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

[책들의 부엌]

나어릴때 2022. 11. 26. 17:17

 



유진은 번아웃인 줄 모르고 몰두했던 스타트업을 정리하고 우물 같은 시간을 보내다 일출을 보기 위해 오른 마이산의 구름바다에서 받은 영감 그리고 우연과 용기로 '소양리 북스 키친'을 연다. 좋아하는 소설 [그 겨울의 일주일]이 바탕이 된 공간, 사촌동생 시우와 소양리 토박이 형준이 스태프로 함께하며 오픈 준비가 한창인 어느 날 오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인은 어릴 적부터 노력해 뮤지션으로 정상의 자리에 섰지만 대중의 관심과 환호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과 거리감을 느낀다. 1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며 찾아온 할머니의 옛 집에 소양리 북스 키친이 있다. 유진과의 대화와 오랜만에 찾아온 추억의 공간에서 안정감을 느낀 다인은 그곳에서 계획에 없던 하루를 보내며 불면증을 잊고 편안한 잠에 든다. 

 

4년차 직장인으로 반복되는 생활에 슬럼프가 찾아온 나윤은 대학 때의 절친들인 세린과 찬욱과 만나 브런치를 나누던 중 3년쯤 연락이 끊겼던 시우의 소식을 듣고 즉석 여행을 떠난다.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대학 초년생 시절 사총사였던 그들은 이후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며 멀어졌고 현실에 치이며 20대의 마지막을 보내는 중이다. 시우가 스태프로 일하는 소양리 북스 키친에서 오랜만에 다시 뭉친 사총사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꿈처럼 흐른다. 

 

어릴 적부터 활자에 탐닉하며 행복했던, 한편 경쟁과 성취에도 익숙했던 소희는 30대의 재판연구원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공식에 맞춰 승승장구하며 살아왔지만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고, 수술 전의 휴식을 위해 소양리 북스 키친을 찾았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장기 숙박 손님이었던 소희는 재즈 페스티벌에서 좋아하는 뮤지션을 향해 열광하고 소양리 북스 키친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담담히 털어놓으며 한 달을 보내고 떠난다.

 

그 사이 소양리 북스 키친에 새롭게 스태프로 합류한 세린은 지인의 야외 결혼식을 준비 중이다. 구 남친의 사촌동생 지훈의 부탁이었고, 지훈은 어렸을 적 해외에서 생활하며 오랫동안 좋아했고 몇 년간 안부를 알 수 없었다가 같은 연구실에 속하게 된 마리에게 진심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두운 개인사를 숨기기 위한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고 결국 리플리 증후군 진단을 받은 마리 역시 지훈을 좋아했지만, 거짓으로 지은 상상의 세계에서 더 편안했던 스스로가 혼란스러웠고 그런 자신이 지훈의 미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길이라 믿었던 뮤지컬 연출에서도 실패한 수혁은 어느 날 새벽 회사 대신 미술관으로 향한다. 늘 자신을 지지해줬던 엄마는 1년 전 세상을 떠났고 적성에 맞지 않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며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그의 일상은 어둡다. 이른 아침 문 닫힌 미술관 근처에서 우연히 시우를 만나 소양리 북스 키친에서 아침 식사를 함께 먹고 밤 따기 프로그램을 돕고 잠자리까지 신세를 지고 떠나는 수혁의 얼굴은 처음보다 한결 평안해졌다.

 

유진과 스타트업을 함께했던 선배가 찾아온다.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가까웠지만 스타트업을 운영하며 구상하는 사업 방향이 맞지 않아 많이 싸웠고, 그가 먼저 떠난 후에는 연락도 받지 않았던 터였다. 일에만 미쳐 서로를 탓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고 어색한 화해를 주고받는 두 사람, 선배는 이직한 회사에서 만드는 사내 도서관을 담당해달라고 유진에게 부탁한다. 스타트업에서 밤낮없이 일할 때보다 한결 여유로워지고 책방이 잘 어울린다는 선배의 말은 진심이고, 유진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매 장마다 각자의 고민과 사연을 안고 소양리 북스 키친에 찾아와 뭉근한 위로의 시간을 함께한 이들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초대장을 받아 다시 모인다. 나윤은 조카와 함께 보내려던 계획을 변경해 두 번째 즉석 여행을 왔고, 소희는 수술 후 틈틈이 써내려간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을 가지고 왔다. 길고 편안한 대화 이후 이따금 서로를 떠올렸을 수혁은 어머니가 평소 좋아했던 아이스와인을 챙겨 찾아와 유진에게 진심을 전한다. 함께하지 못한 다인의 사연은 에필로그로 등장하고 두 번째 에필로그에 담긴 오픈 1년 후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가상의 공간과 인물, 실제 존재하는 책들 그리고 최근의 sns 마케팅과 책방 트렌드의 디테일이 세세히 반영된 이야기들이 넌픽션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장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연은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적당히 스테레오타입화한 설정이고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사회경제적 조건에 기인한 어려움 같은 것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입부에서 소양리 북스 키친이 소개될 때, 250평의 땅을 매입해 북스테이와 카페와 서점 등으로 네 동의 건물을 지었다는 부분이나 비용 마련을 위해 주식을 팔았다느니 하는 부분에서부터 거리감이 느껴졌고, 덕분에 이후의 이야기들도 세태 로망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주요 인물들에게는 각자의 문제가 있고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연한 수순처럼 이겨내거나 감당할 만한 것이 되고, 대체로 통과의례 같은 분위기였다. 비슷비슷하게 따스한 느낌의 표지에,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과적으로 타인의 다정함을 만나 위로받고 팬시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들이 꾸준히 나오는 건 사는 것도 힘든데 소설에서마저 힘들고 싶지 않은 독자들이 많기 때문일까? 소위 힐링소설은 늘 존재했겠지만 요즘 유독 재부상하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고, 현생에 지친 MZ세대의 구미와 취향이 이런 걸까 싶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세세한 설명으로 전개되고, 비의나 상징 없이 돌직구처럼 나아가는 이야기에서 문학 작품을 읽으며 인간에 대해 탐구하고 세계의 비밀을 엿보는 즐거움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체감상 ~같은, ~처럼, ~한 듯한 등의, 문장에 프릴을 단 것 같은 관용적인 표현이 넘치는 것도 무의미한 수사의 향연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후반부 유진이 담당한 사내 도서관 이름이 "마음 산책"이라는 부분에서는 수십 년 된 출판사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쓰다니 싶어 당황스러웠는데, 심미성이나 의외성이 전혀 담기지 않은 겉핥기 위로 같은 책과는 어울렸던 것 같다. 

 

어떤 작가든 창작의 고통은 클 것이고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쓰는 과정 역시 그랬겠지만, 미안하게도 읽는 내내 굳이 계속 읽어야 할까 싶은 마음을 무시하며 책장을 넘겨야 했다. 누군가는 이 책의 이야기들로부터 큰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젊은 독자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소구력을 발휘하는 것인가 싶은 의문이 남았고 띠지에 크게 적힌 "2022년 상반기 기대작 1위"라는 문구도 의아해졌다. 다 읽고서야 불필요한 독서였다는 걸 깨달은 경우였고, 제목만 보고 경솔하게 선택한 실수의 독서였다. 

 

 

김지혜
2022.5.12초판1쇄발행, 팩토리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