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족을 태운 차 두 대가 인가들을 지나쳐 도로 위를 달린다. 도착한 곳은 황무지처럼 보인다. 인적 없이 고요한 땅 한 쪽에 컨테이너가 길게 늘어서 있다. 큰 바퀴가 달려 어른도 단번에 오르기 힘든 컨테이너, 실내는 낡고 어둠침침하다. 아내의 얼굴은 내내 경직되어 있고 하고픈 말과 화를 애써 참고 있는 표정이다.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도 애써 활달함을 가장하는 남편, 그리고 멋모르고 바퀴 달린 차를 반기는 어린 소년과 누나가 함께다.
제이콥과 모니카, 앤과 데이빗.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 온 지 10년이 넘었고, 조금 전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의 시골로 먼 길을 왔다.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며 힘들게 번 돈은 수중에 얼마 남아 있지 않고, 그들이 찾아온 새 집은 누추하고 허름하다. 제이콥은 가족들에게 뭔가 제대로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모니카는 심장이 약한 데이빗의 건강이 제일 걱정이다. 제이콥은 대거 몰려오는 한국인 이민자들을 상대로 한국의 채소를 재배해 팔 계획이고, 버려진 듯 보이지만 기름진 이 땅에서 성공하고 싶다. 모니카는 데이빗에게 이상신호가 올 때 바로 달려갈 수 있는 병원이 없고, 가족만 외떨어져 외롭고도 불안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아칸소행이 영 마뜩지 않다.
엎친 데 덮치듯 짐도 채 풀지 않은 집에 토네이도가 몰아친다. 컨테이너가 흔들리고 이따금 전등도, 관련 뉴스를 보려고 틀어놓은 텔레비전도 꺼졌다 커졌다 한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극과 극을 달리는 부부의 마음처럼, 이들이 갓 옮겨온 새 보금자리도 위태롭다. 결국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는 부부를 향해, 남매는 날개에 "Don't Fight!"라고 적은 종이비행기를 날려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서로를 구해주자고 미국으로 건너와 맨몸으로 견뎌낸 10년, 부부의 '아메리칸 드림'은 멀고도 멀어 보인다.
날이 개인 아침, 전날의 싸움을 기억하는 남매와 달리 모니카의 얼굴은 평온하다. 캘리포니아와 아칸소 만큼 멀었던 부부의 마음은 한국에 있는 모니카의 엄마 순자를 초청해 아이들을 맡기며 함께 사는 것으로 극적인 화해를 이뤘다.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의 병아리 부화장으로 출근해 일을 시작한다. 베테랑 병아리 감별사인 제이콥은 부화장에서 남다른 속도로 일을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의 '가든'(이라고 했지만 혼자 감당하기엔 규모가 큰 농장) 가꾸는 일을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땅을 농장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은 아득하다. 흙은 좋지만 물은 없는 곳, 농기계도 물도 인부도 귀한 곳에서 농장을 일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돈이다. 제법 전도유망한 사업가처럼 덜컥 빚을 내고 원대한 계획에 취한 제이콥에게 믿을 것은 제 몸뚱아리뿐, 하지만 다행히 가까이에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으니 바로 폴 아저씨다.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는 폴은 농기계로 제이콥의 땅 개간을 돕고,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엑소시즘을 발휘해 땅의 나쁜 기운을 쫓아주고 제이콥의 입에서 "Enough"가 나올 때까지 유난스럽지만 진심을 다해 가족의 일을 축복한다.
그리고 순자가 왔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를 잃은 모니카가 마음껏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고춧가루며 멸치며 병을 앓는 손자에게 달여먹일 한약에 딸네의 궁핍한 살림에 보탤 두툼한 돈봉투까지(심지어 미나리씨앗에 화투까지), 아낌없이 싸들고 온 순자는 여느 할머니와는 조금 다르다. 어린 데이빗의 눈에는 쿠키도 구울 줄 모르고 영어도 못해서 그렇지만, 손주들에게 화투를 가르치며 "지랄"이며 "옌병"이란 말을 무시로 내뱉고 손주들 몫의 '산에서 온 이슬물'을 거리낌없이 마셔대는 모습도 그렇다.
