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노트
12월 10일
나어릴때
2011. 12. 10. 02:16
다사다난 한 주가 저무는 토요일 새벽. 12월인가 싶더니 벌써 두 자리 수의 날짜, 적응이 안 된다.
월요일 아침은 KT노조선거 무효화투쟁 선언 기자회견으로 시작. 그렇게 오래 당해왔으면 독기만 남았을 만도 한데, 참으로 볼수록 신기하도록 여유로운 민동 선배님들을 보며 무지 마음이 아팠다. 고작 머릿 수 하나라도, 컴활 지각 정도야 응당!
화요일은 학원 종강날. 생각해보면 별로 끈기랄지 은근이랄지 뭐 그런 거랑은 가까운 편이 아닌데,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쪼들리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근성이 생긴 것도 같다. 아무려나, 엑셀이랑 엑세스 좀 제대로 배워볼까나 하며 등록했으나 나랑 하등 관계없는 제품목록이니 주문수량 따위를 계산하는 문제들이 넘쳐흘렀던 컴퓨터활용능력1급실기시험대비반 수업을, 기특하게도 단 한 번의 지각과 결석으로 무사히 수료. 중간평가 비시무리한 설문에서, 시험대비반이어서 당황했다는 답변을 기억했는지 민망하게도 웹컨텐츠디자인 수업이 시작될 즈음 강사한테서 문자가 다 왔다. 잘못 들어왔는데도 끝까지 꾸준히 참여해주셔서 감사하다고ㅠㅜ 계좌제 평간지 뭔지 거의 빵점 맞고 민망해 죽을 뻔 했는데, 출석으로 면피. 그러고보면 나처럼 심드렁한 늙은 학생까지 다 챙겨야하는 학원강사도 참 쉬운 직업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오후에는 나름 재미있었던 웹컨텐츠디자인 초급도 종강! 4시간 강의 중 반 정도는 진도 실습이라서 무결석무지각 성실만학도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부산에서 놓쳤던 영화 <마이백페이지> 보러 1시간 일찍 조퇴. 살면서 내가 건드릴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러스트레이터와 포토샵을, 무려 한 달 만에, 비록 초급 수준이나마, 어쨌든 수료했다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름 웹자보도 만들어서 어렵게 투쟁하는 사업장에도 선사하고 그러고 싶은데.. 과연 잘 될란지.
암튼, 가벼운 발걸음으로 20회차 마지막 수업을 1시간 조퇴하고 씨네큐브 광화문. 동경대 전공투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는 정도만 알고 그냥 어쩌다 들은 소문으로 마음에 꼽아뒀다가 부산에서는 시간이 안 맞아 놓쳤었는데. 음, 뭐랄까. 블랙코미디라고 만든 건 아닌 것 같은데, 뭐랄까. 소재는 한껏 역사적이고도 사회적이었으되 홍상수 영화를 보는 듯한 헛헛한 느낌이 족히 120분 정도는 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이따금 튀어나오는 유머 내지 우에야마를 연기한 배우의 헐렁한 연기는 흡사 시트콤을 보는 듯한 소격효과까지. 기대가 너무 컸거나 혹은...
수요일과 목요일은 12월 수업 개강 전 이틀간의 연휴, KT노조 선거날이기도 하고 쌍차가 새로운 투쟁을 여는 날이기도 했다. 서울역의 합동위령제 그리고 평택 공장 앞에 희망텐트촌, 평택까지 정말 가고 싶었으나 혼자서 쭐래쭐래 어정쩡한 보릿자루 코스프레가 안 봐도 비디오ㅠㅜ 헌화를 마치고 쌍차를 향하는 버스로 이동하는 대열을 서울역 계단에서 한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내심 평택까지 갈 량으로 무릎담요까지 챙겨갔지만, 역시 여전히 소아적인 내게 뻘쭘은 큰 두려움이다보니... 조만간 반드시, 가리라. 마음 먹고. 서울역 인근을 살짝 방황하다가 <R.E.C>를 보러가던 길에, 연휴의 담판(?) 타이밍이 훌쩍. 덕분에 좀은 뻔뻔하게 내년 봄부터 다시 시작할 활동을 약속하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목요일에는 정말 오랜만에 부천행. 정말 오랜만에 찾은 안나푸르나는 그새 간판도 바뀌고 한결 깔끔 편안한 분위기에 여전히 장사도 잘 되는 모양인데다, 역시 맛도 있다. 시간은 참으로 많은 걸 해결하는 분이신지라, 무려 세 시간 반에 가까이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생각해보니 이로써 이주판과의 안녕.을 제대로 고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리고 뭔가 시작에 어울리는 작태를 온 몸으로, 내년 봄부터 일할 단체에 자원활동하러 쪼르르.
오늘, 어제네. 금요일은 12월 학원 수업 개강. 8시 반부터 4시간, 2시 40분부터 4시간 수업을 등록한 터라 혹여나 늦잠을 걱정하며 잔뜩 긴장하며 잠을 청했더니 몇 시간 못 자고도 발딱 기상. 한겨울의 일찍일어나는새놀이를 축하하는 기온급강하에 위로 다섯겹 아래로 두겹을 꾸역꾸역 껴입고 편집디자인과 웹컨텐츠디자인 중급 수업을 들으러 학원으로. 처음 만난 인디자인과 드림위버는... 뭐랄까, 고작 두어 시간 건드려보고 할 말은 아니다만, 좀... 내 취향이었다. 한낱 프로그램 화면이 이렇게 이쁘고 사랑스럽다니. 게다가 참으로 영민하고 편리하기까지. 오로지 한글프로그램으로만 소식지와 각종 선전물을 만들어왔던 나의 날들이 주마등처럼. 역시, 세상은 각자 성장하고 있었던 게지.
저녁에는, 무려 4학기 동안 이어왔던 이주연구모임 <연>의 마지막 세미나. 이번 학기 들어 유난해진 저조한 참여율은 마지막 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급기야 마지막 텍스트는 발제문도 발제자도 없는 참으로 허무한. 그저 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지는 정말 않으나, 시간이 좀 더 지나 곱씹어보면 어떨지 모르겠으되, 오늘의 마음은 그저 했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 지루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며 마음 한 켠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세미나를 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4학기를 이어오며 어느샌가 뒷전으로 밀려난 관성적인 세미나가 부른 반작용이었을까. 뭐 공부 같은 거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좀 재미있는 세미나가 있으면 좋겠다, 라고 공부 좋아하는 척. 암튼, 4학기의 공부를 마무리했고... 새 단체 활동 시작하기 전에, 한 달 정도 이주연구모임을 개인적으로 복기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실 그런 시간 여유가 있다면 제일 하고 싶은 건 <티보가의 사람들>을 다시 읽는 건데. 일상을 보내는 내 꼴을 돌아보면 다 개뻥이라는 게 문제다.
암튼, 그리하여 다사다난 한 주일이 마무리되는 시점, 토요일 새벽. 오늘은 대한문에서 줄집회가 있는 날이고, 다행히도 혼자뻘쭘할 상황은 면하였으나 아직은 조금 어색한 캠페인이 살짝 부담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내심 집회 마치고 오늘 밤에 쌍차에 가자고 하면 같이 가주지 않을까 하는 앙큼한 바람이 가시지 않는다.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