 기질과 성정이 다른 작은 이모의 응원과 은근한 지지도 반가웠고, 무엇보다 멀리 떨어져 혼자 있는 딸이 불가해하고 안타깝기만 한 엄마에게도 잠시나마 기쁜 일이 되었던 것 같아 다행이다. 예쁘다를 연발하며 사진 찍는 사촌을 흐믓하게 바라보느라 나는 찍은 사진이 별로 없지만, 멋지고 예쁜 것들을 누군가와 함께 바라보며... 내가 찍는 사진 따위는 눈으로 보는 걸 따라갈 수 없다는 걸 다시 깨달았으니 별로 아쉽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