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6. 7. 12. 10:56



[더 송라이터스], “유재하부터 아이유까지, 노래로 기록된 사랑의 언어들”이라는 매력적인 타이틀의 책. 프롤로그의 ‘라디오 헤븐’을 읽으며 라디오 키드였던 어린 날이 겹쳐 떠올랐다. 나는 <별이 빛나는 밤에>보다는 마이너한 음악들을 신청곡으로 곧잘 들려주던 종교 방송국 심야 프로그램의 애청자였지만,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에서는 잘 만날 수 없는 음악인들과 노래들을 들려주는 보물 같은 라디오에의 기억과 향수는 다르지 않다. 이 책은 지인들과의 술자리 퀴즈에서 비롯된 ‘송라이터’ 개념에 대한 집착과 대중음악에서 가사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저자의 천착으로부터 시작된 기록이라고 한다. 

 

1부 “발라드라는 장르 혹은 정서”에서 처음 등장하는 곡은 1985년 나미가 발표하고 1994년 015B가 리메이크한 “슬픈 인연”이다. 저자는 1985년을 발라드가 태동한 결정적인 해라고 보는데, 실증적인 근거는 그해에 한국형 발라드의 대표곡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발라드 부상에 대해 클래식 음악 전공자들의 가요계 진출과 일본 시티팝의 영향 등 음악계의 내적인 요인 그리고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 및 소위 ‘신세대의 등장’ 등 사회적 분위기의 반영으로 짚는다. 이 시대는 지금껏 사랑받는 수많은 노래들과 음악인들이 등장한 시기다. 1987년 첫 음반을 유작으로 남긴 유재하,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 등의 명곡들, 도시적 감성과 전에 없던 세련미를 갖춘 빛과 소금, 윤상 등의 음악들, 노랫말과 선율의 서정적 감수성을 극대화하고 완벽한 음악적 조화를 이뤘던 이영훈과 이문세의 협업으로 탄생한 노래들. 더불어 저자가 ‘감정과잉과 찌질함의 인류학’이라 부연한 레퍼런스로 015B와 토이, 윤종신, 김현철, 더 클래식 등이 소환된다. 대체로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나는 1985년의 메가 히트곡이었던 구창모의 “희나리”가 생각났고,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과 “사랑할 순 없는지”의 다섯손가락 그리고 “그때는 외롭지 않았어”와 “다 가기 전에”의 이치현과 벗님들이 떠올랐다. 저자가 언급하는 발라드곡들의 외연이 꽤 넓었기 때문에, 송골매나 산울림 등이 언급되지 않는 점도 의아했다. 

 

