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6. 10. 3. 12:18

 

 

1982년 3월 18일, 독재 정권을 비호하는 미국에 대한 항의를 담은 대학생들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후 도주한 대학생들 중 주범 격인 문부식과 김은숙은 존경하는 지학순 주교의 원주교구로 피신했다가 원주 가톨릭 문화관의 담당이었던 최기식 신부의 권유로 4월 1일 자수했다. 새로운 독재를 떠받치는 공안 기관간의 경쟁과 암투 속에서, ‘부미방’ 범인들과 최기식 신부를 필두로 원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공안사건이 기획된다. 보안사령관 신분으로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 수사를 맡아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 미국의 묵인 하에 광주항쟁을 진압한 뒤 1980년 9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이,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하고 특기인 수사와 체포로 나라를 통치하며 공포정치가 만연한 시절이었다. 

 

원주경찰서와 안기부 원주지부가 분주히 움직이던 그 시기, 안전택시의 1년차 신입 기사 나복만은 새벽에 일어난 접촉 사고로 전전긍긍하다 자수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는다. 고아원에서 자랐고 글을 모르는 그는 ‘정보과’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과 회사를 말하고 최형사의 브리핑 자료에는 받아 적은 메모가 포함된다. 브리핑 자료를 발표하던 곽용필 경정은 맥락 없이 등장한 이름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임기응변으로 답하고, 다음날 지방신문은 그 이름에 내사 중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기사를 게재한다.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려 안전택시를 찾은 최형사는 어리숙한 나복만을 마주하자 마음을 바꿔 신문을 언급하고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협박에 조인트를 얹은 후 떠난다. 남 간섭 좋아하는 떠벌이이자 유일하게 말을 섞는 사이였던 동료 기사 박병철은 도로교통법과 국가보안법의 경중을 판단할 줄 모르는 나복만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우며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박병철의 오지랖 설명과 조언에 위기감을 느낀 나복만은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택시를 탄 승객들의 몽타주를 그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깜냥으로 전모를 상상할 수 없는, 자신도 모르는 새 연루된 사건 혐의를 벗기 위해 나복만은 분투한다. 나복만이 3년간 도전해 택시 기사가 된 계기는 고아원에서 나온 후 머물 곳을 마련해준 목사 사모의 소개로 만난 ‘자매의 집’ 출신 김순희의 권유였다. 난생처음 존댓말을 해준 독실한 신자 김순희는 동거인이 된 후에도 몸을 허락지 않았지만, 아침마다 찬송가를 부르며 택시를 깨끗이 청소한다. 김순희가 택시에서 우연히 발견한 서류봉투 속 5학년생 곽병희의 일기 등사본은, 박병철에 의해 난수표로 둔갑하고 사건의 외연을 복잡하게 확장한다. 곽용필의 아내이자 곽병희의 엄마인 김경아와 부적절한 관계였던 담임 교사 김상훈의 협박용품에 불과했던 등사본은 나복만 포섭의 근거 혹은 곽용필을 밀어내기 위한 함정이 된다.

 

자신의 감을 믿고 나름의 수사를 펼치던 박병철은 얼마 뒤 내연관계를 폭로하겠다며 돈을 뜯어내려다 김상훈에게 살해당한다. 김상훈은 수년간 은신하다 후에 법의 심판을 받지만, 불안한 상황에서 유일한 코치 역할을 하던 박병철의 실종 이후 나복만의 운명은 새로운 국면에 이른다. 즈음 박병철의 감에 따라 제 의지와 별개로 자신을 좋게 본 지학순 주교에 의해 원주교구 사건에 연루됐다고 굳게 믿은 나복만은 다시 한 번 자수를 위해 원주경찰서를 찾았다가 안기부 요원 정남운과 만난다. 그는 소시적부터 [데미안]을 백 번도 넘게 읽은, 대학시절 운동권 활동으로 잡혀간 중앙정보부 취조실에서 자진해 조직도를 넘기고 ‘배신의 아브락삭스’가 되어 돌아와 졸업 후 자발적으로 중정을 찾아가 요원이 된 자다. 원주의 안기부 안가에서 나복만은 정남운의 시나리오에 의해, 월북했다가 남파된 생부로부터 의식화되고 북에도 다녀온 간첩으로 조작된다. 갖은 고문과 ‘형제의 집’ 형제들의 줄소환 등으로 나복만은 체념하지만 마지막 진술서 작성 단계에서 고비를 맞는다. 

