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일지

첫날

나어릴때 2022. 10. 1. 17:55

 


어제 오후에 모르는 010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보통은 받지 않는데, 마침 주문했던 노트북 받침대 대신 배송된 엉뚱한 제품을 반품하느라 경비실에 맡기고 나온 터라 혹시 택배기사님인가 하며 받았다. 전화를 건 주인공은 뵌 지 십 년도 넘었을 R선배, 내일 사량도에 갈 예정이라며 함께 가자시더니 출퇴근 때문에 어렵다니 시간 되면 차 한 잔 하자고 하셨다. 나의 광주 지인과 친한 사이라 함께 사량도에 가자고 연락했다가 내 소식을 들으셨다며 느닷없는 연락을 주신 건데, 너무 갑작스러웠지만 좋은 분이기에 부담스럽거나 불편하지 않아 그러마고 했다. 

 

오늘 아침, 김창완 아저씨의 라디오를 틀어 놓고 느긋하게 움직이던 중 전화를 받았다. 고성항에서 차를 싣고 들어가려니 11시 배밖에 없어 내일 7시 배를 예매했다며, 혹시 괜찮으면 통영으로 오시겠다고. 전날 사량도에서 나오며 연락하겠다고 하셨던 터라 내심 당황했지만 고성에서 굳이 오시겠다는데 거절하기는 죄송해서 용화사공영주차장에서 뵙기로 했다. 덕분에 평소보다 2시간 일찍 주차하러 갔더니 더워지기 전이라 벤의 컨디션 최고조, 얼마 전 포착하지 못해 아쉬웠던 귀여운 순간이 재현되었고 R선배를 기다리며 벤과 놀면서 잠시 즐거웠다.

 

문 연 카페 찾기 애매한 시간이고 마주앉아 도란도란 수다를 떨 친분이 아닌 데다 R선배는 사량도 지리산 산행 준비를 한 차림이어서 용화사로 향했다. 용화사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산길을 걸어 미래사까지, 그리고 미륵산 정상 안내판이 있는 평상에서 R선배가 싸온 토스트와 사과를 나눠 먹고 내가 챙겨갔던 팥양갱과 흑미차를 드렸다. 퇴직 후 가족들과 강화도에서 카페를 여셨다는 몇 년 전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었는데, 올초부터 사천에 혼자 내려와 모 공사가 발주한 사업의 감리일을 하고 계시고 연말까지 예정이라 가까운 섬들에 가 볼 계획이라고 하셨다. 책방을 준비하고 있다니 나는 책으로만 알고 있는 강화도의 동네책방 이야기도 해주시고 다 읽으셨다며 배낭에서 [하얼빈]을 꺼내 건네주셨다.

 

1시간 반가량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딱히 친한 적이 없고 십여 년만에 만났음에도 자연스럽고 편안해서, 예전에 엄기호님의 어느 책에서 읽은 걸으며 이야기 나누는 일의 효용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봉평동에 언제 또 올지 모르니 시간이 되면 들러보시라고 봄날의 책방이랑 전혁림 미술관을 알려드렸고, R선배는 미륵산 등산을 위해 나는 공간으로 출근하기 위해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잠시 함께하는 동안 시간 내줘서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셔서 민망했는데, 좀 아까는 좋은 곳 알려줘 고맙고 하는 일 잘 되길 바란다며 문자를 보내셨다. 문자의 시작이 '신동지'여서 이게 대체 얼마만에 듣는 호칭인가 싶었지만, 백만 년만의 오전 산행만큼이나 신선한 느낌이었다.

 

공간에 도착해 어제에 이어 책 정리를 하다가 오후 2시 부산국제영화제 예매권 추가 예매를 정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10월 첫날의 시작이 상쾌했기 때문에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GV 상영 하나만 성공하면 더욱 상쾌하겠다고 생각하며, 지난번처럼 초단위 시간을 확인해 시도했는데 성공해버렸다. 내처 시도한 [클로즈]는 실패했지만 감독의 전작이 개봉했었으니 극장에서 볼 수 있겠거니. 원픽을 놓치고 대신 예매했던 [행운]의 주술이 통한 건지 좀은 난데없는 연락을 반갑게 받아들인 착한(?) 마음이 보답을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다렸던 10월의 첫날이 매우 기분 좋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