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일지2022. 10. 6. 17:55



어제 공방 부부의 반응에 고무되어 9월 중순이 유통기한이었던 꼬간초 비빔면에, 나누면 좋을 먹거리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날이 선선해선지 벤은 컨디션이 좋았고 어제 생일이어서 닭을 한 마리 삶아주었다고 사장님이 말씀하셨는데, 가까이 다가와 친한 척을 하기에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축하한다고 예뻐해주자 순간 선을 넘고 말았다. 갑작스런 마운트에 대당황, 평소 자랑에 여념이 없던 사장님도 놀라 "저 새끼는 이뻐해주면 저 지랄"이라며 벤을 떼어내 진정시켰다. 예전에 <세나개>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역시나 대당황, 말 안 통하는 동물과 함께한다는 것의 이면을 잠시지만 경험한 기분이었다. 말 통하는 것들 중에도 못지 않거나 더한 존재들이 있기는 하지만, 암튼 약간 충격이었다.

 

공방 부부가 끓인 2종의 비빔면과 넉넉히 삶은 계란과 귀한 펭수참치로 점심, 잘 안 하는 짓인데 괜히 들떠서 음식 항공샷을 찍어 보았다. 더운 날이었다면 더 어울렸을 테지만, 간만에 누군가들과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니 기분이 좋았다. 얘기하다 보니 부산국제영화제에 그다음 주라는 BTS 공연이 화제에 올랐고 몇 년 전 콜트콜텍 공대위 활동하며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BTS를 보았던 목격담까지 떠들어대면서 즐거운 점심 시간을 보냈다. 정다운 이웃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 오늘 자정 지나 술 먹고 집에 가다가 생각났다며 전화한 M과 통화하면서 가까이에 좋아하는 지인이나 친한 친구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정도도 고마운 일이지 싶다.

 

어제는 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유튜브 생중계로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을 보았다. 개막 선언 전에 올해 고인이 된 방준석, 아오야마 신지, 장 뤽 고다르 그리고 강수연 님에 대한 영상이 상영됐다. 무대에 오른 이용관 집행위원장이 의례적인 인사에 이어 영상에 나왔던 고인들 특히 장 뤽 고다르 감독과 강수연 배우를 언급하며 전한 소감이 인상적이었다. 청년 시절 [네 멋대로 해라]를 필두로 한 그의 작품들을 보고 영화의 꿈을 품었던 강단파들이 주축이 되어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 영화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수호천사처럼 함께한 강수연 배우에 대한 회고 그리고 투병 중인 안성기 배우의 쾌유를 비는 이야기였다. 초창기 남포동 일대와 수영만 시절과의 비교가 무의미할 만큼 성장한 영화제가 너무 거대하고 멀게 느껴지면서도 며칠 가서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개 관객으로서,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속시킨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 방 침대 옆 벽에는 옛날 [키노]에서 준 노란 바탕의 [네 멋대로 해라]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사한 후 벽에 선반을 부착하려다 실패한 자국을 가리기에 가로 사이즈가 딱 알맞아 붙여뒀는데, 난 아직도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 얼마 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 프랑스에 있던 선생님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보고, 안락사였다는 사실을 다음 날 전해 들으며 별 의미 없이 붙여둔 포스터가 달리 보이기도 했다. 열심히 사모으는 것에 비해 dvd로 영화를 잘 안 보고 있는데, 올 겨울에는 가끔 시도할까 싶고 그의 영화를 시작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난 공부하는 영화광은 아니지만 갖은 ott 서비스에 밀린 영화와 극장의 미래가 우려되는 시절이니, 반 세기 전 영화를 새로운 위상으로 자리매김시킨 누벨바그 작품들을 찾아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 같다. 건너 건너 따져 오르다 보면 그들 역시, 지금 내 일상을 채워주는 고마운 이들 중 하나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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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