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MBC 뉴스 이용마입니다"라는 부제, 'MBC 해직기자 이용마가 두 아들에게 들려주는 삶과 꿈'이라는 뒤표지의 담담한 설명이 붙었다. 복막암 말기, 12~16개월이 남았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저자가 9살 된 쌍둥이 아들이 스무 살이 되면 읽기를 바라며 정리한 기록이다.
1969년 남원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자라고 1987년 서울에서 대학생이 되어 시대의 격변과 마주하며 접한 인생 최대의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잊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온 언론인, 2012년 170일 간의 파업으로 해직기자가 되고 전공이었던 정치학을 공부하며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데 기여하고자 했던 저자는 49세에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피골이 상접한, 그러나 맑고 견결해보이는 얼굴이 담긴 인터뷰를 나도 읽었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새 정부가 출범하고 그동안 권력에 장악됐던 언론개혁이 진행되는 시기, 그의 투병소식이 널리 알려졌고 나 역시 길지 않은 인터뷰를 통해 과거 뉴스에서 분명 접했을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87년 6월항쟁 당시 정치학과 신입생이었던 저자는 주변에서 주입된 '선배들의 의식화'를 경계하면서도 자신이 미처 몰랐던 세계에 대해 학습하고 실천으로 개입하며 맹목적으로 꿈꿔왔던 입신양명의 꿈, 관료라는 희망직업 대신 언론사를 택한다. 소위 운동권 학생이기도 했지만 섣불리 '주의'에 매몰되기보다는 공부하고 분석하고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신중하고 성실한 모범생, 자신이 서있는 현실에서 부당함을 거부하고 바른 것을 좇을 줄 아는 용기와 정직함을 가진 기자로 그는 살아온 것 같다.
개인과 사회가 나란히 겹치는 약 50년 간의 기록, 흡사 포레스트 검프처럼 그가 걸어온 길에는 시대의 상징이 되는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고 부패한 한국사회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창이 펼쳐졌다. 경쟁이 만연한 시대를 '승자'로서 통과하며 얼마든지 '기득권층'으로의 편입이 가능한 조건에 있으면서도 그는, 사람은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누구든 인간적인 삶을 누려야 한다는 소박하지만 용도폐기된 듯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며 살아온 것 같다.
언론인으로서 제대로 된 뉴스를 전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은 수 차례의 축출을 불러왔지만 떨려난 자신의 자리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뤄내는 일을 반복했고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권력장에서 그의 존재는 미운 털이 박힌 다루기 힘든 사람 정도로 굳어진 듯 하다. 경찰과 검찰, 국회와 정부부처 등을 출입하며 한국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쉼없이 저항하며 개혁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골몰해 온 기자, 권력의 입맛과 대중의 관심에만 매몰되어 제대로 된 보도는 뒷전인 채 과거의 인습을 답습하는 방송사의 행태에 대한 언론인으로서의 고민이 책 속에 가득 담겨 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삶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제 조금이나마 변화의 희망을 기대할 법한 순간에 시한부를 알려왔음에도, 자신의 부재를 전제로 두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자기연민 없이 담백하다. 감당하지도 못할 거창한 신념이나 구호가 아니라 자신이 선 자리에서 스스로의 노력과 선택을 통해 세상의 변화에 기여하고자 살아왔던, 그 길에서 덮쳐올 불이익이나 고통을 기꺼이 짊어지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저 높이의 몇 사람이 아니라 각자 빛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기 몫으로 모두가 인간답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었던, 그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됐다. 그리고 책은 어찌 보면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가치를 향해 외유내강의 삶을 살아온 자만이 풀어낼 수 있는 독보적인 경험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개인을 경쟁으로 내몰고 마주보기를 차단하는 지배질서 속에서도 모르는 사이 서로 돕고 빚지며 살아가는 세상과 인간사의 당연한 이치, 책 한 권으로 얼마나 알 수 있을까만은 이용마라는 사람의 존재를 통해 새삼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생과 사는 운명의 소관이라 믿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은, 분명 말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책장을 덮으며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그가 정말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 살아가며 스무 살이 된 아들들과 함께 이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이용마
2017.10.27초판1쇄 11.17초판6쇄 발행, (주)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