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허밍이라기엔 조금 튀는 소리를 계속 내는 소녀, 뭔가 불만이 있는 표정이다. 운전하는 아빠는 그 소리가 거슬려 볼륨을 거듭 키우고 그럴수록 소녀가 내는 소리도 커져간다. 신경전을 벌이던 아빠는 그만하라고 언성을 높이지만 소녀의 소리는 잦아들지 않고, 달리던 차는 다른 차와 충돌한다. 사고로 크게 다친 소녀는 대대적인 수술을 통해 살아났고 성장했다. 몸 속에는 티타늄이 박히고 오른쪽 귀 뒷부분의 피부에는 나이테 같은 수술자국이 선명하다. 성인이 된 소녀의 이름은 알렉시아다.
알렉시아는 댄서다. 섬광처럼 화려한 조명이 명멸하는 모터쇼에서 춤을 춘다. 무표정한 얼굴과 도발적인 몸짓, 그러나 맹렬히 작동하는 기계 같은 춤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공연이 끝난 뒤 샤워실에서 만난 또래의 댄서가 자신을 소개하며 말을 건네지만 경계하듯 응대하던 알렉시아는 답하지 않는다. 공연장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 한 남성팬이 차까지 쫓아온다. 닫힌 차창 밖에서 집요하게 말을 걸며 버티는 남성, 차창을 내리고 무심한 대화가 이어지던 중 남성은 알렉시아에게 키스한다. 호응하듯 키스를 나누던 알렉시아는, 말아올린 머리카락을 고정한 쇠꼬챙이로 남성을 찔러 죽인다. 낑낑대며 시신을 차 뒷좌석에 실은 알렉시아의 얼굴은 그저 무거운 것을 힘껏 옮기고 난 사람의 표정이다.
티타늄이 심어진 몸으로 살아가는 알렉시아의 오감은 금속에만 열렬히 반응한다. 안면을 트고 가까워진 또래의 댄서와 애무하던 중 유두의 피어싱을 빨고 물어뜯으며 집착하는 모습은 본능에 무장해제된 상태처럼 보인다. 배기음과 진동, 헤드라이트 불빛이 강렬한 차 뒷좌석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고 절정에 도달하는 알렉시아의 모습은 기괴하고 섬뜩하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이는 밖에서와 달리 부모와 함께인 알렉시아는 평범해 보인다.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배가 아프다는 딸을 건성으로 살피고 마는 아빠의 무관심은 계속되는 것 같지만 알렉시아 역시 개의치 않는 듯하다.
집밖의 알렉시아는 여전히 괴물이다. 댄서와의 섹스 도중 갑자기 그를 죽여버리고, 거실의 소란에 기척하며 나타나는 동거인들을 차례로 죽이며 "도대체 몇 명이 있는 거야" 내뱉는 알렉시아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처럼 보인다. 반복된 살인으로 피 묻은 옷가지들을 챙겨 집으로 돌아온 새벽, 부모가 잠든 침실에 들어가 안에서 문을 열 수 없도록 만들고 방을 나오는 알렉시아는 무심하고 침착하다. 옷가지들을 태우려 지하실에 피운 불은 집 전체로 번지고 부모를 삼킬 것이다. 집을 나와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얻어탄 알렉시아는 어느 역사에 도착했다. 후드를 뒤집어썼지만 얼굴에는 무표정으로 감출 수 없는 기진함이 가득하다.
알렉시아는 범죄 용의자로 수배됐다. 역사 곳곳의 스크린에는 오래 전 실종된 가족을 찾는 이들의 정보와 실종자의 사진들 그리고 지명수배된 알렉시아의 사진이 교차되고 있다다. 그중 실종된 지 10년이 지난 아드리앵은 가족의 수소문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소년, 알렉시아의 집 tv 모니터에도 그를 찾는 안내가 나왔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알렉시아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여러 차례의 고통스러운 시도 끝에 코뼈를 부러뜨리는 데에 성공한다. 아드리앵이 되기로 한 알렉시아는,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와 부러져 멍들고 부은 코를 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는다(미안하지만 이 부분에서 나는 소름이 끼쳤고 알렉시아의 집요한 생존 욕구를 속으로 원망했다. 동시에 그의 생존 욕구를 미워하는 나의 마음이 불편해서 더욱 불편해졌다.).