 

글을 쓸 줄 몰랐던 것이 죄였고, 글을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이 목숨을 걸 만한 비밀이었던 나복만은 수하들의 모진 고문을 피투성이가 된 심신으로 버텨낸다. 사건을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정남운이 전술을 바꿔 나복만을 회복시키고, 결국 사실을 털어놓은 나복만은 400장이 넘는 파지를 만들며 정남운이 작성한 보좌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옮겨 적는다. 1982년 6월 27일, 안기부 취조실에서 거의 2개월 만에 나와 택시에 탑승한 나복만의 목적지는 원동성당이다. 조수석에는 앉은 정남운이 마지막 미션과 변심하지 말라는 당부를 전하고, 나복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남운에게 ‘개새끼’라는 진심을 전한 후 남부시장 로터리를 지나 엑셀 페달을 밟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다. 정남운은 의식불명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중상을 입은 채 쓰러지고 나복만은 절뚝이며 택시에서 내려 사라진다.

 

나복만의 운명이 슬픈 촌극으로 전락하는 데에는 석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박병철이 죽었고, 김순희는 원주경찰서에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부목사의 소개로 수원의 고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겨울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시의 극작가 나가이 예브쎄이는 2년간 준비해 발표한 희곡 [재떨이]에 대한 후배들의 사상 편향 공격을 받던 중 모스크바에서 온 기관원들을 맞이한다. 현리에 사는 여인 나복만 생모와의 결혼 사실조차도 한참을 더듬어 기억해 낸 그는 과거 월북한 나복만의 생부 나성국이다. 정남운의 그림 속에서 남한에 잠입해 아들에게 공산주의와 반미 사상을 주입했던 아버지는, 젊은 날 끝내 자신을 외면한 첫사랑을 따라 월북했고 나복만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정말 생부가 맞는지도 알 수 없지만 기관원들의 주의를 받은 그에게 중요한 것은 노후의 연금이다. 나복만과의 관계로 피해자가 된 형제들 대부분은 시간이 흐르며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고, 김순희는 멀리서나마 자신을 보호해주던 부목사와 뒤늦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부부가 된다. 가해든 피해든 사건과 관련됐던 많은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계급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이후의 삶을 이어간다. 나복만의 행방은? 경찰복을 벗고 식당을 운영하는, 훗날 아들의 사제 서품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온 최형사에 의해 밝혀진다. 마로니에공원의 캐리커처 화가, 그의 그림은 몽타주 같이 보인다.

 

첫 문장 “들어 보아라.”로 시작되는 소설에서 화자는 세계를 통치하듯 독자에게 작품 읽기에 대한 권유/명령/지시를 끊임없이 이어간다. 물론 미국이 한국에게, 전두환 정권이 공안기관들에게, 공안기관원들이나 ‘형제의 집’ 형들이 나복만에게 한 것과는 다른 나름의 고심과 배려가 묻어나는 안내다. 화자는 사회역사 장르의 활극처럼 펼쳐지는 다층적인 이야기에서 조각조각 등장하는 사건들과 느닷없이 출현하는 인물들에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무수한 괄호들 속에 성심껏 부연도 잊지 않는다. 서슬 퍼런 권력과 체포된 저항, 동상이몽 속에 범위를 넓히며 힘없는 자들의 삶을 앗아가는 비극이 이기호 특유의 너스레와 유머를 만나 슬픈 희극으로 전화한다. 너무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엮어내느라 구조가 조금 난삽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비루한 우리의 주인공들을 희화화하지 않는 작가의 시선은 역시 미더웠다. 미국과 한국이 속한 세계질서와 공안정국 수행자들의 권력관계, 관련자들과 피해자들의 역동까지 다양한 층위를 꿰뚫고 엮어낸 [차남들의 세계사]라는 제목 역시 탁월한 네이밍이라는 생각이다. 