무엇보다 눈에 띄게 다른 점은 모든 게 낯설기만 할 일상에서 생기를 잃지 않고 유쾌하게, 그러나 연륜의 깊이를 발휘하며 적응해가는 모습이다. 순자는 영어로 중계되는 레슬링에 집중하며 선수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어렵게 번 돈으로 낸 딸의 헌금을 슬쩍 다시 집어오고, 자신을 밀어내며 심하게 골탕 먹이는 손자에게 하염없이 너른 품을 내어주고, 사위는 출입을 금지한 곳까지 손주들과 산책을 가서 미나리 씨앗을 뿌리고, 아들의 병에 전전긍긍하며 불안을 전이시키는 딸과 손자를 부드럽고 강인하게 보듬는다.
순자의 합류는 가족들의 일상에 어느 정도 안정감을 선사한다. 부부는 안심하고 병아리 부화장에 일을 하러 갈 수 있게 되었고, 뭔가 마땅치 않아 하며 무시하는 기색을 자주 보이지만 남매는 어른이 있는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는 말이 순자가 완벽한 베이비시터 역할을 하는 할머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지만). 폴과 함께 농장을 개간하는 제이콥에게 창 너머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모니카에게는, 고개를 돌리면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순자가 이들에게 기댈 언덕이 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늘나라 운운하던 엄마의 기도와 걱정을 자신의 병과 연결시키며 밤이면 남모르게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을지 모를, 곧잘 이불에 오줌을 쌌던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를 데이빗은 어느날 침대와 바닥에 나란히 누운 할머니에게 "나 죽기 싫어요"라고 고백한다. 너무나 짠한, 연약하고 어린 아이의 그 말에 순자는 데이빗을 안아 달래며 함께 잠을 청한다. 모처럼 안온한 잠에 들었을지 모를 데이빗과 달리 순자는 다음 날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아 눕는다. 자식을 도우러 온 곳에서 병을 얻고 헛것을 보며 거동도 불편해진 순자는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말도 움직임도 어눌해져 많은 게 마음 같지 않다.
폴과 함께 이런저런 어려움을 헤쳐온 제이콥의 농장은 어렵사리 작물 재배에 성공했다. 순자가 건넨 돈봉투를 들고 데이빗의 검진을 위해 병원에 가는 날, 제이콥은 마침내 수확한 커다란 농작물 패키지를 샘플로 챙기고 거래처를 뚫을 의욕에 넘쳐 있다. 다행히 의사는 데이빗의 심장 상태가 좋아졌다며 지금 하는 것처럼만 계속하면 된다는 말을 전하고, 병원을 나와 찾아간 한국인 가게에서는 어렵지 않게 거래가 성사된다.
그간의 고생에 보답을 받은 양 감격에 겨운 제이콥, 그러나 돈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여서 행복하기를 바랐던 모니카는 결국 눈물을 보인다. 순자와 아이들과 함께 아칸소를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모니카에게는 데이빗의 병원행보다 농작물 거래가 우선인 듯한 제이콥의 행동 자체가 상처였고, 가족이 서로 힘이 되어주며 함께하는 것보다 성공에 집착하는 모습이 서운했을지 모른다. 집안에 혼자 남겨진 순자는 무어라도 도움이 되려고 움직일 수 있는 한 팔로 쓰레기를 모아 양철통에 태운다. 부는 바람에 불씨가 날리지만 빤히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고, 가까이의 농작물 창고로 옮겨 붙은 불은 사그라들 줄 모른다.
어둠이 내린 시골 마을로 진입하던 차 안의 가족에게 매캐한 연기가 먼저 닿는다. 동상이몽을 확인했지만 어쩌면 이제 제대로 시작해볼 만한 상황에 겨우 이르렀는데, 그 작은 결실이 들어찬 창고에는 무서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불길을 잡기 위해 끌어올 수 있는 물은 없고, 부부는 가스와 연기를 헤치며 그나마 구해낼 수 있는 채소를 불길 속에서 건져내지만 역부족이다. 망연자실한 순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터덜터덜 걸어가고, 그 모습을 본 남매는 집 반대 방향(아마도 물이 있는 미나리밭)으로 가는 할머니를 부르며 뒤따른다. 넋을 놓은 순자에게 뛰어가 앞을 가로 막은 데이빗은 말한다. "할머니 가지 마세요. 우리랑 같이 집에 가요."
