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정원
큰 기대는 없었고, 다행히 담백했다. 때로 어떤 부분은 실사처럼 느껴질 만큼 섬세하게 표현된 배경, 영롱하게 부서지는 햇살과 바람에 일렁이는 한여름의 녹음 같은 것들. 재능도 재능이겠지만 얼마나 관찰하고 얼마나 노력하면 가능한 걸까 궁금했다.
비가 오는 아침이면 등굣길 지하철에서 내려 공원으로 향하는 소년, 오전 수업을 아무렇지 않게 통째로 빼먹기 일쑤지만 구두 장인이 되겠다는 단단한 꿈과 노력을 제법 의젓하게 이어가는 열여섯이다. 비가 오는 아침이면 공원 벤치에서 초콜릿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는 여인, 저렇게 자주 땡땡이를 쳐도 되나 싶지만 실은 괴로운 사연 속에서 미각과 걷는 법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스물여덟이다. 유월의 어느 날 시작된 둘의 만남은, 아무런 약속 없이도 비가 오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계속된다. 이름도 나이도 서로의 마음도 알 수 없지만, 이따금 다음날 아침에 비가 오기를 바라고 마침 칠월은 장마.
잔잔히 시구를 주고받으며 평온을 가장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래도 견딜 만 한 거다. 내 생각에 그게 가능한 건, 결판 같은 거 내지 않아도 어쨌든 이러한 상태가 이어질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흡사 식물처럼, 가방 가득 담긴 각종의 초콜릿들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 맥주만 홀짝이던 그녀도 어쨌거나 종국을 예감한 순간엔 격렬한 동물성 몸부림을 보이고 만다. 난 고작 열여섯 아이라고 자조하면서도 마음을 접지 못하고, 심지어 다니는 학교의 선생이었단 걸 알게 된 후의 복받치는 배신감도 감내하고, 마침내 동등한 호칭으로 진심을 토해버린 소년. 소년과 그녀의 폭풍같은 장광설이 거침없이 터져 나와 교차하고 교감하는 순간은 꽤나 갑작스러운 것이었으나... 나이값이니 자존심이니 쪽팔림이니 심신의 미약이니 따위를 온전히 던져버릴 수 있다면, 순간이나마 정녕 솔직하게 맨 얼굴의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누구나 그렇지만, 바로 지금이 자기가 살아온 가장 어른의 나이인 터라... 열여섯도 스물여덟도 실은 꽤나 무거운 세월이고 생에 있어 진지한 나이다. 지금의 내 나이도, 언젠가 돌아보면 열여섯 스물여덟 처럼, 귀엽게(?) 느껴질 날이 올까나?
설마 이름을 기억했을 리는 없지만 암튼 초면은 아닌 듯하여 찾아보니 감독은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만든 이였더라.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혼자서 작업을 한다는 그는, 사실 한 비약하는 이 스토리를 구상하고 작업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 신카이 마코토,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http://www.youtube.com/watch?v=_4Xwci4CU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