2부는 “#단어로 #듣는 #발라드”라는 키워드로 여러 가지 해시태그를 붙인 10개의 하위 절로 구성되어 있다. 고심해서 붙였겠지만 전체적으로 사랑 노래라는 틀 안에서의 감정을 시기나 상황 등으로 구분한 건데 그 내용에서 크게 변별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1부에서 보였던 현대 가요계의 나름 계보와 역사, 대표적인 뮤지션과 그의 작업에 대한 분석 등이 아닌, 가사 위주의 감상문 같은 글이 동어반복처럼 한참 이어져 지루한 느낌도 있었다. 동어반복은 1부에서도 특히 시티팝 부분부터 두드러지게 느껴졌는데, 그만큼 대체할 만한 표현이 없었던 건지 어휘력의 빈곤인지는 모르겠지만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부분이었다. 가사 중심의 감성적인 서술과 해설이 주를 이루다 보니 그렇고 그런 소프트 에세이들이 의미 없이 반복되는 느낌도 들었고, 다수의 곡에서 가사를 직접 인용하는 세세한 설명들은 방송을 보고 쓴 연예 기사 같은 느낌도 들어 아쉬웠다. 가사 전문을 실으면 저작권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택한 걸까? 2부에서만 50곡 정도는 다룬 것 같은데 어쨌든 ‘사랑 노래’다 보니 표현의 참신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 어느 부분은 그냥 받아쓰기+감탄 같아 더 그랬다. 한 마디로 “노래로 풀어보는 사랑학 개론” 같은 느낌이었는데, 연애세포 다 죽은 상태에서 읽기에는 버거운 사랑 타령이었다. 내가 저자에게 기대한 부분이 아니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3부 “깊어지고 넓어지는 발라드의 세계”에서는 조금 더 확장된 유사 발라드곡들이 다루어진다. 앞부분을 읽으며, 이따금 다른 곡들을 추천하기도 해서 소개하는 노래들 대부분을 잘 모르는 30대 이하를 독자층으로 타게팅한 걸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길옥윤과 패티김의 “이별” 부분에서 “그들의 각별한 인연을 기억하는 우리에게는”이라는 구절이 나와 좀 놀랐다. 50대인 나도 가물가물한 기억인데 뭐지? 독자들과의 공감을 위한 ‘우리’라는 주어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선지, 이 책에서 크게 남발하지는 않지만 아쉬운 대목이었다. 케이팝 이전의 케이팝, 락발라드, R&B, 듀엣곡 등 조금 다른 기준으로 묶은 노래들이 3부에서 범주화되어 소개되는데, 서술 방식은 앞선 부분들과 동일하다. 물론 노래, 특히 가사에 방점을 두고 소개하는 글이니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생각됐지만 그래도 그래도 스멀스멀 엄습하던 지루함이 배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 송라이터스]라는 포괄적 제목에 비해 대상이 되는 레퍼런스들은 저자 개인의 취향을 많이 타고, 대중적 성취에 치우쳐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음악들을 다루는 결과론적 분석이다 보니 대중의 반응과 시대를 초월한 공감, 무엇보다 훗날의 ’재발견‘ 등이 중요했던 걸까 싶기도 했다. 1부에서 저자는 1980~1990년대 음악들이 시티팝, 케이팝의 맹아 혹은 원형으로 ‘재발견’되고 있다는 표현을 종종 하는데, 노래와 멀어진 지 오래라 어떤 맥락인지 애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후배 뮤지션들의 언급이나 오마주를 곁들인 리메이크 등 음악계 현장의 현상을 말하는 건지, 음악인이나 평론가 등 전문가들만의 회로가 아닌 일반 청자들이 유의미하게 인지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이 있는 건지 말이다. 어렸을 적 매달 나오는 음악 잡지를 사모으며 분량의 5%도 할애되지 않은 좋아하는 뮤지션과 음악 기사를 탐독했던 자로서 종이 잡지의 시대가 저문 지금, 팬덤들이 경쟁하는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가 아닌 케이팝 담론이 생성되고 순환되는 공적(?) 장소가 존재하는지도 궁금해졌다. 

 

소시적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독자로서 오랜만에 읽는 반가운 노래 이야기들이었지만, 소시적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에 아쉬운 점도 적지 않았다. 계보가 무색해진 시대고, 책이 딱히 이를 염두에 두지도 않지만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비교적 엄격한 구분선으로 존재했던 ‘언더-오버그라운드’ 개념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점도, 1990년대 중반 이후 가요신의 한 축을 담당한 인디 뮤지션들이 아예 배제된 점도 의아했다. 내가 많이 좋아했던 김창기, 신해철, 조동익 등의 이름에는 반색하는 마음이 됐지만, ‘발라드’의 스펙트럼을 무척 넓게 잡았음에도 누락된 많은 뮤지션들이 책장을 넘기며 계속 생각났다. 신촌블루스, 시인과촌장, 유앤미블루, 예민, 일기예보, 여행스케치, 윤도현, 송시현, 언니네이발관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뮤지션들. 그리고 송라이팅을 별로 하진 않지만 한 시대 씹어 먹은 이선희, 언급은 되지만 노래가 따로 소개되지 않는 동물원과 봄여름가을겨울, 푸른하늘 등도, 노래의 현재적 생명력과 뮤지션의 위상과 영향력 등을 감안한 걸까 싶기도 했지만, 개인의 선호에 기반한 레퍼런스 선정의 자의성이 내내 느껴졌다. 물론 내가 사랑했던 노래와 뮤지션이 별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느끼는 개인적인 불퉁함이다. 

