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

[우리의 사람들]

나어릴때 2021. 11. 2. 23:44

 

 

읽으며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을 오갔고, 작품의 편차라기보다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기복과 낯설음 때문이었다. 몇 달 전 갑자기 usb가 필요한 일이 생겼는데 마침 책을 주문하려는데 이 책을 사면 usb를 주길래 낯선 작가의 소설 읽기를 즐기지는 않지만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젊은 작가의 작품에서 좋은 느낌을 받은 일이 종종 있어서 불과 두 단어인데도 심심한 듯 다정하고 좀 외롭게도 느껴지는 제목에 커다란 나무와 그늘과 빈 벤치가 있는 표지도 마음에 들어서 그러니까 시시콜콜한 여럿의 우연이 겹쳐 읽게 되었다.


별 생각없이 펼쳤는데 첫 번째 소설에서 [티보 가의 사람들]이 등장해 와락 반갑고 들뜨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티보가의 사람들]은 살면서 읽은 소설 중 가장 긴 작품이고 별권까지 여섯 권이나 되는 책을 두 번 읽은 것은 유일한데 앞으로도 살면서 한두 번은 더 읽을 생각이 있다. 수십 년 전의 일이고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지만 [회색 노트]에 사로잡혀 마음에 푹 담고 지낸 시간이 길었고 [티보 가의 사람들] 연작 중 1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읽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한참 안타까워하다 또 한참 잊고 지내다 전권이 출간되었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기도 했다. 살면서 자주 떠올리고 아주 가끔 주변에 이야기한 적도 있지만 읽은 사람은커녕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던 나의 사랑하는 책이 이렇게 불쑥 튀어나와 마주치는 순간은 약간 운명인가 싶은 착각을 선사했다.

오- 반색하는 마음이 되었으나 잠시였고 표제작인 [우리의 사람들]은 짧은 분량 속에 여러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각개의 이야기들은 서로 상관없는 듯 이어져 있지만 어쩐지 하나의 결을 가진 듯 느껴짐에도 어떤 부분은 무척 지루하고 어떤 부분은 무척 생생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다. 부산 어딘가에서 결혼해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나와, 매년 온양의 호텔방에서 새해를 맞으며 침대에 누웠을 나와, 좀은 어정쩡한 관계의 사람들과 함께 새벽의 숲에 찾아간 나의 이야기들은 어딘가 비슷하게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라고 느껴졌지만 가장 인상적이고 공감이 됐던 지점은 수십 년째 텐트연극을 하는 사쿠라이 다이조에서 대해 “뭔가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오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매번 끊임없이 이걸 왜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때 직접 듣게 되었다”고 표현한 부분이었다.

나는 작가를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고 당연히 그의 문체나 개성에 대해 아는 바도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두 번째 소설인 [건널목의 말]을 읽으면서도 어딘가 관찰하는 마음이 되었는데 언젠가 나도 지나쳤던 구체적인 지역과 지명이 나오는 덕에 활자를 따라가는 입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나에 대한 상상이 거듭되자 전혀 근거없음에도 어쩐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반점도 따옴표도 없이 반복도 반전도 생각도 대화도 일렬로 나열되는 극단의 만연체 문장은 개성이라고 감안하기에는 절반쯤의 가독성만을 지니고 있어서 그 길게 이어지는 문장만이 담아낼 수 있는 고유한 감성과 호흡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다는 기분이 들고는 했지만 이상하게 그만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작가의 문체에 별로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입장에서 반말의 서술어가 이어지는 중 튀어나오는 경어는 꽤 느닷없이 느껴지고 그나마의 몰입을 깨는 달갑지 않은 변화였지만 불현듯 등장하는 파격의 서술어가 흐름을 끊을 수 있다는 걸 작가가 모르지 않을 테니 의도를 가지고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과문한 탓에 불필요한 치기처럼도 느껴졌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거기에도 조금은 익숙해지게 되었다. 뭔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떠오르는 단어들을 따라가며 떠오르는 대로 다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문장과 이야기들로만 소설을 쓴 건가 싶기도 했는데 차례로 읽다 보니 어쩐지 기분만 가득한 소설인 것 같다는 느낌과 달리 아주 구체적인 현재적 공간들과 작가가 면밀히 조사하고 삽입한 듯한 역사적 사실들이 정교하게 직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탓에 자꾸만 작가와 '나'를 동일시하게 되는 부작용은 있었지만 그런 오해 덕분에 아주 옛날에는 인간도 겨울잠을 잤다는 사실에 마음을 조금 기대고 적당한 온기를 품고 적당한 침잠을 보유한 채 조용히 살아가면서 다른 장소를 꿈꾸고 떠돌기도 하고 상상하기도 하면서 지난 시간의 사람과 일 들을 생각하고 곱씹기도 하는 어떤 구체적인 사람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했다. 일곱 편의 소설이 '나'가 겪은 일들을 이어놓은 연작처럼 생각되기도 했고 특히 자주 거론되는 부산의 곳곳 중에는 나도 알고 있거나 가본 적이 있는 골목이거나 장소인 것 같아 전혀 그럴 일 없음에도 과거 어느 때인가 모른 채로 작가를 마주치거나 스쳐간 적이 있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했다.