 

10월의 모임 책이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후 거의 모든 작품을 반갑게 읽고 있는 독자로서, 지난해 어느 도서관 강의에서 다시 읽은 [눈감지 마라] 그리고 [스페인 역사 다이제스트 100]으로까지 이어진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을 읽은 후의 여운을 떠올리며 내가 추천했다. 출간 직후 읽으며 뭔가 사회와 개인을 유려하게 엮어 빚어낸 유장한 대하서사 같은 이야기라고 느꼈었고, 그건 내용도 형식도 다르지만 영화 [보이후드]를 보고 느꼈던 온몸을 휘감는 꿈같은 시간의 흐름의 감각과도 유사한 꽤 귀한 감정이었다. 하여 이기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한 사람에게 축하까지 건네고 다시 읽었는데, 흐른 시간 덕인지 부미방과 원주와 나복만 정도의 키워드를 제외하면 그냥 초면 같은 데도 이전과 달리 작품에 쉽게 빠져들기 어려웠다.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너그러웠던 걸까, 지금의 나는 설마 그때보다 조금은 성장한 걸까 고민도 했는데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다시 읽을 때 새롭게 보이는 것들에 대한 기대를 충족할 수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이 복잡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조사하고 집필하며 작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애를 썼을까 싶은 생각은 들었다. 1980년대 초반의 원주, 작가가 나고 자란 지역의 어떤 부분을 역사의 그늘과 함께 이렇게 상세히 기록해냈다는 것만도 대단하긴 하다.

 

 

이기호
2014.7.18.1판1쇄찍음 2014.7.25.1판1쇄펴냄, (주)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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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6. 9. 27. 02:18

 


이연은 성민의 초대로 <홈파티>에 참석했다. 대학 후배 성민이 반년짜리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만난, 교양과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이들의 소모임이다. 코로나 시기라 서로의 집에서 돌아가며 모이다 각자 지인을 한 명씩 초대하기 시작했고 성민의 차례였다. 대학 시절부터 성민에게 져온 신세와 준비 중인 오십대 여성 임원 역할의 오디션 배역을 따내는 데에 도움이 되길 기대하며 함께한 자리다. 호젓한 부촌 ‘계산이 정확한’ 오대표의 집, 새 얼굴 이연을 환대하는 명상센터 소장,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함께했던 변호사와 의사 등이 기다리고 있다. 세련된 취향과 부유함이 묻어나는 실내 분위기처럼, 이연에 대한 관심과 자신들의 추억으로 가볍게 나누는 대화에도 계급의식이 스며있다. 악의 없이 나누는 타인들에 대한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자제하다 술을 마신 이연이 시차를 두고 곱씹던 반론을 말하고 얼마 후 예의를 차리며 먼저 자리를 뜨려다 고가의 빈티지 잔 세트를 떨어뜨려 부서진다. 묘한 긴장과 이물감이 떠돌던 공간을 떠나며, 오늘 자리가 어땠는지 묻는 오대표에게 이연은 연기자의 말로 답한다. “너무너무 좋았어요, 정말.” 홈파티 역시 하나의 오디션이 아니었을까.

 

나와 지호는 몇 년간 미룬 신혼여행으로 날씨 좋고 물가가 싼 어느 나라의 산악 도시에 저렴한 <숲속 작은 집>을 빌려 한 달 살기 중이다. 며칠 지내는 동안 열 맞춰 정리해놓은 욕실 물품이나 휴지통의 위치 등이 바뀌어 있는 걸 확인하며 의구심과 불안감이 일기 시작했다. 집을 오가는 유일한 사람은 가끔 마주칠 때면 정중하게 합장 인사를 나눴던 또래의 청소담당자다. 나는 물건들이 흐트러진 이유를 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며칠간 적당한 금액의 팁을 적당한 방식으로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고, 여러 번 시도에도 실패하자 그의 모국어 인사말을 직접 메모로 남긴다. 한 달 살기하며 정기적으로 이체하던 걸 깜빡해 엄마의 조심스러운 연락을 받았고, 돌아가 송금하겠다는 답에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중요한 돈 때문에 나는 꽤 많이 마음을 쓴 셈이다. 어느 날은 청소담당자의 딸로 보이는 아이가 숙소를 청소하고, 떠나기 전에는 마음에 들어 구매해 선반에 두었던 집 모양 기념품이 사라졌다. 떠나는 날 아침 일찍, 오토바이를 타고 온 아이가 서둘러 전하고 떠난 종이가방에는 사라졌던 것과 비슷한 기념품과 자신이 실수로 깨뜨렸으나 똑같은 걸 찾을 수 없었다며 미안함을 전하고 이해를 구하는 내용의 엽서가 들어 있다. 돈이 만드는 관계의 위계와 양가감정을 오가며 스스로의 낯선 마음을 마주하는 일은 늘 어렵다.   

