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

[캐논볼]

나어릴때 2021. 8. 30. 18:00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주 다퉜고 진심 싫을 때도 많았던 형이 군대에서 죽은 뒤 현우는 혼란에 빠졌다. 형을 납골당에 안치한 후 몸이 아픈 엄마는 입원하고, 형이 남긴 음성 일기를 들으며 현우는 부유하듯 학교와 집을 오간다. 어느 날 아주 가까이에 가해자의 가족이 있다며, 인터뷰에 응하면 알려주겠다는 기자의 접근으로 현우의 세계는 더욱 엉망이 된다.


동글둥글하던 동생이 군대에서 살인자가 된 후, 교사인 연정의 일상도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경찰이 학교에 찾아오고 집 앞에는 대여섯 명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쫓아오는 기자를 피해 장 본 짐들을 버리다시피하고 찾아간 지구대에서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연정은 혼란에 빠져 있다.


담임교사와 학생인 두 사람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이 되었다. 형을 죽인 가해자가 담임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현우는 연정에게 묻고 싶고 하고 싶은 말들이 있다.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가해의 원인제공자였을 수도 있는 형이지만, 세상에 대한 갑갑함을 토로하고 죽고 싶다는 말을 되뇌이는 음성 일기를 들으면서는 미처 몰랐던 형의 모습을 떠올리는 현우의 곁에는 속내를 터놓을 이가 아무도 없다. 


연정은 완강한 태도로 접근하는 현우를 피할 수 없고 어디에 하소연을 할 수도 없다. 현우의 부탁과 제안에는 악의가 없지만, 연정에게는 그 자체로 부담과 위협이다. 사건과 무관하고 아무런 책임도 없지만 너무나 깊이 엮여 있는 두 사람이 느끼는 곤혹스러움과 난처함은,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당연하게도 한편 부당하게도 보인다. 바다에 가자는 갑작스러운 연락을 거부할 수 없었던 연정은 현우와 동행하지만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현우에게 형에 대한 나쁘지 않은 기억이라고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모습뿐이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정에게 동생은 혼자 맥주 마시는 누나를 핀잔하며 식탁에 마주 앉던 평범한 청년이었지만, 내막을 알 수 없는 사건의 가해자로 앞날이 막막한 수감자가 되었다. 현우의 말대로 둘 다 원한 게 아님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은 가혹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과 복잡한 감정에 휘말린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순간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곤 하는 현우의 모습은,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는 어린 영혼의 몸부림처럼 보인다. 가깝고도 멀었던 형의 죽음을 인정하고 온전히 애도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마음을 나눌 곁의 존재가 현우에게는 절실히 필요했던 것 같다. 연정이라도 있어 다행이었지만 하필 가해자의 누나이고, 어쩌면 가해자의 누나였기에 그나마 현우가 어지러운 마음을 부려놓을 수 있었던 것도 같다.

마지막 면회 장면은, 개인적으로는 그냥 마주하는 시점에서 끝났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바다가 끝인 것 같다가도 그 너머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러나 결국 이 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장면 그리고 “산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을 연정이 현우에게 들려주고 또 애도의 시간을 완주한 현우가 희철에게 돌려주는 장면 등은 영화를 끌어온 거대한 긴장과 갈등을 봉합하는 하나의 장치일 수도 있겠지만 다분히 관습적이고 교훈적인 마무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전복적인 사건 위에서, 가해와 피해라는 대척점에 놓인 두 인물의 관계와 감정을 따라가는 전개가 별로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건 영화 자체의 높은 몰입도 덕분이었던 것도 같다. 어쩌면 무리수일 수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한 대신, 불필요한 곁가지 없이 인물에 집중하는 덕에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볼 수 있었다. 클로즈업이 꽤 많았던 것 같고 처음에는 문어체에 가까운 대사나 연극 같은 연기톤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필요했던 것 같은데, 보다 보니 어색함이 사라졌달까. 

소재가 된 사건은 뉴스로도 간혹 접하는 일이지만 주요 인물의 관계는 영화여서 가능한 구성이다 싶은데 그럼에도 가족과 군대, 가해와 피해, 원인과 결과, 책임의 경계 같은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부재하는 가족이 야기한 사건으로 인한 피해의 책임을, 남아있는 이들은 어디까지 져야 하는 걸까.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이 곧 서로에게 가해자와 피해자일 수는 없고 연좌제도 사라졌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제도의 공고함 앞에서 논리나 이성이 빛을 잃는 게 현실이기는 한 것 같다. 한편 군대와 총기라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극이라는 점에서, 역시 문제는 군대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딴 소리. 현우를 연기한 김현목 배우의 이름은 내게 낯설었지만 얼굴이 눈에 익어 찾아 보았더니,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 [출사표]에서 흙수저 9급 공무원 역할을 했던 연기자였다. 언제 촬영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연기가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드라마에서 봤던 모습이 얼핏 떠올라 신기했다. 독립영화를 많이 찾아보지 않은 탓이 크겠지만 김현목 배우를 빼고는 모두가 나로서는 초면이었는데, 주요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은 나름의 강렬함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후 다른 영화들에서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8/25 cgv서면 art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