 

읽는 내내 이런 마음이다가 마지막 작가의 말의 “과몰입의 결과물”이라는 점에 크게 공감했다. 딱딱하고 분석적인 평론을 업으로 삼는 음악을 사랑하는 이에게 이 정도의 문학적 감수성을 펼칠 자유는 분명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벤딩, 벨팅, 멜리스마, 어그멘티드 코드 등 일반 독자가 알기 어려운 음악 용어에 대한 설명이 없는 점과 소개되는 곡의 목록이 따로 없는 점은 아쉬웠고, 그러나 소개하는 곡들에 큐알코드를 덧붙인 성의는 고마웠다. 그리고 1991년 데뷔 때부터 십수 년 동안 누구보다 깊이 좋아했던 김장훈에 대해 붙인 “제2의 김현식을 꿈꾸며”(139쪽)라는 수식어는 주제 넘게도 몹시 유감이었다. 쓰다 보니 나도 과몰입이네. 가끔 노래 이야기를 나누면 저자를 언급하곤 했던 모임의 한 사람이 추천해 읽게 된 7월의 책이었다. 나는 <벌거벗은 세계사>의 재즈와 힙합 편을 통해 그를 뒤늦게 알았고, 사후 방송된 비틀스 편을 봤었다. 구조화된 방송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노래를 사랑하는 저자의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독서였다. 

 

 

김영대
2025.11.17.1판1쇄 2026.1.9.1판3쇄, (주)문학동네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원에 묻은 것을 파내야 한다]  (0) 2026.06.06
[한중일의 갈림길, 나가사키]  (0) 2026.04.13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0) 2026.04.06
[AI블루]  (0) 2026.03.28
[처음 읽는 일본사]  (0) 2026.03.15
Posted by 나어릴때
부산한하루2026. 7. 11. 22:33



7월의 모임 책 [더 송라이터스]를 읽다가 저녁 산책을 다녀왔다. 많은 노래와 뮤지션이 언급되는 책을 읽으며 문득, 만약 앞으로 한 사람의 노래만 들으며 살아야 한다면? 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주저없이 김민기 선생님. 말년의 다큐에서 이상우 연출가가 젊은 시절 김민기의 노래를 듣고 앞으로 이거 들으면서 살면 되겠구나 했다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는데, 얼마 전 그분도 고인이 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광정 아저씨를 오랜만에 떠올렸고, 참으로 좋아했던 그 시절의 대학로가 생각났다. 연극 본 지 정말 오래 됐는데, 얼마 전 거리에서 마주친 연극 포스터를 보고 궁금해서 마음이 동했다. 8월 중순까지 공연이었는데, 보러 가게 될까. 

 

집에서 나와 송도해수욕장을 지나 충무동 새벽시장과 해안시장, 자갈치 시장 그리고 롯데백화점 전망대까지 걸으며 김민기 선생님의 노래를 들었다. “차돌 이내몸”의 노랫말은 늘 그렇듯 절절하게 아렸고, “강변에서”를 들으면서는 아사히카와 강변을 걸으며 이 노래를 들었던 시간이 생각났다. “친구”를 들으면 중학생 때 우면산을 오르며 수없이 리핏해 들으면서 마음이 애달팠던 기억이 나고, 그 어릴 때에도 이 분과 동시대를 살고 있어서 행운이라 느꼈던 마음이 기억난다. 

 

누군가를 가리키고 그에 대해 얘기할 때 먼저 떠올리는 건 보통 이름과 얼굴이지만, 가끔은 목소리와 글씨체가 더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가창 음악은 그의 고유한 목소리가 담겨 있어 참 소중하고, 그래서 남겨진 목소리에 무언가 덧대고 입히는 일이 나는 마뜩지 않다. 얼마 있으면 2주기, 언젠가 천안에 가보고 싶다고 요즘 자주 생각하는데 7월 21일보다는 3월 31일이면 좋을 것 같다. 동시대를 살았다는 게 여전히 감사하고, 한참 전이고 잠시였지만 가까이서 뵐 수 있었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는 것도 내게는 참 소중한 기억이다. 무엇보다 수많은 노래들을 남겨주셨으니, 몹시 고마운 일이다. 

 

 

'부산한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출 산책, 5월까지 안녕  (0) 2026.02.28
(또 실패한) 모모스와 태종대  (0) 2026.02.01
효능  (0) 2025.06.09
뜬금포 다짐  (0) 2025.06.05
희망회로  (0) 2025.06.01
Posted by 나어릴때
사는게알리바이2026. 6. 29. 23:45



