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

[이상의 도쿄행]

나어릴때 2021. 3. 13. 17:26


내일 서울에서 하는 모임 책, 지난 번 책 모임에서 내가 추천하고 나는 줌으로 참여하기로 했었는데 선약 우선의 원칙을 어기고 시간이 겹치는 주말 교육을 신청한 바람에 불참하게 됐다. 미안한 마음에 책 추천자로서 간단한 독후감이라도 공유하려고 이번 주에 읽었는데... 음, 죄송하다고 배꼽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기대와 달리, 힙한 제목 붙이기와 디자인에만 신경을 쓴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어 추천이 민망해졌고, 가독성이 많이 떨어지는 데다 일체의 해설이 없어 좀 무성의하게 만들어진 책이라고 느꼈다. 비슷한 컨셉의 기획인 [꽃의 파리행]도 샀는데, 그건 좀 나았으면 좋겠다.

지난해부터 백석 시인 관련 책들을 여러 권 읽으면서,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이들의 해외 여행이나 체류기 같은 것들에 관심이 생겼다. 분단 상황에서 태어난 내게 '우리나라'는 38선 이남의 한반도, 교과서가 주입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보다는 은연중에 내가 살아갈 세상이 딱 그만큼인 것 같은 심리적 경계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따금 접한 기록 속 일제강점기 청년들에게 세계는 오히려 그보다 넓은 지평이었던 것 같고, 제목과 부제에 혹해 많이 궁금했었다.


중의적 의미라고 하지만 표제작처럼 생각되어 기대했던 이상의 산문 "동경"은 너무 짧았고(나의 과문함 때문이기도 하고, [이상문학전집]에서 한문 가득한 원래의 글을 확인하고 다소 위로는 받았다만), 모든 글에 이제는 쓰이지 않는 많은 단어들이 나왔지만 일일이 검색하며 읽기가 어려워 모르는 단어나 낯선 표현들을 대략 짐작으로 넘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당대의 단어와 문투로 쓰여진 글들에 하나하나 주석을 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글이 발표된 계기나 관련한 기본적인 해설 정도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책 말미에 발표 시기와 지면은 명기되어 있다.).


그럼에도 100년쯤 전의 시간을 살았던 이들의 세계 여행 경험과 기록에는 흥미로운 구석들이 많이 있었다. 열악한 정보와 교통편으로 대륙을 건너는 이들은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배에 오르고, 그들을 전송하며 행운을 비는 이들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들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 여행의 위상을 느끼게 한다. 신문, 잡지 정도로만 접했을 낯선 세계와 첨단 문물을 직접 마주한 여행자의 문화적 충격과 이색적인 감흥, 그를 전달하기 위한 표현들이 흥미로웠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근대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최신식의 '현대'를 직접 접하고 느낀 감상의 기록이 주는 시간차의 감흥도 새로운 것이었다.


소설 [세 여자]에서 삶의 면모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던 허헌의 "세계 일주 기행"은, 대략적이나마 인물에 대한 정보가 있고 첫 번째 글이어서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글에는 한 사람의 여행자로서의 개인적 감상과 식민국가의 지식인으로서 가진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 독립된 국가를 준비하기 위한 배움의 자세 같은 것이 잘 담겨 있다. "기어이 다시 한번 살아와서 저 문을 쳐다보자고 맹세"할 만큼 두려운 도전에 나선 여행자는, 미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영어 공부에 매진하고, 기착지에서 만나는 해외 동포의 현실과 미국과 아일랜드 등에서 관광과 견학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미국 헐리우드 촬영소 견학,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아일랜드의 재판정과 여판사의 존재, 재소자의 인권이 상당히 보장되는 감옥 이야기 등이 인상적이었다. 여행을 시작할 때 지도와 함께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자석을 구입한다는 것이나 그 많은 돈을 환전해 싸갖고 다녔다는 것은 격세지감이었지만, 길을 안내해주는 시민을 강도로 오인했던 해프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해외여행자의 마음을 떠올리게 해줬다. 땅을 팔아 마련한 돈을 아끼며 여행했다고는 하지만, '사회지도층'으로서 행선지마다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고 소개를 받고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까지 가볼 수 있었던 드문 여행의 기록인데 잡지에 게재하느라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많이 생략한 것 같아 좀 아쉬웠다.