창고가 불에 탄 다음 날, 네 가족은 거실에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자의 시선은 망연하다. 황무지를 일구기 위해 농장에서 쓸 우물파기를 알아보고 돈 대신 머리를 쓰기로 했던 제이콥은, 이제 제대로 우물 팔 자리를 정한다. 다시 시작해보고자 도착한 곳에서 일궜던 작은 성공은 순식간에 무로 돌아갔고, 순자가 뿌린 씨앗에서 자란 미나리들만이 온전하고 무성하게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 가족의 한 시기를 다루는 영화는 간결한 연출과 압축적인 서사로 인물과 관계, 사건을 부각시킨다. 가족들의 전사는 몇 마디의 대사들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이들이 겪었을 문화적 차이나 인종 차별 같은 문제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인물의 감정과 행동에 집중하면서 그에 따른 관계의 변화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덕분에, 리드미컬한 호흡은 아니지만 지루하지 않았고 차분하게 응시하며 공감할 수 있었다.
주인공 가족들 모두의 연기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폴의 존재와 연기가 인상 깊었다. 때로 뜬금없는 퇴마와 주술을 선보이고, 주일마다 정말 십자가를 지고 고행하는, 동네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조롱받으면서도 이웃에게 지극한 선의를 베풀고 끊임없이 격려를 전하는 사람. 한국전쟁 참전 말고는 아무 정보가 없는 캐릭터지만 그 연기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가 광기와 영성의 경계에 선 힘없는 구원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처음 알게 되었지만, 윌 패튼이라는 배우의 생생한 연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새롭게 구축하는 '태초'의 이야기를 닮았다. 물과 불, 흙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었고, (공기까지 더해지면) 세상을 구성하는 4원소와 대결하며 삶을 일구려는 인간의 안간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거의 모든 것을 개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에 처한 가족에게, 기술과 문명의 발전으로 이미 대상화된 자연은 다른 위상으로 전환된다. 특히 물과 불은 가족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어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힘으로 상징화된 것 같았고, 영화와 인물들이 심령을 대하는 태도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느껴졌다.
데이빗이 교회에서 만난 친구 엄마의 남자친구를 통해 지나가듯 언급되는, 그 집에 배인 불길한 기운. 폴이 진심으로 엑소시즘을 시전하고 신앙이 깊은 모니카가 순자가 헛것을 보았던 곳을 알려주며 퇴마의식을 지켜보는 것은 미신에 의지하는 어리석음이기보다 간절함의 발로였다. 인간사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있고 그 빈 곳을 메우고자 하는 노력과 마음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 영화는 그 불가해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가족을 통해 보여주면서, 누구나 가진 믿음과 바람에 보편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집과 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폐기'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도전으로 제이콥은 그 집을 선택했고, 그래서 더욱 집요하게 성공에 매달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제이콥의 모습은 그 시절 새로운 삶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 맨몸으로 현실의 벽을 넘고자 애썼던 무수한 '가장'들의 슬픈 군상인지도 모르겠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는데, 인물과 카메라는 적절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고 태도는 담담하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끌어올린 구체성은 감성적인 향수에 매몰되지 않고, 한 가족에 깊이 천착한 이야기는 그 시대와 집단에 속한 이들의 보편적인 정서를 소환한다. 설명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정제된 연출이 당대와 현재를 꿰뚫는 경험자의 자신감인 것 같기도 하고 그 모두를 돌아보는 어떤 회고담으로 상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까 싶기도 했다.
영화에는 화자로 특정할 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지만, 자전적인 이야기여서 가능한 이중의 시선이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주관적인 기억과 객관적인 거리가 결합한 절제된 연출이라고 편하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담담함이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원더풀한' 영화였다.
3/4 롯데시네마통영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