뱅상은 오랫동안 찾고 있던 아드리앵을 10년 만에 만났다. 아들을 몰라볼 리 없으므로 유전자 검사 따위는 불필요하다. 뱅상의 차 조수석에 앉은 알렉시아는 말이 없다. 뱅상은 카리스마 넘치는 베테랑 소방구급대장, 그의 집은 구급대의 사택이다. 아들을 찾아 돌아온 뱅상을 밤 늦게까지 기다린 한 대원은 식사를 챙겨 전한다. 마구 잘린 머리도 상처 입은 얼굴도 사연이 있어 보이지만, 뱅상은 말 없는 알렉시아를 채근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기적처럼 살아돌아온 대장의 아들은 구급대원들 사이의 화제가 되지만, 뱅상은 대원들의 궁금증이나 의문을 일거에 제압하며 알렉시아가 편안히 섞여들 수 있도록 한다.
알렉시아와 뱅상의 동거는 객석에 긴장을 유발한다. 뱅상은 갈아 입은 옷 사이에서 발견한 쇠꼬챙이를 알렉시아의 방 앞에 놓아둔다. 마주앉은 식탁에서 먹는 데에만 집중하는 알렉시아는 아드리앵으로 살아가기 위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뱅상은 그런 알렉시아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안정감을 주기 위해 애쓴다. 구급대의 출동에 동행시키기도 하고 매일 힘겹게 엉덩이에 스스로 찔러야 했던 주사기를 알렉시아에 맡기기도 하며, 뱅상은 조금씩 알렉시아와 가까워지려 한다. 뱅상의 믿음과 보살핌에 무반응인 듯 보였던 알렉시아의 마음에도 아주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알렉시아가 거슬리는 존재를 처리하는 가장 쉬운 방법,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전과 달리 그는 멈칫하며 포기했다.
뱅상과 함께하며 집밖에서도 평범한 날들을 보내는 알렉시아에게는 비밀이 하나 더 생겼다. 임신이다. 정체와 성별에 더해 불러오는 배 역시 감춰야 할 일이 된 알렉시아는 가슴에 동여맸던 압박붕대를 배에까지 두르며, 이따금 찾아오는 통증을 홀로 감당하느라 고통스럽다. 알렉시아의 정체를 확신한 구급대원이 용기를 내 언질하지만, 뱅상은 무시한다. 어느 날 헤어진 아내, 아드리앵의 엄마가 집에 초대된다. 침묵의 식사가 끝난 뒤 알렉시아의 방에 찾아온 '엄마'는 임신한 여성인 알렉시아를 목격하지만, 뱅상에게는 구원인 믿음을 깨지 않으려는 듯 그를 끝까지 지키라는 말만을 남긴다. 구급대 파티에서 알렉시아는 대원들의 성화에 구급차에 올라 결심한 듯 혹은 홀린 듯 춤을 춘다. 임신한 여성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몸짓에 파티장은 얼어붙고 우연히 그러나 정면으로 그 모습을 마주한 뱅상은 뒤돌아선다.
