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스
부산국제영화제 폐막 전날 나의 마지막 영화를 보기 전 괜히 아쉬워서 굿즈샵을 둘러보다가 주문제작 휴대폰케이스를 구매했다. 디자인을 선택하고 들어갈 내용을 온라인으로 입력하면 제작해서 보내주는 형식이었는데 오늘 도착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죽은 친구를 구하는 법]을 선택했고, 사랑하는 친구를 떠나보내고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담긴 촬영본으로 어렵사리 영화로 완성했을 감독을 생각하며 괴롭고 힘든 일들을 이겨내야겠다는 어줍잖은 생각을 했었다. 영화제 다녀온 직후부터 언제 그런 행복한 날이 있었냐는 듯 침잠한 채로 마음을 벅차게 만들었던 기록들도 손대지 못하고 있는데, 도착한 케이스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지금 쓰는 휴대폰은 통영 이주한 다음 해 봄에 오빠가 선물해줬는데 좋아하는 무민 케이스를 구입해 입히고 무척 마음에 들어하며 잘 사용해왔다. 휴대폰도 케이스도 잘 바꾸지 않는 편인데 약간 이례적인 시도를 해보니 조금 새로운 마음이 들고, 새 술은 새 부대에 같은 속담이 떠올랐다.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에서 리키와 아들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를 때 휴대폰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 이미 꽤나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휴대폰의 의존도 같은 걸 새삼 느꼈었다. 영화에서는 젊은이인 아들 한정으로 휴대폰이 곧 존재 자체라고 아내가 표현하지만, 스마트폰을 사용한 지 10년이 넘어가면서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느낀다. 타인과의 소통은 드문하지만 갖은 메모와 쇼핑과 일정이 담긴 수십 개의 앱이 지금의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증명할 것이고, 그렇다면 새 케이스를 입은 기념으로 휴대폰에 담기는 마음과 일상을 조금은 일신할 필요가 있겠다.
오후에 은행 갈 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주차한 공설운동장 앞에서 수정잉어빵 노점을 발견했다. 얼마 전 공방 부부와 붕어빵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올라 사와서 함께 나눠 먹었다.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몇 년 만에 먹으니 맛있었고, 공방 부부가 좋아해서 잘한 일이다 싶었다. 내일은 금요일, 기꺼이 다정함을 나누고픈 이들만 주변에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게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니 사흘간 마음을 잘 달래며 지내야 할 때가 왔다. 가장 자주 접하는 오브제인 휴대폰의 새 케이스가 새로운 기운을 선사해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케이스를 다시 보니 언젠가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싶은데, 작년 영화제 때 푹 빠져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다리는 중인 [6번 칸]도 개봉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기대해도 될지 모르겠다. 아침에 김창완 아저씨 라디오에서 "내 마음 깊은 곳의 너"를 오랜만에 들었다. 좋아하는 친구랑 야자시간에 몰래 학교 공중전화 부스에서 이 노래를 함께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신해철 님은 하늘에서, 효정이는 어딘가의 땅에서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