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나어릴때 2021. 11. 13. 11:57

 


정세랑 작가의 글을 에세이로 처음 만났다. 제목은 익숙한 많은 화제작들이 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았고 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도 넷플릭스를 보지 않는 탓에 이따금 포털사이트 기사에서나 접했다. 초능력을 가진 존재라거나 지구와 우주를 넘나들고 시공을 초월하거나 하는, 인간 세계와 질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많은 소설과 영화 들이 나온 지 한참이지만, 고루하고 보수적인 데다 상상력도 일천한 덕에 내게는 그런 작품들에 대한 심리적인 진입 장벽이 존재한다.

그래도 궁금했던 작가였는데 마침 여행 에세이라니 반가웠다. 2012년 뉴욕과 아헨과 오사카, 2014년 타이베이와 런던에서 보냈던 날들의 기록이 꽤 두툼하게 묶여 있다. 가봤거나 가려고 애쓴 적은 없었던 곳이어서 궁금했던 작가를 처음 만난다는 기분으로 읽기에 적당했다. 잘 나가는 작가여서 세계 여행도 많이 다녔나? 은연중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은데, 책장을 펼친 지 얼마 안 되어 이 책을 여행 에세이라고 이해한 건 그저 내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지낸 기록이니 여행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십 년쯤 전 작가의 고민과 생각, 일상이 담겨 있는 일기에 더 가까운 기록인 것 같다. 

글쓰기와 편집일을 병행하던 작가는 퇴사를 했고 뉴욕 유학생인 절친은 졸업을 앞둔 시점, 시차를 맞춰 메신저로 나누던 대화가 뉴욕행으로 이어졌고 첫 번째 도시로 등장한다. 강권을 이기지 못해 친구의 집에서 머문 덕에 뉴욕 한복판에서 2주를 보내며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현대미술이나 관심 있는 장소를 부지런히 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바들이 세심히 기록되어 있다. 잠시 스치는 낯선 이들과의 의도 없는 가벼운 대화와 친절에 마음이 환해지고, 바쁜 시간을 쪼갠 친구와 함께하며 여행자에게는 열리지 않는 뉴욕의 모습을 경험한다. 센트럴파크에서 마주친 주인 잃은 토끼 인형을 무심코 찍었던 일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길에 버려진 물건을 그 상태 그대로 사진에 담는 취미가 생겼다고 했다. 배경이 된 영화들이 몇 편 떠올랐지만 정말 유명한 몇 군데 외에는 낯설었는데, 그럼에도 영화 [타인의 친절]에서 보았던 어두운 뒷골목이며 도서관, 식당과 교회와 병원 같은 곳이 떠올랐고 혹시 어떤 장소는 겹쳐 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아헨은 독일의 도시라는 것 외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챕터를 읽고 나니 조금 아는 곳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을버스로 네덜란드에 장을 보러 갈 수 있고 벨기에와도 면한 국경에서는 몇 걸음으로 세 나라를 오갈 수 있다니 괜히 나까지 설레었는데, 작가가 머물렀던 시절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테러들로 지금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 되었을 것 같아 아쉬워졌다. 아헨 편에는 독일의 여러 도시와 브뤼셀 등을 짧게 여행한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덕분에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배낭 여행이 떠오르기도 했다. 난생처음 탄 국제선의 첫 목적지였던 프랑크푸르트, 맥주 공장의 작은 기념컵이 아직도 집에 있는 하이델베르그, 전혜린을 떠올리며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걸었던 뮌헨의 슈바빙, 전쟁과 분단의 잔해에 숙연해지면서도 자유로운 거대 도시의 공기가 느껴졌던 베를린. 다시 갈 수 있을까 싶은 독일의 곳곳, 당시 베를린 유학 1개월 차였던 친구의 작은 방, 이제는 여행처럼 과거가 되어버린 친구가 떠올랐다. 동행의 친구들과 나눈 짧지만 깊은 우정의 경험이 인상적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을 달리해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건 특별한 유대감을 만드는 것 같다.'고 작가는 썼는데, 아주 잠시지만 나도 있었던 공간에 대한 글이 마음에 또 하나의 레이어를 만들어준 기분이었다. 

어릴 적부터 친한, 엄마와도 편하게 연락하는 친구를 만나러 간 오사카 여행은 엄마와 함께다. 아르바이트에 바쁜 중에도 짬을 낸 친구와 매일 만나고, 엄마와 함께 미술관이며 문학관 등을 여행한다. 오래 지연된 책 쓰기의 동력이라며 소개한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한 신사를 찾아갔다가 마침 어머니의 기일을 맞은 여성이 작가와 어머니에게 차를 대접하고 주위의 좋은 곳들을 소개하고 알려주며 훌쩍 6시간이 흘렀다.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다시 돌아온 여성이 마지막으로 데리고 간 13세가 된 여자 아이를 위한 계단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소원한 관계지만 사촌 언니가 둘이나 살고 있는 일본을, 나는 그 옛날 유럽 배낭여행 가는 길 환승을 위해 내린 간사이 공항 안에서만 잠시 유했을 뿐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같은 영화를 본 후에야 일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코로나19 시국이 잠잠해지면 가장 먼저 하코다테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다시 먹었다. 

