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

[베르네 부인의 장미정원]

나어릴때 2022. 6. 11. 23:5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매년 열리는 바가텔 장미 콩쿠르, 갈수록 악화되는 농장 사정으로 베르네 부인은 올해 부스를 신청하지 못했다. 유일한 직원 베라와 함께 소소하게 챙겨온 장미들을 나르고 동업자들과 인사하는 베르네 부인의 안색이 편치 않다. 베르네 부인은 극단의 상업화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라마르젤을 마주치는 것도 그가 박람회장에 설치한 거대한 돔형 온실도 거슬린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일구고 물려준 농장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베르네 부인은, 장미 품종을 싹쓸이하고 공장형 재배로 시장을 장악한 라마르젤 같은 사업가들에 밀려 한계 상황에 몰렸다. 원예사로서의 자존심과 철학을 지키며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주문이 취소되고 거래처가 하나둘 끊어지고 갚지 못한 돈 때문에 농기계들이 압류되는 중이다.

 

장미 콩쿠르에서 쓴 입맛만 다시고 돌아온 베르네 부인의 농장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온다. 고용 여력이 없는 상황을 고려해 베라가 보호소 교화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보호관찰인들을 노동자로 신청한 것, 장미에 대한 관심도 가꿔본 경험도 없는 이들이 달갑지 않지만 베르네 부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각자의 사정으로 안정적인 일과 사업주의 좋은 평가가 필요한 나데주와 사미르와 프레드 역시 마찬가지다. 어눌한 초보들은 시작부터 이런저런 사고를 치지만, 장미에 대한 열정에 기인한 까칠함을 제외하면 편견 없는 태도로 원예에 대해 가르쳐주는 베르네 부인과 세 사람의 호흡은 나쁘지 않다.

 

시장을 석권하고 그 자금력으로 희귀 품종을 독점한 라마르젤은 몇 년째 콩쿠르 우승을 독식하고 있다. 베르네 부인의 명성과 역량을 잘 아는 그는 끈질기게 영입과 농장 인수를 제안하고 있지만, 폐업을 하는 한이 있어도 그저 장사꾼에 불과한 라마르젤과 손잡을 수 없다는 게 베르네 부인의 생각이다. 어떻게든 버티며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 장미 콩쿠르에서 우승할 수 있다면 기사회생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벼랑 끝 와신상담 중이던 베르네 부인에게 세 사람은 의외의 지원군이 된다. 속내를 감추고 라마르젤의 장미 공장을 방문해 희귀 품종 장미의 존재와 위치를 확인한 베르네 부인은 자신의 거친 생각을 세 사람과 공유한다. 종신 고용 혹은 향후의 지분 등을 약속으로, 베라에게까지 비밀에 부친 계획에 합의한 네 사람은 어설픈 운명공동체가 된다.

 

야심한 밤, 라마르젤의 장미 공장에 도착한 일행은 작전대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나데주와 사미르가 길을 잃은 척하며 경비노동자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시간을 버는 동안, 베르네 부인과 프레드가 희귀 품종 장미가 있는 구역에 잠입한다. 보안시스템 해제 기술은 물론, 교육 중 우연히 발견된 타고난 후각 재능에 힘입어 프레드는 현장에서 베르네 부인을 리드하며 목표했던 장미를 빼내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각자의 사정과 욕망이 맞아떨어져 공범이 된 네 사람은 이전보다 조금 더 결속되고, 그저 일자리가 필요했던 이들의 농장에 대한 소속감과 장미에 대한 관심이 고양되기 시작한다. 베르네 부인은 출입 금지였던 비밀 공간을 열어 접붙이기 기술을 시연하고, 세 사람은 서툰 솜씨나마 성의를 다해 장미 원예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훔쳐온 희귀 장미로 새로운 장미 품종을 개발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개화하기 전까지는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다. 마지막 선택에 희망을 걸고 집안의 고가구들까지 처분하며 버티고 있지만 고질화된 자금난으로 다음 해 콩쿠르까지 농장이 유지될지 불투명하다. 어느덧 같은 처지가 된 다섯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움직인다. 주문 취소된 수백 개의 장미 화분을 가가호호 방문해 판매하고, 발상을 전환해 장례식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하얀 장미를 새로운 마케팅과 스토리로 판매하며 작은 성공을 일군다. 장미 원예에 대해서는 베테랑이지만 모든 것을 혼자 헤쳐갈 수는 없었던 베르네 부인에게, 세 사람은 다른 시각과 새로운 도전을 제안하고 성실히 움직이는 든든한 동료들로 거듭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농장 사람들은 각기 성장한다. 서로에 대해 몰랐던 부분들을 알게 되며 관계 역시 변화하고 깊어진다. 소극적이고 주눅들어있던 나데주의 태도가 조금씩 적극적으로 바뀌고,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마련하는 것만이 지상 목표였던 사미르에게 장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프레드에게 찾아온다. 조금은 불량하고 냉소적으로 보였던 스무 살 청년에게는 14살에 자신의 양육권을 포기한, 여전히 그의 연락을 피하며 외면하는 부모가 있었다. 성장기를 외롭게 떠돌며 보냈을 그는 부모와 세상으로부터의 상처를 무심한 태도로 견디며 자신의 삶과 미래에도 심드렁해졌을지 모른다. 비록 재능을 확인한 첫 무대는 범죄 현장이었지만, 누구도 몰랐던 탁월한 후각을 알아채고 확신한 베르네 부인은 츤데레 같은 관심으로 프레드에게 따스함과 믿음을 전한다.

