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셀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집안에서 어린 두 딸의 장난 같은 화장에 얼굴을 맡기고 신나게 놀아주던 산드라의 표정이 어떤 기척에 돌변한다. 이미 약속한 상황인 듯 큰 딸 에마에게 작은 상자를 건네며 '블랙 위도우'라는 암호를 전하고 황급히 내보내자마자 남편이 들이닥친다. 다짜고짜 달려들어 욕설과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하려다 거실 바닥에 넘어진 산드라는 공포에 질려 현관문을 향해 기어가지만, 사나운 발길질은 산드라의 팔을 짓밟는다. 큰 딸이 들고나간 '블랙 위도우' 상자에는 이웃에 도움을 청하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고, 곧 경찰이 출동했다.
평소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은 산드라의 이혼 요구에 격분해 다시 폭행을 저질렀고 산드라는 두 딸 에마, 몰리와 함께 집을 나왔다. 주거 수당으로 임시 거처인 호텔에 기거하며 투잡을 뛰면서 복지 센터와 상담 중이고, 앞으로의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오지의 의사였지만 병을 얻어 거동이 불편해진 툴린 박사의 집은 산드라의 첫 번째 일터, 돌아가신 엄마가 오래 일했던 집이다. 오후에는 불안정한 산드라의 사정에 자비 없는 주인이 운영하는 동네 식당에서 일한다. 아직 어린 두 딸은 엄마의 곤경을 알지 못하고, 산드라는 막막함과 상처를 감춘 채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언제까지 불편한 호텔에 머무를 수 없는 산드라에게는 아이들과 함께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집이 절실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딸들을 두고 앞날을 궁리하던 산드라의 시선이 아이들의 장난감인 레고로 만든 집에 가닿는다. 유튜브에서 적은 돈으로 집 짓는 영상을 찾아보던 그는 직접 도전해보기로 결심하고, 앞으로 받을 주거 수당과 호텔비 등을 계산해 나름 가능성을 확신한다. 하지만 수급자인 산드라에게 행정이 요구하는 것은 고분고분하게 정해진 대로 도움을 받는 것이지, 주체적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행히 주변의 호의와 우연한 행운이 산드라에게 찾아든다.
어느 날 산드라는 욕실에 홀로 쓰러져 위험에 처한 툴린 박사를 발견하고, 덕분에 위기를 넘긴 그는 까칠하게 자존심을 세우며 거리를 두던 이전과 조금씩 다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색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산드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오래 인연을 맺고 신뢰했던 산드라의 엄마를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자리를 비운 사이 산드라가 노트북에서 몰래 집 짓기 관련 내용을 검색한 것을 알게 된 그는, 산드라에게 자신의 마당을 집터로 내어주며 도움을 자청한다. 예기치 못한 선의에 감격한 산드라는 툴린 박사의 제안으로 집 짓기를 결심하고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주거수당 수급자인 산드라에게 집 짓기는 행정 당국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는 일이다. 정기적으로 아빠와 시간을 보내는 두 딸에게 '비밀의 집 짓기'를 단속하는 일부터, 완전히 문외한으로서의 도전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자재마트에서 우연히, 목수인 남편과 아는 사이인 기술자 에이도를 마주치고 작업실까지 찾아가 도움을 청한 끝에 그가 작업을 진두지휘하기로 한다. 산드라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에이도의 다운증후군 아들, 일하는 식당의 동료와 친구들, 툴린 박사,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의 친절한 아이 엄마까지 매 주말 모여 산드라의 집 짓기에 흔쾌히 일손을 보탠다.
산드라의 집 짓기는 각자의 이유로 다양한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임시적인 공동체가 되어 호혜를 나누는 프로젝트가 된다.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 두 딸과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꿈꾸는 이웃을 위해 바라는 것 없이 즐겁게 작업에 함께하는 사람들 모두 기쁘고 즐겁다. 처음엔 강력히 고사했던 에이도는 아마추어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모양새를 갖춰가는 집을 보며, 다른 이를 도우면서 자신도 도움을 받는다는 뜻의 아일랜드 고어 '메헬'을 언급한다. '메헬'은 산드라의 남편 게리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지향하도록 영화가 부여한 가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집 짓기에 함께하며, 까칠했던 툴린 박사는 어느새 세상 살뜰한 산드라의 보호자로 변화했고 선뜻 마당을 내어준 사실을 우려했던 그의 딸 역시 다정한 친구가 된다.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다. 어른들의 주의에도 현장에 접근했던 에마가 다치고, 아빠와의 만남을 거부하는 몰리의 노이로제 반응은 갈수록 심해진다. 엄마를 폭행하는 아빠의 모습을 거실 인형의집에 숨어 지켜봤던 몰리의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산드라는 차마 강요할 수 없다. 아이들을 데려다 줄 때마다 남편 게리는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어필하지만, 그럴수록 산드라의 뇌리에는 그가 폭력을 휘두르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어린 몰리에게까지 상처를 남겼다는 안타까움과 자책감만 커질 뿐이다. 에마의 부상과 몰리의 접견 거부는 좋은 빌미가 되고, 게리는 산드라를 상대로 양육권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건다. 소송 과정에서 산드라가 집을 짓고 있다는 사실도 들통나고 만다.