타이베이는 아헨에 함께했던 친구와 결혼한 작가가 원한 안전하고 쾌적한 신혼여행지로 등장한다. 이주단체에서 다년간 일하며 아시아의 다양한 나라들에서 온 이들을 수없이 만나고 함께했으면서도 아시아를 궁금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던 나로서는, 아시아인만큼 아시아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며 "첨밀밀"에 감흥할 수 있는 공감대부터 동년배 아시아 작가들의 네트워크까지 고민하는 작가의 미래지향적이고 열린 감각과 사고에 약간 경의의 마음이 들었다. 제국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게 아시아는 대충 덥거나 불편한 곳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고,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중 몇 편을 좋아했지만 이상하게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멀지 않은 대만이나 홍콩은 2년 전까지만 해도 참 쉽게 갈 수 있는 곳인데, 이삼 일의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부럽다고 느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책을 읽고도 별로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아시아 문단(?)의 일원으로서 작가가 화두를 던진 이야기들은 서구로부터 역유입되는 아시아에 의구심없이 익숙해진 스스로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만들기는 했다. 

마지막 장소는 런던, 영화 [갬빗]을 보고 자동으로 응모된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왕복 항공권이 여행의 시작이다. 어딘가에는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사람도 있으니 왕복 항공권에 당첨되는 사람도 있겠거니 하지만 놀라운 일이다. 한때 비틀즈에 빠져 언젠가 런던과 리버풀을 꼭 가보겠다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문학 작품은 당연하고 미디어 시리즈물도 즐겨보는 듯한 작가에게 런던은 훨씬 다양한 레퍼런스를 보유한 도시였다. 잘 보존된 찰스 디킨스의 흔적들을 음미하고 어쩌면 작가와 상통하는 세계관의 보유자일까 싶은 로알드 달의 뮤지컬을 관람하고, 셜록 홈즈와 해리 포터의 촬영 장소를 찾아간다. 런던행 소식에 전해진 지인들의 추천을 따라 음식을 먹어 보고 차를 마시고, 여러 미술관을 돌아보고 거리의 공공 예술 작품들을 경험하고 마음에 든 거리를 걷는다. 작은 행운들과 좋았던 것들을 기록하고, 공항에서 잃어버린 빨간 부엉이 지갑에 대해서는 덕분에 분실물 사이트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쓰고 혼자 런던을 더 여행하고 있으리라는 상상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내가 읽은 '여행기' 중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많이 담겨 있는 책이 아닐까 싶었고, (당연히 아니겠지만) 작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라면 이런 경우 편협한 독자인 나의 반응은 다소 짜증스러움을 느끼는 편인데 유명 작가이지만 내게는 초면인 그와 그의 가족과 친구 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한 내용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읽으며 새로운 사람들을 소개받는 기분이 들기까지 해서 좀 신기했다. 실은 장소가 바뀔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다정한 친구들이 나 역시 사랑스러웠고 헤어질 때면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는 작가와 그들의 우정이 부러웠다. 활자로도 그 밝고 환한 기운이 전달되는 것 같아서 나도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지난 나의 여행길에도 분명 존재했던 친절한 사람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작가의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지만 '정세랑 월드'의 온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많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살아 있는 상태가 너무 신기하지 않은지? 꼭 개인적 얘기, 사람들 얘기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렇다. 지구가 초속 30킬로미터로 빙글뱅글 날아가고 있는데 그 위에서 온갖 동식물이 38억 년 동안 생겨났다 멸종했다 하며 보글보글 지내왔다는 것이……. 우주는 죽어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어떻게 다들 살아 있지? 거의 매일 놀란다. 심장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뛰었다니? 신경을 쓰지 않는데 호흡이 계속된다니? 산책만 나가도 흥미로운 발견을 하고 화분에 새잎이 나면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다. 다른 요인들도 있지만 환경주의자가 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아팠던 청소년이 쉽게 경이로워하는 어른으로 자란 것이다. ... 어둡고 죽어 있는 우주에서 기적 같은 지구에 산다는 것이 신기해, 냉소와 절망에 빠졌다가도 빨리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400쪽에 가까운 분량에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었는데, 불과 십여 쪽만에 나온 이런 구절에서부터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한 도시에 머문 경험을 중심으로 묶인 글이지만 이야기들은 그 여행이 가능했던 맥락과 배경, 여행지에서 받은 인상과 사유는 물론이고 일상과 문학을 넘어 인간 세계의 다양한 문제들로 금세 도약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참치캔에서 바다-풍요 정도로 이어지는 예전 어떤 시트콤의 말풍선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하나의 키워드에서 자동 연상되는 다른 이야기로의 점핑이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점도 유쾌했다. 구체적인 팬이나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부분들도 몇 군데 있었는데, 모두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다정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았으니 그런가 보다 했지만, 작품에 녹여낸 에피소드의 출처라거나 어떤 작품을 쓰게 된 경험 같은 것들도 자주 소개되니 팬이라면 선물 같은 책이겠구나 싶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고 가고 싶어하는 장소들에 대해서도 쓴다면 읽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가능할 것 같지 않으니, 그의 소설을 한 편씩 읽어볼까 싶어졌다. 



정세랑

2021.06.01초판1쇄인쇄 06.10발행, (주)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