 

전세 계약으로 들어와 사년간 거주한 집이 팔리고 나와 남편은 이사를 준비 중이다. 그사이 집값이 폭등했고 조금 보태서 집을 사길 권했던 공인중개사의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하는 부부의 집 위층에는 새로 들어올 젊은 부부가 인테리어 공사 소음 양해를 부탁하며 약소한 선물과 함께 <좋은 이웃>이 되겠다며 인사를 다닌다. 집에서 운영 중인 독서교실의 수업 시간을 알려주며 협조를 부탁했지만 공사는 사정없이 진행되고 있다. 나는 독서교실을 연 후에도 장애가 있는 시우네만은 방문 수업을 간다. 집에서 머지않은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생업으로 바쁜 부모와 자신을 잘 따르는 총명한 시우와의 수업은 내게도 좋은 시간이다. 나는 귀가하며 얼마 전 비 오는 날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다는 치킨 배달원의 부모가 시시티브이 확인 문제로 경비원 아저씨와 실랑이하는 걸 목격하고, 얼마 전 치킨 주문했던 일을 떠올린다.   

 

기태는 요즘 자주 목에서 <이물감>을 느낀다. 회식 자리에서 신입들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싸해진 분위기에서 느낀 사회적 이물감도 더해져 문득, SNS에 가입해 희주의 계정을 찾아봤다. 십여 년 전 새빛저축은행에서 만나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고 이제는 남이 된, 희주의 요가 학원 개업 소식을 전해들은 터였다.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닌데 기태는 타임라인의 게시물과 사진에서 희주와 가까운 이성을 주목하고 계정이 비공개로 전환되자 이탈리아 비스트로의 셰프인 그의 계정을 흘깃댄다. 기어이 식당에 찾아가 실물과 함께 ‘내장의 관상’을 확인하고, 먹다 남긴 음식 그릇에 냅킨을 던져놓는 나름의 일탈을 거쳐며, 계산대에서 대면한 그에게 뻔뻔한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탐색전을 완성한다. 기복이 심한 낯선 감정 속에서 평소 기태에게 적극적인, 부담 없이 만나던 파트너에게 먼저 연락하며 암시를 담은 반말 메시지를 보내지만 답은 오지 않는다.  

 

새벽부터 준비해 서울의 대학병원에 온 엄마를 챙기는 기진의 신경은 온통 저녁에 있을 행사에 가있다. 오늘은 기진의 ‘여행 전문 책방’ 오픈 1주년이다. 운 좋게 좋아하는 작가 서인주를 초청해 북토크를 진행하게 됐고 특별히 <레몬케이크>와 샴페인을 준비해뒀다. 파킨슨병 증세가 심해져 요양병원에 입원한 아빠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짐작할, 초등교육만 받아 영어를 읽지 못하고 소소한 부분에서 어쩔 수 없이 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엄마와 기진이 속한 세계는 사뭇 다르다. 몇 달만의 병원행으로 만난 엄마와 의무적으로 식사를 하고 후식을 먹고 택시를 태워 보낸 직후 기진에게 부친상을 알리는 서인주 작가의 문자가 당도한다. 매진됐던 북토크 신청자들에게 취소와 환불을 안내하는 문자를 보내고, 빵과 함께 가방에 넣었다가 엄마에게 건네는 걸 잊은 검사지를 살피며 기진은 새삼 엄마의 삶을 생각한다. 언젠가 엄마아빠와 함께 맛있게 먹은 레몬케이크를 앞에 두고서. 