 

일년 가까이 고락을 함께하며 다섯 사람은 제법 괜찮은 팀이 되었지만, 고대했던 접붙이기 결과는 실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5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베르네 부인은 결국 폐업을 택한다. 장미를 공산품 취급하는 시장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대신 아름다움의 진정한 가치에 삶을 건 장인정신을 택한 결과이기도 하다. 베르네 부인은 자신을 제외한 네 사람의 고용을 보장하는 것으로 장미정원의 역사를 마감하기로 결정한다. 전대 사장의 당부를 잊지 않고 베르네 부인의 곁에 남아 의리를 지켰던 베라, 장미정원에 마지막 활기를 불어넣으며 새롭게 자신을 발견한 나데주와 사미르와 프레드 모두 착잡하다.

 

현실을 인정하고 담담하게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베르네 부인, 그 시각 아쉬움에 농장을 살펴보던 나데주의 눈에 기적처럼 새로운 장미가 발견된다. 베르네 부인의 가르침을 따라 홀로 시도해봤던 접붙이기가 아무도 모르게 성공해 온실 밖에서 개화한 것이다. 다급히 장미를 캐내어 베르네 부인에게 가져가는 세 사람, 그리고 영화는 뻔하지만 기분 좋은 반전의 결말을 맞는다. 별로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베르네 부인의 제안으로 후각 테스트를 응했던 프레드는 전문적인 조향사 교육을 받기 위해 장미정원을 떠나고, 그가 보낸 편지를 읽는 베르네 부인의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마지막으로 "나의 어머니께"라는 자막이 나왔는데, 감독의 개인사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다. 어느 기사에서는 프레드의 편지 첫 구절 자막으로 설명했던데,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약간 갸우뚱. 

 

 

단지 시간이 맞아서 선택했는데, 기대가 없어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참 좋아서 보는 동안도 보고 난 뒤에도 기분이 좋았다. 장미 1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간단한 소개로 예상되는 이야기가 너무 예상 가능한 느낌이어서, 소재는 다르지만 뭔가 [와인 패밀리]스러우면 어쩌나 하는 불길함도 있었는데 기우였다. 장미가 소재이자 주제로 다뤄지지만 모르는 입장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나 대립구도나 서사의 전개 등이 꽤 전형적임에도 식상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배우들의 연기력 그리고 베르네 부인 아버지의 이야기나 주요 인물들의 전사 등에 대해 욕심 부리지 않은 연출과 속도감 있는 편집 덕분인 것 같다.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영화였고, 중간에 힙합 음악에 맞춘 장면들은 의외로 잘 어울리면서 경쾌한 리듬감을 더한 것 같다. 

 

서로 다른 장미들이 접목되어 이전에 없던 색과 향에 건강한 생장력까지 갖춘 새로운 아름다움이 태어나는 것처럼, 베르네 부인의 장미정원에서 만난 사람들도 서로 접목되며 새로워진다. 접목된 장미가 새로운 꽃을 피울 때까지 긴 기다림과 돌봄이 필요하듯이, 새로운 사람들이 만나 벌어지는 실수와 좌충우돌과 분투와 인내 역시 함께 겪어야 할 일들이다. "인생에 아름다움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한국 포스터 발문으로 쓰인 베르네 부인의 말처럼 말이다. 14살에 버려진 프레드가 청년이 되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 부모의 집에 찾아가 장미꽃다발을 건네며 기다림과 돌봄에 대해 말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장미와 인생사를 엮어 심오한 의미 부여도 할 만한 이야기들이었는데, 대사나 장면에 부러 힘주지 않은 듯한 단정하고 쿨한 영화여서 더 여운이 남았다. 

 

프레드를 연기한 마넬 풀고(Manel Foulgoc)라는 배우는 처음 보았는데 주름진 미간과 깊은 눈, 날렵한 콧날 덕에 보면서 이따금 리버 피닉스가 떠오르기도 했다(지병입니다). 어딘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쓸쓸한 분위기에 추레한 옷차림, 어려서 부모에게 버려진 상처를 분노 대신 안쓰러운 갈망으로 안고 있는 캐릭터라는 점 때문에 괜히 마이크와 겹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잘 생겼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농장 사람들이 장미를 파는 장면 중 프레드가 영어로 현대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은 게 잠시 눈길을 끌었다. 외국 영화에서 가끔 한국산의 무언가가 가시적으로 등장하는 걸 목격하는데 큰 의미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소품이나 의상 담당자의 선택의 결과일 거라 생각하면 약간 궁금해진다(아무 의미 없는 거면 패스). 


6/10 cgv서면 임권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