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오르기와 리사는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순간 서로에게 반하고 다음 날 만날 약속을 한다. 두 사람이 스쳐지나며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 책을 주워주며 교감하는 순간은 로맨스 영화에서 자주 반복된 장면이지만, 여기에서 카메라는 두 사람의 표정이 아닌 다리와 땅을 비춘다. 리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네 친구를 만난다. 작은 묘목과 홈통, 관제기 그리고 바람, 조용하고 외진 거리에 존재하는 친구들은 리사의 마음에 이는 파동을 알아채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온 리사는 어둠 속에서도 느껴지는 기대와 떨림 속에, 늦게 귀가한 친구와 자신에게 찾아온 설레임을 나누고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깨어난 리사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 외모는 물론 의대생이자 약국의 아르바이트생이던 일상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지식도 사라져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은 기오르기에게도 동시에 일어났다. 아침에 일어나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기오르기, 축구공을 달라며 여느 때처럼 창 밖으로 찾아온 동네 아이들도 낯선 사람을 발견한다. 축구선수인 기오르기는 혼란 속에 훈련장으로 출근하지만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기오르기와 리사는 전 날 이야기한 대로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간다. 조명을 밝힌 강변의 카페에는 적잖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떨어진 자리에 각각 홀로 앉은 기오르기와 리사는 당연히,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 결국 각자 발길을 돌리는 둘의 마음은 하나같이 상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가득하다.
기오르기와 리사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이들은 새로운 일을 찾아나섰다. 리사는 기오르기와 만나기로 했던 새로 문을 연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기로 했다. 카페는 손님이 별로 없고 사장은 손님을 끌거나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 카페 근처의 거리에서 소소한 야바위를 연다. 우연히 엮여 사장을 돕게 된 기오르기는 그곳을 지키며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이런저런 내기를 권하는 일을 시작한다. 기오르기와 리사는 자신에게 일어난 비밀의 무게에 눌린 듯 조용히, 하루하루 살아간다.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지척에서 일하며 때로는 멀리에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어떤 때는 마주치기도 한다.
인적이 드물고 거리도 한산한 동네에 활기를 선사하는 것은 축구다. 지역 연고팀이 있지만 월드컵 때 자신의 나라를 응원할 수는 없는 사람들은, 축구 경기가 열릴 때면 동네의 카페에 모여들어 응원을 한다. 새로 문을 연 카페도 야외 관람을 위한 준비를 하지만, 동네에는 오래 전부터 응원 장소로 사랑받는 다른 가게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승리를 기뻐하며 다음 날 아이들은 맨 등에 페인트로 메시의 이름과 번호를 그린 채 동네를 몰려 다닌다.
즈음 어딘가에서는 부부 감독이 한 편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거리에서 마주친 커플들의 사진을 모으고 다섯 커플을 선별해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으려 한다. 그들을 돕는 사진가 안나가 기오르기와 리사가 살고 있는 동네에 왔고, 거리를 다니며 커플들의 사진을 찍는다. 그가 강변의 카페로 왔을 때 기오르기와 리사도 그곳에 있었고, 안나는 촬영을 제안한다. 기오르기와 리사는 커플이 아니므로 당연히 사양하지만, 당부에 마지못해 응한다. 그들의 처음을 지켜본 관객의 마음에는 긴장과 기대가 생겨나지만 그 일은 조용히 지나간다.
