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가족]
스포일러가 많아요;;;
배우는 여덟 명, 공간적 배경은 주인공의 집과 그 주변뿐인 데도 엄청난 몰입감과 다채로운 서사, 깊은 감정의 진폭을 선사하며 작은 반전들까지 겸비한 영화였다. 새해 첫 영화로 만나게 된 게 벅찰 지경.
12월에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라는 책을 읽었어서 중심 사건이 드러나는 초반부에는 책의 내용이 겹쳐 떠오르며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에 집중했는데... 릴리와 제니퍼와 애나를 보면서 흐른 시간과 배우의 연륜, 캐릭터의 힘을 새삼 느끼며 빠져들었다. 얼마 전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뒤늦게 보았고 또 얼마 전 [레스트리스] 이야기를 라디오에서 오랜만에 들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탁트인 바다와 그 마을에 지어진 부유하고 세련된 주택을 조망하며 시작된다. 손수 그 집을 지은 릴리는 병으로 거동이 자유롭지 않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 움직이려 노력하는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 폴은 그런 아내를 곁에서 돌보고 지켜보는 자상한 남편이다.
주말을 앞두고 큰딸 제니퍼 가족과 둘째 애나와 파트너, 릴리의 절친 리즈가 집으로 모였다. 제니퍼는 결합하면 꼭 껴안은 모양이 되는 흑백의 소금후추통을 선물로 건네고, 리즈는 릴리가 좋아하는 하얀 튤립 다발을 안긴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크리스와 심란하게 담배를 나눠핀 애나는 준비한 것 없이 조금 초라한 모양새로 부모의 집에 들어선다. 가족 모두에 리즈와 크리스까지, 집안을 꽉 채운 이들에게 릴리는 '평소처럼'이라고 당부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들 사이의 공기는 어색하다.
릴리는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에 한쪽 팔만을 움직일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몸의 마비가 진행될 것이고 음식물조차 삽입관을 통해 공급해야 하는 미래를 살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떠나기로 결심했고, 모인 이들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 함께 있지만 이틀 후면 다른 세계로 떠날 릴리를 보는 모두는 착잡한 마음을 감춘 채 애써 명랑을 가장하고, 릴리는 자신이 결정한 마지막 시간까지 웃으며 평온하게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건강하게 계속 살아갈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선택, 당사자가 심란하지 않을 리 없다. 릴리는 리즈에게 굿나잇 인사를 건네며 수십 년 전의 추억을 소환하고, 손자 조나단과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며 각별한 친밀함 하나쯤을 간직하고자 한다. 먼저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질 게 뻔한 상황에서 여유롭고 의연하게 함께하는 시간의 분위기를 끌어가지만, 릴리는 무섭고 외로울 것이다. 릴리의 선택과 의사인 폴의 동의를 존중하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가족들은 궁금함과 의구심과 혼란스러움을 제각기 감당한다.
릴리의 제안으로 열린 때 이른 크리스마스 파티와 성찬, 조나단은 멋진 랩으로 분위기를 돋우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음을 담은 선물을 전하는 릴리도 받아든 이의 얼굴에도 글썽임이 어린다. 임박한 죽음을 잊고 따뜻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그러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가족끼리는 당연히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웃음과 사랑으로 마지막 자리를 채우고 싶은 이들은 릴리의 마리화나를 돌려 피우며 선을 넘는 유대감을 나누지만, 여리고 아픈 애나는 속마음을 폭발시키고 그로부터 몰랐거나 모른 체 했던 균열과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엄마의 주문대로 강하고 자유롭기보다는 그저 자신이고 싶었던 애나에게는, 엄마를 알고 엄마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사인 아빠의 판단과 온전한 삶을 원하는 엄마의 의지를 존중했던 제니퍼는 우연하고 충격적인 목격으로 이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 애나가 좋아서 무너진 그의 곁에 함께하는 크리스에게도, 분위기 파악 못하고 아무 때나 TMI를 늘어놓으며 제니퍼의 제지를 받기 일쑤인 마이클에게도, 수십 년 동안 이 가족들의 곁을 맴돈 리즈에게도, 릴리와의 마지막 시간은 새로운 의미를 더한다.
반전의 에피소드들이 등장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삶과 죽음 그리고 관계라는 너른 스펙트럼 속에는 아직도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그 입장에 서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많은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였다. 주인공의 죽음을 전제로 전개되는 극의 기저에는 숨을 고를 수밖에 없는 긴장이 흐르지만, 단편적이나마 인물 각각에게 부여된 서사와 캐릭터의 생동감이 조화롭게 맥락화되어 전체 이야기를 짜임새 있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확고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은 그 순간의 발화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도록 이끌었다. 한 명 한 명 클로즈업되는 씬에서는 나도 모르게 어둠 속의 핀조명이 상상됐고 연극으로 보았다면 엄청나게 압도되었을 것 같았다.
여덟 살 애나와 바로 전날 제니퍼가 목격한 리즈와 폴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제니퍼와 애나의 부동의를 철회시킨, 떠나기로 마음 먹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했던 릴리의 말이 실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지상에서의 마지막까지 행복한 삶, '완전한 가족'으로서 존재하고 싶었던 릴리가 스스로와 모두를 속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릴리는 자신의 결정으로 삶을 마감했고,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였다.
아이러니한 건배사 "To Wonderful Life!" 만큼이나 성탄 성찬에서 그들이 함께 부른, 엔딩에도 흐른 노래의 가사가 릴리의 고백이자 유언처럼 느껴졌다. 가사의 느낌은 분명히 남았는데 워딩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 그 노래를 다시 듣고 싶어서 열심히 검색봤지만 실패했고, 어떤 블로그에서 이 영화가 빌 어거스트 감독의 [사일런트 하트]를 원작으로 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찾아보니 [사일런트 하트]의 각본을 썼던 사람이 이 영화에도 각본으로 참여했다고 하는데, 원작을 볼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완벽한 가족]이라는 한국판 제목이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원제라는 [블랙 버드] 역시 어떤 의미에서 붙여진 건지 모르겠고 궁금하다.
20210109
롯데시네마통영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