 

한국어 ‘안녕’에는 반갑다와 잘 가라는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고, 은미는 ‘에코스’에서 만난 세 번째 영어 교사 로버트에게 말했다. H가 틀어놓은 킴 딜과 로버트 폴러드의 ‘Love Hurts’를 들으며 <안녕이라 그랬어> 말했던 과거의 어느 아침, 은미는 이모의 전화를 받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길로 엄마를 간병하며 H와 이별하고 칠 년의 간병 결과 엄마와도 이별했다. 유품을 정리하다 발을 다쳐 수술을 했고, 남은 관계도 남은 돈도 없이 언젠가 이 땅을 떠날 날을 위해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수업 때 로버트의 뒤로 보이는 액자 속 늙은 남자가 그의 아버지란 걸 알게 되고, 얼마 후 그의 부고에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장례식 후 돌아온 로버트와의 수업에 어떤 긴장과 호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무척 아쉽게 느껴진 마지막 수업 때 은미는 로버트에게 평안하시냐 혹은 평안하시라는 안녕의 또 다른 의미를 알려준다. 어느 아침 잘못 들었던 팝송의 가사 안녕, “I'm young.” 그리고 이어지는 어떤 깨달, “I know…… But even so I know a thing or two…… I learned from you, I really learned a lot, really learned a lot……” 무방비상태에서 마주친 이름이 당혹스러웠지만 나자레스 버전으로 좋아했던 노래는 반가웠다. 나도 그 부분에서 ‘안녕’을 떠올린 적이 있었던 것 같단 생각이 들었는데, 아닐지도 모른다. 

 

은성빌라 302호, 지수의 안방 천장에서는 <빗방울처럼> 툭툭 물이 떨어진다. 깨끗한 신축에 바깥 풍경이 밝은 집이 마음에 들어 삼 년 전 계약해 이사했고, 얼마 후 청약에 당첨된 신혼부부 특별 공급 아파트 공사 현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남편 수호의 회사도 좀더 가까워졌고 집의 호수가 결혼기념일과 같은 숫자여서 운명 같았다. 입주일에 임대인은 근저당권을 설정해 대출을 받았고, 이사하며 받은 확정일자는 자정 이후 효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부부는 당첨된 아파트를 포기하고 경매로 빌라를 낙찰 받아 원치 않은 첫 집을 얻었다. 대출금을 갚기 위해 새벽 대리운전을 나갔던 수호는 어느 날 운전석에서 쓰러져 삶을 마감했다. 사십구재를 치르고, 자수는 안방 천장에서부터 축 늘어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유일한 가족인 동생 준오가 방문해 벽지를 가르고 물을 빼고 응급처치를 하고 물통을 받쳤다. 거실로 침소를 옮겨도 들리는, 빗방울처럼 톡톡 떨어지는 물소리와 함께 지수는 서서히 수호가 있는 곳으로 건너갈 결심을 했다. 집 정리를 위해 도배하는 날 방문한 외국인 도배사는 안방 상태를 보고 정중한 질문을 건네고 물주머니도 누수의 흔적도 없애준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낯선 이의 한 마디는 담담하게 차가워진 지수의 마음을 건드린다. 

 

