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

약간 새 출발 여행

나어릴때 2022. 2. 16. 10:47

 

 

5년 만에 여수에서 만난 A, B와 함께 통영으로 왔다. 이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B가 단체 대표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좋아하는 곳에서 마음 편히 살겠다고 내려온 상팔자로서 괜히 미안하고 혹시 심각한 사정이 있나 싶어 전화를 했었다.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걱정했던 것보다는 다행인 상황이었고, 너무 멀기는 하지만 언제라도 며칠 쉬고 싶으면 내려오라고 숙식은 제공하겠다는 안 빈말을 전한 게 마지막 연락이었다. 부산의 A는 이주 후 가장 여러 차례 집에 온 지인이고 한 달 전에도 만났지만 셋이 함께는 오랜만이어서 색다른 느낌이었다. 통영으로 오는 길에 이미 날이 저물어 2월 11일은 저녁 먹고 수다 떠는 것으로 끝. 다음 날은 온전히 여유로운 하루였는데 둘 다 딱히 원하는 바가 없어 본의 아니게 가이드 행세를 하였고, A의 차 덕분에 여기저기 다니며 아주 꽉 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느긋한 오전을 보내고 나간 곳은 서피랑, 십 년 전쯤 반나절 둘러본 게 전부라는 B에게 통영은 동피랑의 복작거림과 케이블카의 오랜 줄로 기억되는 듯했고 여수랑 비슷한데 좀 더 작은 바닷가 도시인 것 같았다. 내가 느끼는 매력을 강권할 수는 없지만 먼 길 온 그에게 모르는 통영을 선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서피랑이 첫 행선지가 된 이유는 A와 B의 배려였다. 물론 좋은 곳이므로 흔쾌히 향했고 가벼운 경사로 이어지는 공원을 걸어 "돌아와요 충무항에" 노래비를 보며 여수 출입국 앞에 세워질 기념비 이야기를 나누고 서포루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리고 관광객처럼 음악계단 쪽으로 내려왔다. 거의 모든 것이 좋았으나 농장(?)의 사슴들을 직접 보고는 마음이 좀 안 좋아졌고, 예전에 본 적 있었는지도 가물하지만 좁은 복도 같은 평지와 가파른 경사지로 이루어진 그곳에서 사슴들이 살아가는 게 괜찮은 것인지 의아해졌다.

모두 비슷한 마음이어서 민원을 넣자는 둥의 말이 나왔지만 당장 어찌할 수 없으므로 털어버리고, 서피랑을 택한 진짜 이유를 떠올리며 적십자병원 뒤쪽에서 백석 시비까지 이어진 길을 걸으면서 거리의 가게들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로서는 고맙고도 연대감에 겨운 잠시, 미처 몰랐던 곳에 붙은 안내문을 사진 찍으며 머지 않아 마련할 새로운 공간이 여기가 된다면, 오늘을 기억하리라 생각했다. 나만 하던 일이지만 의기양양하게 두 지인과 함께 백석시비에 인사를 드리고 명정샘에도 들르니 계획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다음 행선지는 달아항, 2시 10분에 출발하는 학림도행 배를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느긋하던 걸음을 재촉하며 주차장까지의 오르막길을 경보하듯 걸어야 했다. 내비가 알려주는 도착 예정 시각이 2시를 넘은 상황이어서 배를 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작고 좁은 통영이라지만 서피랑에서 산양읍 남단의 달아항까지는 25분쯤 걸렸고 차 안에서 신분증을 미리 걷어 도착하자마자 뛰듯이 매표소로 가야했다. 승선명부를 급히 작성하고 다음부터는 조금 일찍 오시라는 친절한 안내에 송구스러워하며 배에 올랐는데, 우리가 타자마자 배가 출발했고 2시 7분이었다. 정원 40명의 작은 배지만 정시가 되기 전에 출발할 줄은 몰랐는데, 학림도 송도 저도 연화도 만지도 다섯 군데 섬을 도는 섬나들이호는 마을버스 같았다. 십 분 걸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진한 사투리의 선장님 안내 방송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해 학림도를 그냥 지나쳤고, 놀라서 갑판의 관계자분께 여쭤보니 다른 섬들 돌고 마지막에 다시 들르니 구경하다가 그때 내리면 된다고 하셨다. 덕분에 오랜만에 탄 배를 적당히 즐기고 학림도에 닿았다.

 

 


주말이지만 오후여선지 섬은 한산했다. 안내판을 보고 대략의 트래킹 코스를 정하고 걷다 보니 섬을 전세라도 낸 것 같은 기분, 고요하고 여유롭고 청량한 기운이 그만이었다. 선착장 주변은 잘 정돈되어 있고 왼편으로 폐교를 개조한 예술가 레지던시와 몇 군데의 식당과 펜션 그리고 해송숲공원으로 가는 오솔길이 이어졌다. 해송숲공원에서 전망대까지는 금방인 것 같아서 먼저 해안도로를 돌아보기로 했다. 한적한 해안도로와 다른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바다, 드문드문 낚시 중인 이들이 보이고 '고래개능선' 산행길의 시작점을 알리는 바닥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산행은 예정에 없었으므로 계속 걸었는데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얹혀진 그네에 이어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집이 나왔다. 마침 하얀 집 마당에 누군가 계셔서 해안도로 끝까지 가면 돌아서 전망대까지 길이 있는지를 여쭸는데, 울타리 앞 작업대에서 분주히 뭔가 하시던 그분께서는 산에 갔다가 마침 좋은 칡을 캐왔다며 잘라서 건네주셨다. 칡이라, 내게는 이원재의 노래로나 익숙한 것이었는데, 아무려나 무척 자연스럽게 그러나 반가운 호의를 잔뜩 얹어 건네주시는 걸 마다할 수 없어, 난생처음 칡을 씹어보았다.