리사는 하루아침에 사라진 삶을 되찾기 위해 나름 애쓰고 있다. 함께 사는 친구도 방법을 찾으며 리사가 겪은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를 누군가를 수소문하고, 반신반의하며 그를 찾아가기도 하지만 별 수확은 없다. 어정쩡한 사진 촬영으로 안면이 생긴 기오르기와 리사는, 어느 날 사장의 부탁으로 함께 케이크를 찾으러 간다. 케이크를 파는 곳은 시내에서 떨어진 아름다운 농장,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이일 뿐이지만 화면 속의 둘은 제법 잘 어울리는 사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억하고 싶어 일어난 일들을 길게 적었지만, 영화의 사건들은 일어났다기보다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물간의 대화는 극히 적고,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질 때는 카메라가 인물과 배경을 함께 두고 멀리 빠지기도 한다. 기오르기와 리사의 잠시 반짝인 사랑과 가혹한 운명의 무게를 견디는 듯 고요한 일상이 영상을 채우지만 감독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것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영화는 조지아의 쿠타이시라는 구체적인 배경 위에 있고 월드컵이니 메시라는 동시대의 요소들이 등장하지만, 마법과 주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얽혀 있어 때로 시간을 초월한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별도의 제목 없이 1부와 2부로 나뉘어지고 각 부의 시작에는 원전이 명시된 문구가 하나씩 등장한다. 1부에는 갈가마귀 이야기가 있었는데 내용과 어떻게 연결지어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2부의 문구는 기억이 완전히 휘발되었다. 전체적으로 감독의 내레이션이 깔리는데 영화 안팎을 넘나드는 다양한 차원의 이야기들이 나직이 이어진다. 흐르는 장면에 대한 부연, 인물의 상황이나 사건과 배경에 대한 설명은 물론, 이방의 관객으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고유한 맥락과 관련된 추상적인 표현들도 있었다. '잔혹하고 무도한 시대'라는 말이 인상에 남았는데, 내가 모르는 그곳의 아픔들과 세계에 대한 감독의 사유와 성찰이 분방하게 담겨 있다고 느꼈다.
축구와 깊이 연루된 일상이 재현되면서 전통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축구를 시청하던 장소들과 거리의 '이름 있는' 개들 역시 자신의 의사에 따라 축구 경기를 보러 특정 장소로 이동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있었다. 동물과 인간을 차등없이 바라보고 동물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무언가를 즐기고 선택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과 별개로, 명확한 소통과 의사 타진이 불가능한 동물의 행동을 인간의 기준에 맞춰 해석하는 것이 어색하고 이례적으로 느껴졌다. 이후의 어떤 부분에서 동물계에 대한 만연한 폭력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내레이션을 보며 더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마지막에 다섯 커플 중 하나로 선택된 기오르기와 리사는 그들의 모습이 담긴 영화의 시사회에 초대를 받는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자신들, 여전히 낯선지 얼마간 적응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모습을 함께 본 그들은 영화가 끝나자 원래의 얼굴을 되찾고 서로의 존재를 알아본다. 알아챘거나 놓쳤거나 했을 마법의 요소들 중 사악한 눈의 저주가 떠올랐는데, 그것이 혹시 사랑에 빠지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한 유비였을까 싶기도 했다. 한순간 깊은 사랑에 휩싸인 기오르기와 리사는 평소 성격과 달리 과감하고도 자연스럽게 선뜻 약속을 정했고, 나타나지 않는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나 아쉬움보다 걱정과 믿음을 간직한다.
사랑하면 상대를 걱정하게 된다는 내레이션이 당연하게도 또한 새삼스럽게도 와닿았는데, 이후 '마법에 걸린' 두 사람에게서 그 사랑의 안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키고 견뎌냈기 때문에 동화 같은 해피엔딩을 감독이 선사한 걸까 싶기도 했다. 2시간 30분간 이어진 영화에서 감독의 목소리는 화이트 노이즈처럼 끊이지 않았는데, 때로는 두 사람에 밀착하고 때로는 두 사람을 잊은 듯 자신의 주관적인 세계관을 피력하던 내레이션의 마지막은 '어쩌면 이 영화는 아무튼 아무 쓸모 없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였다.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는데, 일기장을 펼쳐놓은 듯 그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범람시킨 영화의 피날레치고는 가볍고 부드러웠다.
하루에 몇 편씩 연달아 영화를 보게 되는 영화제에서 긴 영화는 가급적 피하려고 하는 편인데, 조지아 영화여서 선택했다. 지난해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를 보고 괜히 궁금해졌는데, 어떤 소개글이어도 제작 국가를 보고 선택했겠지만 강조된 로맨스 외에도 아주 많은 감독의 의도가 담긴 영화였던 것 같다. 사랑에 빠지자 사람이 바뀐다는 비현실적인 설정에 수긍하고 응시하는 화면 속 풍경들이 편안했고 슬픔과 충격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의 조용함에 마음이 끌렸다. 한 편의 꿈 같기도 하고 긴 시 같기도 했는데 구체적인 현실과 몽환적인 분위기가 잘 어우러졌기 때문인 것도 같고 그냥 내가 이 영화를 마음에 들어하기로 했기 때문인 것도 같다.
10/14, 롯데시네마 센텀시티6
https://www.biff.kr/kor/html/archive/arc_history_2_view.asp?pyear=2021&s1=360&page=&m_idx=548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