슬프게도, 이렇게라도 요약해두지 않으면 소설의 내용들은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아쉽게도, 이렇게까지 할 만큼 마음에 들었다거나 인상적이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작가의 강연을 신청한 뒤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 나름의 성의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여러 지면에 발표한 소설들인데, 대체로 거두절미하고 현재 시점의 디테일한 상황에서 시작해 과거 사건의 편린들을 노출하며 전개되는 방식이 유사하게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리하며 확인하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는데,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면서는 이렇게 ‘죽음’이 남발되고 만연한 소설집은 처음이라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이렇게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하는 소설집을 읽은 적이 있던가, 행위자로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든 다소 객체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든 그의 관계인이든 과거든 현재든 누군가의 지난 죽음에 대한 언급이나 부고가 전해지고 무심히 흐르던 전개나 사건이 새 국면을 맞는 반복을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인생을 구성하는 두 가지를 꼽으라면 삶과 죽음이라고 할 수 있지. 출생이 인생을 여는 시작이지만 바로 그 순간 삶이 시작되고, 길든 짧든 삶이 끝나는 순간 그리고 타자의 기억 속에 잔존하는 누군가의 상태는 죽음이라고 말해도 될까. 존재의 양상이 온전한 독립체는 아닌 잉태부터 출생까지의 기간 역시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인생을 두 단어로 압축할 때 내 깜냥으로 생각해낼 수 있는 조합은 삶과 죽음이다. 죽음은 늘 삶과 함께하고 생각지도 못한 새에 진행되기도 어느 날 덮치듯 다가오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작품에 죽음이 넘실대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말자고, 스스로를 달래가며 읽었다. 그럼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별 의미는 없는 이견, 생동하는 삶들의 도처에 죽음이 있는 건 맞지만 조용한 극적 전개나 국면 전환의 계기로 매번 죽음이 등장하는 점이 너무 쉬운 선택은 아닐까. 책 말미에서 확인한 발표 시기는 몇 년에 걸쳐 있고 나는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받은 느낌일 수도 있다. 불쑥 개입된 죽음으로 인해 개연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죽음이 출현하는 순간 인물을 둘러싼 분위기와 세계가 다른 빛으로 도약하는 건 사실이니까. 장치처럼 쓰인다고 느껴져버린 죽음이 거듭되니 읽으며 마음이 시큰둥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반면, 신형철의 해설은 참 유려하였고 쓰지 않은 것까지 읽어내며 고백과 발견과 상찬으로 가득 채운 느낌이었다. 다들 좋다는데 난 그냥 그런 것은 취향의 차이이겠지. [달려라 아비]가 그냥 그랬던 까닭에 참 오랜만에 작가의 두 번째 책이라 생각하며 읽었는데 지난해 어떤 강의 레퍼런스여서 소설집 중 단편 하나를 읽었었고 예전에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도 읽었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김애란
2025.6.20.1판1쇄 2025.9.17.1판5쇄, (주)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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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6. 9. 19. 18:18



옛 흑백 영화처럼 지직거리는 느낌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인트로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식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의 활기 가득한 도시 알제를 소개하는 영상과 내레이션이다. ‘대한뉴스’ 같은 관제 느낌의 보도 영상이 서서히 아웃되면서 감옥 건물이 오버랩되고 아랍인들 가득한 그곳에 수감된 뫼르소의 모습이 보인다. 왜 들어왔냐는 나이 지긋한 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통역을 하는 젊은이에게 뫼르소는 아랍인을 하나 죽였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영화는 살인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뫼르소를 먼저 보여주고 과거의 사건들과 작렬하는 태양과 뜨거운 공기를 품은 바다와 하늘의 이미지들을 빈번히 교차시키며 진행된다. 1인칭이었던 소설과 달리 카메라는 인물과 사건을 관찰하지만 첫 시퀀스가 주요 사건 이후의 감옥이어선지 회고적인 느낌이 들고, 흑백의 화면은 전체적으로 빛과 어둠의 대비가 도드라진다.    

 