 

 

덕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해안도로 바닥의 산행길 안내 글씨도 지나쳐온 그네도 그분의 작품이었고 돌아나가는 길 역시 조금만 더 가면 안내판이 나오는데 가서 보면 알 수 있다며 유쾌하게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해주셨다. 내릴 때 갑판 관계자분께서  4시 40분까지(티켓에는 16:30이라고 찍혀 있었지만) 선착장에 나와 있으면 배가 선다고 하셨는데, 마지막 배를 타기까지 시간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선착장의 대략적인 안내도로 알 수 없었던 부분이 해결되어 감사 인사를 드리고 그분의 안내판을 기점으로 섬 반대편으로 간다고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한 산행이 되었다. 몇 년 전 우도와 속초 여행에서 전에는 몰랐던 고소공포증을 실감한 나로서는, 중간중간 느슨한 로프가 매어져 있기는 했지만 한쪽이 벼랑과 바다인 좁은 산길을 걷는 일이 무척 고역이었다. 소시적 산악부 출신 A가 앞장서며 길을 개척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기거나 눕다시피 하면서 천근 같은 한 발을 겨우 옮기며 최고의 쭈구리 같은 모습을 둘에게 보이고 말았다.


오르락내리락하며 목도하는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비슷한 지형의 욕지도에는 있었던 데크길이 여기에는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고, 그렇게 삼십 여 분의 느닷없는 산행 끝에 다시 마주 친 해안도로의 바닥 글씨는 얼마 전 여유롭게 걸으며 지나칠 때와는 사뭇 다르게 보였다. 예정에 없던 산행으로 땀벅벅이 되어 평지의 안정감에 감읍하며, 전망대는 포기했지만 그보다 더 엄청난 풍경을 보았다고 합의하며 선착장으로 향했다. 4시 40분에 도착해 나머지 섬들을 돌아 달아항으로 간다던 우리의 섬나들이호는 5시가 다 되어 들어오셨는데, 배를 기다리는 다른 일행 덕에 불안감을 덜 수 있었고 이전의 안내와 달리 달아항으로 직행하셔서 더욱 좋았다. 두 번째여선지 선장님의 덕담 가득한 안내 방송이 잘 들렸고 덕분에 뭔가 벅차고 흔쾌한 마음으로 조타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기쁘게 배에서 내렸다. 3시간 동안 다른 세상에 다녀온 느낌이었고, 나만의 감정은 아닌 듯했다. 누군가 오면 꼭 섬에 가겠어, 다시 한 번 다짐(!)했다.

 

 

 

해가 지기까지는 1시간 남짓, 달아공원의 석양이 유명하지만 날이 흐리기도 했고 주말에는 넓지 않은 전망대에 몰려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통영은 섬들이 많아 일출도 일몰도 수평선 기준으로 보기는 어렵기도 해서, 당포성지로 향했다. 몇 년 전 여행에서 발견하고 이후 몇 번 갈 때마다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곳이고, 한 달 살 때 A에게 소개해주려다 길을 잘못 들어 실패한 적도 있으니 이번에는 함께 가면 좋겠다 싶었다. 주말이어선지 우리만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고즈넉하고 호젓한 당포성지의 매력은 변함없었다. 섬에서부터 감탄을 연발하던 B의 찬사가 당포성지에서도 이어졌는데, 알고 보니 일등공신은 그가 쓴 선글라스였다. 맨눈으로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신비한 색감으로 물든 풍경을 공유하며, 색안경을 꼈을 때 세상이 얼마나 달라보이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다음 여행에도 꼭 선글라스를 챙겨오기로 약속하며, 산양일주도로를 달려 봉평동으로 향했다.

 

 

 

식당의 방 테이블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는데 12시부터 근무하듯 달린 8시간 여행의 노곤함이 모두에게 찾아왔다. A는 전날 부산에서 진주를 거쳐 여수까지 오랜 운전을 했고, B는 전날 새벽 비행기로 여수에 내려와 여수에서 통영까지 남의 차 초행길 운전을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래도 마지막 밤이므로 밤바다 산책을 빼놓을 수 없어 봉평동에서 충무교를 지나 미수해안로를 통해 연필등대까지 걸었다. 드문한 사람들과 내게는 이미 익숙해진 야경이지만 누구와 함께인가에 따라 인상은 달리 남는다. 한 시간쯤의 마무리 산책 후 집으로 돌아오니 모두 기진한 상태였지만 그야말로 알찬 여행이어서 뭔가 뿌듯했다. 일찌감치 씻고 작은 방에 들어간 B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소파에 쓰러졌다 일어난 A와 두어 시간 수다를 떨며 딸기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오전, 다함께 부산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거가대교를 지나 일요일이지만 일정이 있어 출근한 A의 사무실을 구경하고, 기차를 타기로 한 B와 부산역에서 헤어져 나는 2월 영화여행을 시작했다. A는 지금의 직분을 3월 말까지만 수행하기로 결정했고, B는 여수행을 준비하던 중 합격 소식을 전한 일터에 월요일부터 출근할 예정이다. 오래 노는 중인 나는 상반기에 준비해 조촐한 공간을 열 계획인데, 마침 나의 통영행을 이끈(?) 이가 태어난 7월 1일에 꽂혀서 그에 맞춰볼까 게으르게 생각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5년 만의 만남이 따로 또 같이 삶의 어떤 분기점을 통과하는 여행이 된 것도 같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것이 달라졌고 '여수 15주기'로 시작된 만남이 마냥 즐거운 여행이 되어서 민망한 감은 있지만, 일희일비 살아가며 경험과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몇 사람이 있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