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

일상의 치열함이 만들어낸 빛나는 선택

나어릴때 2011. 5. 15. 21:21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도 없는 선택을 하지만 사실 하나하나 의식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아주 작은 갈등조차도 개입되지 않는 즉자적이고 본능적인 선택에서부터 갖은 기회비용과 반대급부와 가능성을 고려하며 숙고 끝에 내리는 결정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우리의 삶은 모조리 선택하는 일로 가득한지도 모른다.

'선택'이라는 간명한 제목의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권인숙이라는 필자가 동력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무척 좋아했던 손석희 아나운서의 참아누르는 분노가 느껴지는 차가운 멘트로 전해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정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는 나이였지만 분명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강렬한 느낌의 뉴스는 어린 시절의 나를 한동안 어지럽게 했다. 당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성고문 수사관 문귀동이 기독교 집사였다는 통탄 어린 말씀을 설교 시간에 하셨던 것도 같다.

차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성고문이라는 가혹하고 치명적인 사건의 주인공인 그녀의 얼굴은 두터운 검은 뿔테안경 너머의 굳은 표정으로 내게 오래 기억되었다. 이후 가끔씩 접하는 그녀의 행보도, 내 어린 시절에 이미 창백하게 박제화된 그녀의 이미지를 지워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에 대한 기억은 자연스레 내게서 멀어져갔다.

책에서 그녀는 엄청난 사건의 주인공으로 혹은 피해자로, 주목되는 동시에 갇혀버린 공공의 시선 속에서 보낸 시간들에 대해 담담히 기술하고 있다. 모르기는 해도, 그녀의 일상에 늘 함께했던 것은 불특정다수로부터의 무책임하고 가차없는 시선과 더불어 자의보다 커져버린 결과로 인한 감당할 수 없는 불가항력과 자신 속에서 번져가는 무기력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제 마흔을 넘어 또 가파른 삶의 고비를 간신히 넘어, 이국땅에서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는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의 치열함으로 지켜낸 빛나는 선택의 주인공이 되었다. 조금은 실망스러울만큼 비루하고 누추한 삶의 이력까지를 낱낱이 공개하며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대체로 편협하고 고정적이다. 누군가의 빛나는 시절에는 지나치게 열광하지만 그가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의 반응이나 잊혀진 시간 동안의 일상의 치열함에 대한 평가는 서글프리만치 냉정하기도 하다. 물론 타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내가 나의 시간을 한 순간도 쉼없이 살아가듯 누구나 일상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 순간순간의 치열함을 동력으로 삼은 선택은 결국 아름다운 빛으로 화한다는 당위적인 진실이었다.


2004-02-05 23:33,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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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권인숙 (웅진닷컴,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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