뱅상도 알렉시아도 누군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었다. 10년간 줄기차게 찾았고 마침내 돌아온 아드리앵은 벽장에 웅크린 채 불길에 휩싸인 화재 현장의 실루엣처럼,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떠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들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는 뱅상의 절박함은 그가 누구든 아드리앵을 자처한 존재라면 환대하고 인내하며 돌보는 것으로 승화된 것인지 모른다. 연쇄살인과 친족살인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알렉시아의 아드리앵 노릇은 다만 생존 욕구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혈육의 따뜻함이나 사람 사이의 정 같은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알렉시아에게 인간과 세계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용하고 파괴할 대상일 뿐이었다. 우연이지만 운명처럼 아드리앵과 뱅상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알렉시아가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병으로 욕실에 쓰러져 있던 뱅상을 발견한 알렉시아는 그에게 '말을 걸고' 돌보고 살려냈다. 일생에 없었던 낯선 일이었을 것이고, 교감과 돌봄을 통해 느꼈을 온기 역시 적응이 필요했을 것이다. 뱅상을 통해 속하게 된 구급대 역시 알렉시아가 처음 만난 '보통의 세계'였을지 모른다. 긴장감과 적대감만 팽배했던 이전과 달리, 평범한 사람들이 희노애락 속에 관계를 맺고 일하고 섞여 살아가며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일어나는 평범한 세계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고 인내하며 신뢰하는 대장, '아빠' 뱅상이 있다. 의심할 만한 정황들과 몇 번의 고비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든든한 보호를 확인시켜주고 제공하는 사람, 알렉시아가 선택한 누군가가 뱅상이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시아의 몸에 심어진 금속, 티타늄은 의학적 처치의 결과일 뿐이기도 하지만 비상식적인 자극과 이상 행동,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의 연원처럼 간주된다. 몸에 탑재된 금속과 인격 장애의 인과관계를 상정하는 것보다는, 시종일관 알렉시아를 차갑고 무관심하게 대했던 의사 아빠와 강인하고 차가운 금속의 속성을 연결시키는 것이 영화가 상징하는 바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지속된 냉대와 무관심이 내면화되고 장기처럼 굳어져 괴물화된 인간. 그렇게 보더라도 전반부에 펼쳐지는 알렉시아의 연쇄 살인과 패륜을 납득할 수는 없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듯 보이는 존재에게도 그의 잘못만은 아닌 이유와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는 정도의 이해는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후반부의 이야기들이 진행되면서 (내용은 이미 까먹은 김연수 작가의 소설 제목)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라는 문구가 뇌리를 맴돌았는데, 알렉시아의 존재를 긍정하는 뱅상의 대사 중 몇 번이나 "네가 누구든"이라는 자막이 떠올랐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내 아들이다", 아닌 줄 뻔히 알면서 한치의 의심도 흔들림도 없이 전하는 말에 담긴 믿음의 깊이는 도저한 것일 테다. 따뜻함과 사랑을 제대로 받을 줄도 전할 줄도 모르며 살았을 알렉시아가 뱅상의 진심을 가슴 깊이 느끼고 의지하는 장면에서야 그가 오래 고통받아온 외로운 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묻지 않은 이름을 먼저 말하는 것은 알렉시아로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이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침대로 파고들어 뱅상에게 키스하려는 알렉시아의 행동은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었기에 서툴고 부적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려나 끝까지 알렉시아를 지키는, “내가 있어”라는 뱅상의 마지막 말은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의 인간선언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을 장식할 때 보통은 희망을 상징하는 새 생명의 탄생이 이 영화에서는 대단히 다양한 방향의 열린 결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알렉시아의 임신은 어떤 사회적 의미도 없이 고통과 이상 증세를 거쳐 기형의 전승으로 이어진다. 