원작이 있는 소설을 읽은 후 영화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되고 이번에는 직전에 책을 읽은 터라 더 심했는데, 활자를 통해 막연히 상상한 여러 공간들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확인하고 주요 인물들이 캐릭터로 생동하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영화는 소설의 사건과 주요한 장면들을 대체로 충실히 재현하면서도, 마리와 제밀라 등 여성 캐릭터의 비중을 크게 높이고 아랍인과 프랑스인의 차별적 상황에도 중점을 둔다. 뫼르소와 마리가 영화를 보러 간 극장 벽에 붙은 “현지민 출입 금지”라는 안내문이나 법정에서 마리가 제밀라에게 동생일에 대해 유감을 표하자 아랍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생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부분, 마지막 사건이 일어난 해변가 무덤의 ‘무사 함다니’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석과 그 옆 제밀라의 모습 등은 각색으로 추가된 부분이었다. 소설 [이방인]에서 아랍인의 집단적 존재감이 강조되지 않았던 이유가 알제의 프랑스인이 어차피 본국민에 비하면 2등 시민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고려되지 않은 것인지 작품이 부각시키고자 한 주요한 지점이 뫼르소의 ‘반사회성’을 통해 사회와 체제와 통념의 폭력성과 반사회성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 [오디세이]를 보면서도 느꼈던 것과 비슷한 어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고려라는 동시대적 해석이 추가된 것일까 싶기는 했다.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이방인] 영화화라는 점 못지않게, 교도소 사제라는 작은 역할이지만 스완 아를로가 출연한다는 점도 크게 기대한 부분이었다. 내가 호감을 갖고 기억하게 된 시작은 [신의 은총으로]에서 사제의 아동 성폭력 피해자로 성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에마뉘엘 캐릭터였다. 당시 포털이 명기한 이름은 스완 아르라우드, [추락의 해부]에선 스완 아를로드였던 것 같고 이제 스완 아를로로 정착된 듯하다. 암튼 다작은 아닌 것 같지만 꾸준히 업데이트되는 필모그래피에 비해 개봉작이 너무 적어 아쉽던 차에 정말 반가웠는데, 착붙한 헤어스타일로 출현한 모습에 새삼 그 멋짐은 머릿발이었나 싶기도 하고 몇 년 만에 피해자에서 가해자 직군으로 변신한 게 재밌는 우연이다 싶기도 했다. 뫼르소를 연기한 뱅자맹 부아쟁은 수감된 후 수염이 자라고 초췌해질수록 빛과 어둠의 대비와 함께 클로즈업되는 장면마다 화보를 방불케하는 비주얼이었다. 외국 배우 잘 모르지만 영화 본 후 찾아보니 참 좋아해서 영화관에서 두 번 보고 dvd까지 산 [썸머 85]의 다비드였다. 내가 좋아한 캐릭터와 배우는 알렉스를 연기한 (살짝 리버 피닉스 느낌이 났던) 펠릭스 르페브르라는 배우였고, 물론 그의 이름도 당연히 까맣게 잊었었다. 책에서 튀어나온 듯 살라마노를 연기한 드니 라방의 미친 싱크로율과 반가움도 추가해야겠다. 오종 감독 덕분에 여러 모로 흥미로운 영화 감상.

 

영화가 끝난 후 ‘이지훈의 시네필로 특별강연’이 시작됐다. “정상과 병리”(미셸 푸코의 스승이기도 했던 조르주 캉길렘의 책 제목에서 따왔다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똑같이 느끼고 행동하라는 사회의 강요에 동조할 수 없는 인물의 생을 그린 영화”라는 설명과 함께 무척 유익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방인]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영화는 실존주의와 탈식민주의 입장을 동시에 취하고 있으며, 영화 속 숨진 아랍인 무사의 이름은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사건]이라는 소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카뮈의 부조리 철학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이방인]에 반영된 부분들을 짚고, 부조리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뫼르소 캐릭터의 독특성을 신경다양성과 감각과민성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점이 새로웠다. 작품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감각의 포화 상태에 대한 묘사들과 카뮈가 살았던 당대에는 명명되지 않았던 자폐 스펙트럼, ‘일반인’과 다르게 감각하고 인지하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결국 ‘다정한 무관심’에 닿은 뫼르소의 고백을 생각하면 상당히 수긍이 됐다. ‘살인’이 부조리 철학의 주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극적 설정일 수 있다는 점이나 사형이 선고된 후 뫼르소가 집착하는 ‘기계’, 단두대와 관련해 그가 살고 있는 집 1층 가게 간판에 쓰인 프랑스어 ‘기계’가 불안한 삶의 은유라는 점은 신선한 환기였다. 1시간 반쯤 동안 진행된 강연은 무척 흥미로웠고, 성의 있게 준비된 ppt 내용도 좋았다. 서른이 채 되기 전 알베르 카뮈가 [이방인]을 집필하며 이렇게나 다양한 후대의 해석들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천재를 넘어 그는 예지자였을 테고, 아무려나 길지 않은 소설이 확장하는 세계와의 연결지점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강연 덕분에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꽤나 즐거운 일이라는 걸 오랜만에 느낀 시간이었다. 꽤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쉽게 풀어주는 강사의 역량과 친근한 접근 방식이 내게는 무척 적당했다. 부지런을 떨어서 [뫼르소, 살인사건] 챙겨 읽고, 극장에서 영화를 다시 보면 새롭게 보이는 지점들이 있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9/19 영화의전당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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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