묘사된 바는 없지만 어쩐지 무채색의 옷을 즐겨입고 낮은 소리로 웃을 것만 같은 '나'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뇌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따라 부유하듯 살아가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 사회와 장소의 지난 편린들을 통해 세계를 낯설게 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관심하고 기록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모호하고 불안하고 외로운 세계의 초상을 요즘의 어떤 작가는 이렇게 재현하는구나 싶으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장소와 함께 현재적으로 소환하고 해석이나 해설은 생략하는 방식이 주는 환기가 신선하게도 느껴졌다. [미래 산책 연습]을 읽으며 더욱 그러했는데 [빈첸시오 살아서 증언하라]를 읽으며 전율하고 [꽃들]에 실린 시들을 애써 외우기도 했던 시절과 한참 후 '나'와 같은 이유로 [밥 딜런 평전]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등장하는 부산의 곳곳과 손목서가에서 [회색 노트]를 산 '나'가 마음에 들었다.

 

"밥 딜런은 1962년 초 봄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를 썼고 그는 초연을 하기 전 "지금 부를 이 곡은 저항곡이 아니며 그런 식의 무엇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저항곡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누군가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것을 쓸 뿐이다"라고 소개했다. 이후 딜런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응하여 「폭우가 쏟아지네」(A Hard Rain's a-Gonna Fall)을 쓴다. 이후 해당 곡의 초연을 듣기 위해 카네기홀에 모인 청중 모두 「폭우가 쏟아지네」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카네기홀의 청중은 딜런의 새 노래에 감동받았고, 몇주 후 실제로 미사일이 발견되자 그들은 경악했다. 이 부분을 읽다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이 아니에요. 나는 이 책의 번역자는 광주라는 사건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그후 시간의 의미를 묻고 답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1980년 5월에 그들 자신이 광주에 있었다면이라는 가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음을 역시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이 반복한 것은 그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이 아니라 그때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미국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미래를 연습하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불을 붙인 이후의 시간을 미래라 생각하였을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런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인지 그가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믿고 살아내어 미래를 현재로 끌어다가 반복하여왔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 [미래 산책 연습] 중

 

본문의 일부를 막 옮겨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라 옮겨둔다. '나'의 내면과 행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교차하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 처음엔 낯설고 생경하고 어딘가 불편하기까지 했지만 갈수록 빠져들어 마지막 소설까지 읽으며 이런저런 느낌들이 많았는데 마음에 들게 정리할 수가 없다. 그래도 나를 위해 기록해두고 싶어 마구잡이로 적었는데 어줍잖게 작가의 문체를 흉내낸 꼴이 되었네. 죄송합니다. 아무려나, 초면이었지만 이제는 알게 된 한 작가의 소설들 덕분에 소소한 삶의 뒤에 자리한 깊은 세계를 감지한 느낌이다.

 

 

박솔뫼
2021.2.10.초판1쇄발행, (주)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