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노트
12월 26일
나어릴때
2011. 12. 26. 23:18
역시, 뭉텅뭉텅 흐르는 시간은 참 빠르다. 점점이 이어진 깨알같은 순간들은 어떤 땐 참 길기도 하고 어떤 땐 참 막막하기도 한데 말이다. 보름 전에 쓰여진 일기를 흘낏 보구서,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는데, 약속이거나 (백수 주제에) 일정이라고 할 만한 몇 가지 외에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 마땅히 하는 일도 없고, 그래서인지 (이건 사람마다 다르겠군) 집중할 일도 없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뭐랄까, 참 한심하게도 내 집을 벗어나 사람 혹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제외하고는 그냥 텅 비고 붕 뜬 느낌이다.
이런저런 소소하다면 소소하지만 중요하다면 또 중요한 몇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그때 내 몸은 거기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어제 오늘, 오랜만에 하나의 이름을 궁금해하는 내 모습 때문에 조금 시큰둥하기도 하고. 정리하고 떨치고 잘라내고 해봐야 여전히 습관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행태가 영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당당한 자존감을 원하는 마음, 그 바닥에 여전히 배수진을 치고 있는 또 다른 마음이 지겹기도 하다.
며칠 전에는 트윗을 하다가 '기형도 봇'을, 어젠가는 '키다리아저씨'를 만났다. '기형도 봇'은 예전에 팔로잉을 했다가 지웠던 것 같은데... 마침 오랜만에 타임라인을 주시하던 차에 "질투는 나의 힘"이니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같은 한 때 정말 심장 맡겨뒀던 구절들이 줄줄이. 이십대 초반 삼풍백화점 지하 서점에서 우연히 "짧은 여행의 기록"을 발견하고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먹먹한 마음이 되어 참 열심히도 읽었던 기억, 어느 여름 광명시민운동장 언저리에 쌩뚱맞게 세워진 기형도 시비 앞을 실망스레 서성이던 기억, 심지어 그 때 함께였던... 이후의 한 동안과 불과 얼마 전까지도 뭔가 미안스러움과 가벼운 죄책감과 하지만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던 어떤 성향과 감각에 대한 거부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기억까지. 제일 친한 친구의 결혼식 그리고 동지애가 북적대는 대박화이트와락크리스마스에 다녀온 후, 현관문 잠금장치를 삼단씩이나 꼼꼼히도 채워놓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성탄을 보내는 데 아주 제격이었다. 그 와중에 툭. 툭. "키다리아저씨"의 본문이 그러니까 쥬디 에봇의 수다가 멘션으로 도착할 때마다 아주 잠깐이지만 무려 행복감 비슷한 것이 마음에 왔다간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보니 나의 성탄은 혼자서 살짝 바빴구나.
아무려나. 다시 한 주일이 시작되었고. 때마침 시작된 생리통과 맘 먹으면 바로 걸릴 것 같은 몸살 기운을 핑계 삼아,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는 편집디자인 수업은 가뿐히 결석. 여유로운 낮시간을 기대했지만, 게으름 피우다보니 역시 오후수업 시작 시간을 맞추느라 빠듯하고 바쁜 걸음으로 이틀 만에 현관문을 나섰다. 강사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신기하게도 되기는 하더라만, 내 주제에 플래시가 웬 말이냐는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다보니 수업도 그럭저럭 시큰둥.
오랜 동안 마음을 갖고 싶어하는 "오즈의 마법사" 양철로봇님이 진심 부러울 만큼,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운동 때문에 사는 게 꽤 힘겨웠었는데... 일생의 총량을 너무 어려서부터 소진해 온 탓인가. 이젠 내 진짜 마음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이따금 출몰하는 궁금한 이름들이 팍팍한 일상을 견디는 당의정에 불과하다는 걸 이제 와서 모른 체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덥잖은 위로와 온기에 질질 끌려다니고 싶지도 않다. 어렸을 땐 나이 먹으면 해결날 줄 알았던 것들 중에, 진짜 해결나는 건 한 개도 없다는 것만 뼈저리게 느끼면서 나이만 꼬박꼬박 먹는다. 그러나, 오늘의 결별은 번복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