AVC컵 결승전은 의외의 셧아웃 패배였다. 좀 지쳐 보이는 한국 선수들에 비해 인도네시아 선수들은 내내 투지에 불타는 것 같았는데, 한국이 금메달을 땄어도 좋았겠지만 감격스러워 하는 인도네시아 선수단을 보니 괜히 찡한 마음이 됐다. 24위와 48위라는 세계랭킹 차이와 조별 예선에서의 셧아웃 승리 등으로 한국의 금메달 기대가 컸던 것 같은데, 경기적 요소뿐 아니라 경제력 같은 국가적 위상을 반전시키는 결과가 종종 나오는 점이 스포츠의 감동과 재미인 것 같다. 인도네시아팀, 축하합니다-
경기가 3세트로 끝난 덕에 12시 반쯤 잠자리에 들어 잘 자고 7시쯤 일어났다. 체크아웃까지 여유가 있어 이번에는 전에 못 본 AVC컵 여자배구 경기를 틀어 놓고 아침을 먹고 기내 10kg에 걸리지 않게 짐을 정리하고 나설 채비를 마쳤다. 체크아웃하고 캐리어를 맡기는데 프론트의 직원이 친절한 말투와 표정으로 언제 오냐고 물었다. 2시 전까진 오겠다고 웃으며 말씀드렸지만 여행 다니며 처음 받은 질문이라, 어제 꼭두새벽부터 캐리어 맡겨서 찍혔나 싶어 찔렸다. 나도 꼭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그러고 말았으니 진상 투숙객이 됐대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비행기는 6시 20분 출발, 특별히 가고 싶거나 가야 할 곳은 없었지만 3시간쯤 삿포로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멀리 가긴 애매해 시어터키노 앞을 지나 스스키노역을 거쳐 마루젠&준쿠도 서점에 갔다. 일본 여행하며 서점이 눈에 띄면 잠시나마 둘러본 곳이 여럿인데 일본어도 재패니메이션도 캐릭터도 모르니 재미가 별로 없다. 영화 dvd나 굿즈가 많은 곳은 그나마 흥미가 생기지만 여기선 못 찾은 건지 없는 건지 못 봤다. 3층에서 해리포터가 눈에 띄어 갔더니 한 섹션이 영국 테마로 꾸며져 있고 비틀즈 굿즈가 다양하게 많아서 반가운 마음에 성심성의껏 구경했다. 리버풀 비틀즈스토리에서 사서 쓰던 안경케이스가 많이 닳아 살까 하고 봤는데, 생각보다 비싸서 패스. 일본어를 읽을 줄 안다면 서점 둘러보는 게 꽤 흥미로울 텐데 까막눈이라서 아쉽다. 돌아가면 가타카나라도 익힐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는, 지켰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나왔다.



어젯밤엔 오늘 점심 겸 저녁으로 수프카레를 먹고 홋카이도와 작별할까 생각했는데, 아침을 먹고 나왔더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큐슈 여행하며 나가사키의 코코몰인가 하는 데서 엄청 마음에 드는 가방을 봤는데 4,990엔이었다. 좋아하는 진한 블루 색상에 원단도 좋아보였지만 에코백 같은 디자인인데 비싼 것 같아 혹시 나중에도 생각나면 온라인으로 찾아보려고 사진만 찍었었다. 한국에 와서 검색해도 안 나왔는데 아주 가끔 생각이 나서, 삿포로의 몰들에도 있지 않을까 싶어 주변의 백화점에 들어갔으나 명품 브랜드와 화장품들이 가득한 1층에 들어선 순간 아니라는 빠른 판단이 섰다. 출구가 바로 오도리공원으로 이어져서 걷다 보니 구운 옥수수 노점이 있다. 순간 혹해서 샀는데 너무 뜨겁고 커서 먹느라 애먹었지만, 식물성이라 속은 편했고 삿포로에서의 마지막 먹이가 되었다. 아직도 시간이 남아 지하로 들어가 다른 몰들을 살짝 구경했는데 재미가 없었다. 햇살이 닿으면 덥고 햇살이 없으면 으스스하게 춥고, 몇 번째 같은 곳에서 맴돌다 보니 살짝 지겹기도 해서 이제 흔쾌히 삿포로를 떠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캐리어를 찾아 가까운 아베스트 호텔 앞 정류장에서 공항버스를 탔다. 삿포로역을 거쳐서 오는 건데도 승객이 아무도 없었고 다음 역인 스스키노에서 몇 명, 이후 어딘가에서 한 명이 타서 무척 쾌적하게 신치토세 공항 국내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첫날의 기억을 더듬어 지하 1층 흡연실에 들렀다가 캐리어를 다시 정리하고 마침 마주친 저울로 무게 9.82kg을 확인했다. 온라인체크인은 안 했지만 시간 여유가 있어 15분이나 기다려 키노토야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하코다테 세이코마트에서 대실패한 아이스크림을 덮어쓰기엔 충분했지만 막 그렇게까지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고 양이 엄청 많아서 먹으니 또 배가 불렀다. 그렇게까지 줄을 세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주문 창구를 한 개만 개방하는 게 영업 전략일까, 늘 줄 서는 사람들이 많으니 장사 참 잘한다.
출발까지 2시간 30분이 남아 시간 잘 맞췄다고 생각하며 국제선 터미널로 갔는데, 대부분의 카운터가 닫혀 있었고 이스타항공에만 긴 줄이 있었다. 저가항공은 사전 좌석 지정도 상품이고 온라인체크인은 좌석이 임의로 지정되는 것 같아 굳이 카운터를 들른 건데, 처리 속도가 느려 50분이 걸렸지만 원하던 창가석을 받았으니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행기 탈 때마다 반복되는, 출국장을 통과할 때 왜 음료를 버려야 하는가 라는 불만과 의문과 포기의 시간을 맞이했다. 출국장 잠깐 지나면 바로 음료들을 팔고 비행기에 음료 담긴 병 들고 타는 사람들도 있는데, 왜 그럴까? 담배를 피울 때 커피류가 필요하고, 신치토세 공항 국제선은 출국장 안에만 흡연구역이 있고, 출국장을 통과하려면 음료를 버려야 하는 커다란 딜레마에 봉착했는데 힘 없는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선택은 음료대에 텀블러의 커피와 보틀의 물을 따라버리는 것뿐이었다.