뱃속의 아이는 태동을 하면서 엄마의 배를 찢고 그 아래로는 차가운 금속성의 표면이 드러난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성인이 된 후 파괴적으로 표출하며 살아온 알렉시아는 결국 괴물을 잉태한 것인지도 모른다. 뱅상이 베푼 관심과 보호와 신뢰를 통해 제 손으로 죽인 아빠로부터 받은 상처와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조금씩 벗어나지만, 알렉시아가 온전히 인간성을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금속 척추로 태어난 아이는 태생의 괴물성을 물려받고 만 것일까, 뱅상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알렉시아가 극복하지 못했던 어둠을 떨쳐낼 수 있게 될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소식, 개봉을 앞둔 된 홍보 기사들을 접하며 볼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몇 줄로 요약된 내용은 별로 새롭지 않았고, 영화를 수식하는 자극적인 단어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뱅상 랭동이 주연이라는 점 때문에 놓치면 아쉬울 것 같았다. 오래 전 [웰컴]에서 그를 처음 보았고 몇 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앳 워]를 본 게 전부지만, 특히 [앳 워]의 캐릭터와 연기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연배나 필모그래피로 볼 때 프랑스의 대표적인 중견 배우 중 한 사람인 것 같은데 [웰컴]과 [앳 워]를 비롯해 맡는 역할들을 살펴 보았을 때 훌륭하지 않을 리 없는 배우라는 단세포적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금기와 파격 같은 걸 선호하지 않지만 젊은 감독의 '새로운' 영화를 택한 그의 선택을 믿기로 했고, 극중 이름 역시 '뱅상'이라는 점이 내 믿음에 좀 더 힘을 실어주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영화 천 편은 훌쩍 넘게 봤을 텐데 충격 원탑이었다. 영화 보면서 마음 속으로 “하지마”를 수십 번 외친 것도, 영화를 보는 내내 온몸의 긴장을 풀지 못한 것도 처음이다. 공포나 호러는 물론 범죄 액션 스릴러 영화도 거의 안 보는 치우친 취향인 탓에, 폭력 장면에 대한 내성이 매우 낮은 수준이기는 하다(높아야 할 필요는 알지 못한다.). 한참 전 극장에서 [복수는 나의 것]을 보며 심히 괴로웠고 [올드 보이]로 박찬욱 감독 영화와 이별했는데, 그 정도가 내가 겨우 수용할 수 있는 폭력의 임계치다. 소메타니 쇼타를 놓칠 수 없어 미이케 다카시의 [퍼스트 러브]를 본 게 기억하는 가장 최근의 자극이다. 영화를 본 후 굉장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극단적인 폭력 장면들이 끔찍해 견디기 어려웠지만 중반부 이후에는 완전히 몰입이 됐고 결국 조금 눈물이 났기 때문에, 이 영화를 온전히(?) 납득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이렇게 긴 글이 탄생했는데, 실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본 것에 가깝다.
홍보 자료의 한줄평들이 증언하듯 영화는 상상력과 스타일과 표현 방식이 압권인 작품이다. 줄줄이 복기하며 읊어대기에, 뼈대가 되는 서사와 전개는 그야말로 전형적이다. 상처받은 영혼의 일탈과 폭력 그리고 치유, 그 상대 역시 커다란 공허와 깊은 상실의 보유자로서 상처받은 영혼을 돌보고 수용하며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구원자 또는 치유자로 거듭난다는 식의 이야기는 자주 만날 수 있는 극복 혹은 성장의 서사다. 알렉시아 캐릭터에 새겨넣은 극단적인 상상력과 미친 텐션을 통해 영화는 새로움을 획득하는데, 그 부분이 나로서는 꽤 난망하고 소화 불량이었다. "괴물성은 규범이라는 벽을 밀어내는 무기이자 힘이다. 괴물들을 받아들여 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한다."라는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칸 영화제 수상 소감을 영화 소개에서 보았는데, 결국 시각과 청각이 주효한 매체인 영화에서 괴물성이라는 것은 이토록 선정적이고 자극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싶어지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까지 인상적이면 보통은 다시 보고 싶어지는데 통영에서는 볼 수 없으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럴 용기를 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니 나의 [티탄]은 오래 기억될 충격과 사랑 쯤으로 정리해야겠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넘어 잠들었음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조조 상영 관람을 성공시킨 원동력, 뱅상 랭동 아저씨의 영화들을 dvd로라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2/21 cgv서면 임권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