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

[페어웰]

나어릴때 2021. 2. 4. 23:56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독립해 홀로 사는 빌리는 이따금 의기소침하고 쪼들리는 예술가, 구겐하임 미술관 펠로우십에 떨어졌다는 안내문을 받고 심란하다. 부모님의 집에서 접한 더 심란한 소식은, 중국에 계신 할머니가 폐암이며 앞으로 사실 날이 길지 않다는 것. 미국과 일본에서 각각 살아가던 가족들은, 살아생전 할머니를 뵙기 위해 급하게 손자 하오하오(빌리에게는 사촌동생)의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빌리는 부모를 따라 여섯 살에 미국에 왔지만, 할머니와 전화로 일상을 공유하는 각별한 관계다. 가족들은 할머니에게 병을 숨기기로 했고, 할머니에 대한 정이 유난하고 감성적인 빌리가 그 비밀을 함께 지킬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시한부 판정의 당사자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 그러나 모든 가족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일단은 따르겠다는 마음, 무엇보다 할머니는 만나고 싶은 빌리는 가족들 몰래 중국으로 간다.

25년 만에 모인 가족들의 식사 자리에 예정에 없이 빌리가 출현하고 가족들 사이에는 긴장감과 어색함이 흐른다. 여전히 강하고 부드러운,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들뜨고 행복한 할머니를 보며 빌리는 감정을 숨기느라 애쓴다. 비밀에 부치기로 한 가족들이라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잘 멎지 않는 기침에 시달리면서도, 큰 아들이 사온 새로운 약을 좋은 비타민인 줄 알고 먹는 할머니만이 마냥 기쁘고 벅차다.

할머니는 가모장이다. 자식과 손자 들에게 다정하지만, 대장부처럼 강단이 넘치는 성격. 아침마다 집 앞에서 남의 시선 의식 않고 "하" "하" 소리 치며 나쁜 기운을 내보내고, 제법 높은 빌라를 계단으로 오르내리며 건강을 챙긴다. 손자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 모든 걸 진두지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가족들은 착잡한 마음을 숨긴 채 할머니와 함께한다. 할머니가 없는 자리에서는 때로 감정적인 토론이 벌어지지만, 정말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야 병을 알리는 것이 중국의 문화이고 할머니도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했다는 이모할머니의 말을 받아들인다. 이모할머니는 해외로 나간 자식들 대신 가까이에서 언니를 돌보고, 병원에서는 보호자 역할도 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담당의조차 환자의 병명을 숨기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따라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묘소에서 전통 예법에 입각한 낯선 인사를 드리고, 결혼식을 앞두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문화적 차이를 체감하며 예민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할머니의 바람대로 결혼식은 일가친척은 물론 생면부지의 수많은 지인들로 시끌벅적하게, 거나하게 흥이 오른 동네잔치처럼 치뤄진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의 정점, 가족들은 각자의 슬픔을 감추기 위해 애쓰거나 기쁨의 눈물을 가장한다.

병을 비밀에 부치는 걸 누구보다 속상해하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빌리는 결국, 중국에서는 당연하다는 그 관습과 가족들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존중하기로 한다. 빌리는 결혼식 도중 전날의 진료 결과가 할머니에게 그대로 전달될까봐, 병원으로 헐레벌떡 달려간다. 결혼식을 마치고 위조된 결과지를 함께 확인한 할머니는 호언장담으로 가족들을 안심시킨다. 비로소 집단의 공모가 완성되었다. 어설픈 범죄집단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위풍당당하게 전진하는 가족들, 영화에 배인 분위기처럼 웃픈 슬로우씬이 인상적이다.

잔치가 끝난 뒤 떠나는 가족들을 배웅하는 할머니는 다정하고 의연하다. 소시적 전쟁에서 총에 맞아 부상한 전사였던 할머니는 남다른 강인함과 독립성으로(물론 너무 귀엽게 생기신 동생, 이모 할머니의 보살핌과 있는 듯 없는 듯 할머니와 함께 살며 외로움을 달래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영감 할아버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권위와 자존심, 고향의 안온함을 동시에 상징하는 인물이다. 여섯 살 때 헤어져 미국에서 외롭게 성장한 빌리에게는 더없이 너르고 따뜻한 품이며,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의기소침한 빌리의 삶을 무한히 응원하는 화수분이다.

마음의 집에 할머니를 두고 돌아가는 날, "come healing"이 흐르는 가운데 어렸을 적의 풍경이 사라진 도시를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빌리의 얼굴은 망연하다. 하지만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할머니로부터 받은 긍정과 활기는 빌리의 마음 깊이 남았을 것이다. 적막한 공간에 날아들어 웅크려 있곤 하던 참새 한 마리, 자신을 보는 것처럼 함께 쓸쓸한 표정을 짓던 빌리는 조금씩 나아질 것 같다.

 

영화는 실제 거짓말에 기반해 만들어졌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감독의 경험을 녹여낸 영화의 주요 사건은 할머니의 시한부 판정과 이를 숨기기 위한 가족들의 거짓말, 그중에서도 감독의 페르소나일 빌리와 할머니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 위에 이민자 가정에 투영된 다양한 가치, 세계관의 갈등과 공존이 적절히 더해진다. 함께한 시간과 사회문화적 차이를 넘어, 지난한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가모장의 권위와 내리사랑에 부응하는 가족들의 감정적 분투가 따뜻하고 애틋하다.

 

영화의 진정한 압권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짧은 쿠키영상이었다. "하" "하" 단전에서 끌어올린 당찬 기합을 내뿜는 감독의 진짜 할머니, 그리고 영화는 진단 후 6년이 지났고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시다고 전한다. 잔잔하지만 깊은 감정에 푹 빠져, 빌리의 마지막 눈빛과 함께 애잔하게 내려앉던 마음이 일거에 유쾌해지는 기분.

익숙한 피아노 선율로 시작되는 엔딩곡은 "senza di te"("without you"), 잔잔하게 흐르던 노래의 2절 후반부에서 온가족의 합창인 듯 즐거운 불협화음이 시작된다. 따뜻하고 절절한 엉망진창의 서로에게 보내는 웃음과 훈훈한 박수, 눈물과 웃음을 함께 선사한 영화와 어울리는 마무리였다.


2/4, cgv거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