박승철의 "독일 가는 길에"에는 일본 고베에서 아시아 여러 나라를 거쳐 유럽에 이르는 긴 여정이 담겨 있다. 여행 동기나 목적은 알 수 없지만 긴 항해를 하며 배가 육지에 도착할 때마다 가능한 상륙해 의미 있는 곳을 부지런히 돌아보고, 유럽에 도착해서는 각 도시의 미술관 박물관 공연장 대학 등까지 방문해 견학하며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도시의 인상과 특징, 현지 명소에 대한 소개와 감상 등에 더해 공연을 관람하고 괴테와 쉴러 등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전기회사 사장 재직과 독립운동, 납북 정도의 소개로는 알 수 없었던 필자의 문화적 소양과 취향 같은 걸 느낄 수 있어 흥미로웠다. 선상에서 사망한 포르투갈인의 장례와 인도양 수장, 물가가 싼 독일이지만 외국인에게 거류세를 받는다는 뮌헨, 독일에서도 뷔르츠부르크라는 도시에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 영국에서 흔히 보았다는 여성들의 운전과 극장 내의 부인 흡연실 등의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필자의 박람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 인생의 최대 욕망은 결국 세계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삶의 철학이 인상적이었다.


이광수의 “명문의 향미”는 여행기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한 에세이라고 느껴졌다. 오산학교 교사직을 마치고 세계 무전 여행을 계획했으나 중국의 몇 도시를 거쳐 상해에서 끝나는 글은, 그의 말마따나 “너무 말길이 곁길로 들어갔다”고 느껴졌다. 성관호의 “내가 본 일본의 서울”은 ‘교사’라는 짧은 소개 때문인지 여행기라기보다 어떤 가르침 혹은 주장의 글처럼 읽히기도 했는데, 불평등과 빈부 및 세대 차이 등에 대한 문제의식과 분석은 지금의 기준으로도 시의성이 부족하지 않다고 느꼈다. 이상의 “동경”은 글 읽는 맛은 가장 좋았지만 너무 짧았다. 사후 유고로 실린 글이라는데, 가난한 이상이 당시 지식인들이 신문물을 직접 체험하는 대중적이지만 값비싼 경로였을 동경을 바라보는 어떤 실망과 냉소가 느껴졌고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는 것이 새삼 아이러니처럼 생각되었다. 이상의 (한글로 된) 산문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노정일의 “세계 일주 산 넘고 물 건너”는 필자 소개와 서두에 실린 시가 주는 선입견의 그늘 아래에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유수의 명문대학들에서 문학과 신학, 철학을 공부했다는 몇 줄에 걸친 이력 다음 “귀국 후 1931년 <중앙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친일 언론 활동을 했다.”로 마무리되는 소개, 그에 이어지는 자기도취적인 영탄조의 시로 시작되는 글이어서 더욱. 1910년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가 시작된 유학생활의 이야기를 1922년에 발표한 글이었는데, 미래에 대한 기대와 약간의 불안 자신감 등이 교차하는 청년의 마음과 문학도의 감상주의까지 더해져 상당한 오글거림이 느껴졌다. 시험답안 말미에 서명을 한다거나, 1918년 당시에 이미 아침 8시에 시작해 오후 4시면 근무가 끝나는 이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거의 맨몸으로 떠난 유학에서 자기 성취를 거듭하는 엘리트로서, 청교도적 신앙에 입각한 보수주의자로서의 개인의 기질이나 성정 같은 것이 진하게 담긴 글이었는데, 비교적 긴 시간의 체류를 회고하며 쓴 글이어선지 당시 미국 유학생의 일상과 당대의 분위기 등은 가장 잘 정리되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세계 여행이란 무척 드물고 특별한 일이었을 테고 지면에 발표된 글 자체가 별로 없기도 했겠지만, ‘조선 지식인의 세계 유람기’라는 부제가 무색하게 수록글이 다루는 지역이나 여행의 목적, 글의 성격 등이 제각각이어서 일관된 흐름으로 읽히지 않았다. 엮은이의 서문과 간략한 저자 프로필이 덧붙여진 내용의 전부였는데, 제목이 준 기대에 못 미치는 헐렁한 서문에 좀 당황했고 저자 프로필의 내용도 좀 아쉬웠다. 과거 다양한 매체에 발표된 글들을 다시 묶어 낸 기획력에만 의존한 책이라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허헌 박승철 이광수 성관호 이상 노정일 지음
구선아 엮음
2019.10.18.초판1쇄인쇄 10.25발행, 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