출국 수속은 금세 끝났고 탑승장도 한산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초반 며칠 제외하고 계속 현금을 사용했고 막판 관리에 성공하여 동전이 111엔만 남았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판기 음료를 뽑으면 동전이 생기고, 이미 커피를 많이 마셨는데 디카페인은 없고, 다른 음료들은 내키지 않아 패스하고 마른 담배로 홋카이도 흡연을 마쳤다. 출발할 때 김해공항 면세점에서 한 보루 산 담배를 여행 내내 줄기차게 피워대서, 이제 반갑이 채 안 남았다. 부산으로 이사한 후엔 인연을 기본으로 누가 놀러오거나 여행하는 상황을 예외로 삼고 있는데, 이번 여행에선 폭풍 질주를 했고 여행한 도시 중심부 지역의 흡연구역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수준이다. 남은 반갑으로 내일까지 뒤풀이를 하고 7월부터는 다시 당분간 인연, 15개월째 반복 중인 패턴이니 잘하리라 믿는다.



탑승 시작은 십여 분 늦어졌지만 비행기는 거의 정시에 출발했다. 보름 여행하며 좋아하게 된 홋카이도를 내려다 보며 속으로 안녕을 고했고, 구름 위의 해넘이를 본 것 같다. 큰 난기류 없이 어두운 하늘을 지난 비행기는 9시가 조금 넘어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여러 루트지만 모두 두 번 이상 환승에 80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된다. 버스는 대기 시간이 길어 경전철을 사상역에 내려 161번 버스를 타고 서대신역에 내려 택시를 타기로 했다. 집까지 택시로 12분이라고 나오는데 카카오택시를 호출하니 멀리 있는 택시가 캐치했고, 오다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 도착지점까지 시간이 더 늘어나고 있었다. 기사에게 전화해 취소하겠다고 전하고 빈차를 잡아탔는데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음악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한 곡은 참았지만 너무 거슬려서 꺼주십사 부탁드렸더니 볼륨을 줄이셨는데, 극장에서 낮게 떠드는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여전히 거슬렸다. 나의 편협한 마음이 문제인가, 여행 잘하고 귀가길에서 올라온 짜증이 단지 택시와 관련된 것일까,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을 때의 편안함이 끝났다는 사실이 주는 불편함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도착하니 거의 11시, 다행히 집은 잘 지냈던 것 같다. 여행이 끝났다.


'사는게알리바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코다테-삿포로  (0) 2026.06.28
하코다테  (0) 2026.06.27
하코다테  (0) 2026.06.26
하코다테  (0) 2026.06.25
하코다테  (0) 2026.06.24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