재판정은 산드라를 몰아세우는 말로 가득하다. 상대의 접견 보장에 협조적이지 않고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이 된다. 정문 통행도 불허하는 호텔을 벗어나 소박하지만 단란하게 아이들과 살고 싶은 꿈은 주거수당을 받으면서 집을 짓고 있다는 범법의 증거가 된다. 산드라는 집을 나온 이후 아이들을 데려다주며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과 마주칠 때마다 과호흡 상태가 되어 스스로를 진정시켜야 했다. 아이들을 위해, 살기 위해 모든 것을 견뎠던 산드라는 참다 못해 절규한다. 모든 사람들이 경찰 진술서와 진단서을 봤으면서 그 사람과 나를 한 방에 몰아넣고, 왜 계속 때렸냐고 묻지 않고 왜 일찍 떠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게 말이 되냐고!
산드라는 가까스로 양육권을 지킬 수 있었다. 두 딸과 함께 벅찬 마음으로 거의 완공된 집을 둘러보던 산드라, 힘을 보탠 이들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했다. 작지만 큰 성공을 자축하며 모두가 기쁨을 나누고 툴린 박사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여흥을 즐기던 이들은 그러나 얼마 후,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는 집을 발견한다. 집이 사라졌다. 힘없는 사람들의 '메헬'이 재가 되어버렸다. 충격에 몸져누운 산드라는 며칠을 일어나지 못한다. 환영처럼 침대 맡은 편에 게리의 엄마가 나타난다. 산드라가 아이들을 데려다줄 때,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곁은 지나치던 게리의 아빠와 달리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게리가 감옥에 갔다고 전한다. 모든 것을 잃은 듯 무너져내린 산드라를 돌보는 것은 이제 툴린 박사다.
가정 폭력을 경험한 싱글맘의 고투와 아이들을 위한 집 짓기라는 소재가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느낌이 들어 궁금해졌다. [맘마미아]의 감독과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출연 배우라니 대중적으로 유명한 이들일 텐데 내게는 초면이었고, 그 사실을 모르고 영화를 보면서 소재와 주제의 마이너함만이 아니라 만듦새에서도 좀 덜그럭거리는 느낌을 받아서 감독의 데뷔작일까 생각했다. 비극적이지만 드러내야 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모든 순간에 극적인 요소를 삽입하고 의미를 부여한 서사와 주요 인물 모두가 저마다 '전형적으로' 성장하고 연대하는 캐릭터들이어서 산만하게 느껴졌고 일부 억지스러운 에피소드는 아쉬웠다. 특히 첫 등장에서 거동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던 툴린 박사가 중간에 아무런 과정없이 마지막에 거의 완쾌되어 산드라의 보호자로 역할하는 부분은, 극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겠으나 민망하리만큼 기계적인 감동 코드로 느껴졌다.
산드라는 한쪽 눈 아래에 짙고 긴 점이 있는데 영화에서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 그 점을 가리는 것과 그대로 보이는 것에 진짜 모습과 가짜 모습의 의미를 부여한다. 원래 배우의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그 점이 [마티아스와 막심]에서처럼 마음을 잡아끌지는 않았고, 설정이라면 좀 과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장치가 아니어도, 산드라 역의 클레어 던은 가정 폭력을 경험하고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여성의 불안과 기복을 섬세하게 표현했고 기쁨도 벅참도 웃음보다 눈물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충분했는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재판정에 선 산드라의 발언만으로도 충분한 영화라고 느꼈다. 너무 당연하지만 자꾸 잊어버리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몰아치는 법과 사회의 모습이 한 장면에 압축되어 있었고 눈물나게 빛났다. 배경이 아일랜드였던 것 같은데, 어디나 별반 다르지 않은 복지의 빈틈이 사실적으로 드러난 부분도 흥미로웠다. 물론 개연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두어 번 등장하는 에이도의 아들이 다운증후군인 점이나 툴린 박사의 극적인 완쾌 같은 부분을 비롯해 약간은 너무 욕심을 부려서 차고 넘치는 영화가 됐다는 느낌이었는데, 그나마 탁자를 만들어준 남성과의 러브라인 같은 게 드러나지 않은 점이 고마웠다. 그렇게까지 갔으면 정말 심드렁해졌을 것 같으니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산드라가 모는 빨간색 현대 엑센트도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 본 기억도 가물한데 저 멀리 어느 가난하고 힘겨운 여성의 차로 등장하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5/12 cgv서면 임권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