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3월 18일, 독재 정권을 비호하는 미국에 대한 항의를 담은 대학생들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후 도주한 대학생들 중 주범 격인 문부식과 김은숙은 존경하는 지학순 주교의 원주교구로 피신했다가 원주 가톨릭 문화관의 담당이었던 최기식 신부의 권유로 4월 1일 자수했다. 새로운 독재를 떠받치는 공안 기관간의 경쟁과 암투 속에서, ‘부미방’ 범인들과 최기식 신부를 필두로 원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공안사건이 기획된다. 보안사령관 신분으로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 수사를 맡아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 미국의 묵인 하에 광주항쟁을 진압한 뒤 1980년 9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이,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하고 특기인 수사와 체포로 나라를 통치하며 공포정치가 만연한 시절이었다.
원주경찰서와 안기부 원주지부가 분주히 움직이던 그 시기, 안전택시의 1년차 신입 기사 나복만은 새벽에 일어난 접촉 사고로 전전긍긍하다 자수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는다. 고아원에서 자랐고 글을 모르는 그는 ‘정보과’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과 회사를 말하고 최형사의 브리핑 자료에는 받아 적은 메모가 포함된다. 브리핑 자료를 발표하던 곽용필 경정은 맥락 없이 등장한 이름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임기응변으로 답하고, 다음날 지방신문은 그 이름에 내사 중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기사를 게재한다.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려 안전택시를 찾은 최형사는 어리숙한 나복만을 마주하자 마음을 바꿔 신문을 언급하고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협박에 조인트를 얹은 후 떠난다. 남 간섭 좋아하는 떠벌이이자 유일하게 말을 섞는 사이였던 동료 기사 박병철은 도로교통법과 국가보안법의 경중을 판단할 줄 모르는 나복만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우며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박병철의 오지랖 설명과 조언에 위기감을 느낀 나복만은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택시를 탄 승객들의 몽타주를 그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깜냥으로 전모를 상상할 수 없는, 자신도 모르는 새 연루된 사건 혐의를 벗기 위해 나복만은 분투한다. 나복만이 3년간 도전해 택시 기사가 된 계기는 고아원에서 나온 후 머물 곳을 마련해준 목사 사모의 소개로 만난 ‘자매의 집’ 출신 김순희의 권유였다. 난생처음 존댓말을 해준 독실한 신자 김순희는 동거인이 된 후에도 몸을 허락지 않았지만, 아침마다 찬송가를 부르며 택시를 깨끗이 청소한다. 김순희가 택시에서 우연히 발견한 서류봉투 속 5학년생 곽병희의 일기 등사본은, 박병철에 의해 난수표로 둔갑하고 사건의 외연을 복잡하게 확장한다. 곽용필의 아내이자 곽병희의 엄마인 김경아와 부적절한 관계였던 담임 교사 김상훈의 협박용품에 불과했던 등사본은 나복만 포섭의 근거 혹은 곽용필을 밀어내기 위한 함정이 된다.
자신의 감을 믿고 나름의 수사를 펼치던 박병철은 얼마 뒤 내연관계를 폭로하겠다며 돈을 뜯어내려다 김상훈에게 살해당한다. 김상훈은 수년간 은신하다 후에 법의 심판을 받지만, 불안한 상황에서 유일한 코치 역할을 하던 박병철의 실종 이후 나복만의 운명은 새로운 국면에 이른다. 즈음 박병철의 감에 따라 제 의지와 별개로 자신을 좋게 본 지학순 주교에 의해 원주교구 사건에 연루됐다고 굳게 믿은 나복만은 다시 한 번 자수를 위해 원주경찰서를 찾았다가 안기부 요원 정남운과 만난다. 그는 소시적부터 [데미안]을 백 번도 넘게 읽은, 대학시절 운동권 활동으로 잡혀간 중앙정보부 취조실에서 자진해 조직도를 넘기고 ‘배신의 아브락삭스’가 되어 돌아와 졸업 후 자발적으로 중정을 찾아가 요원이 된 자다. 원주의 안기부 안가에서 나복만은 정남운의 시나리오에 의해, 월북했다가 남파된 생부로부터 의식화되고 북에도 다녀온 간첩으로 조작된다. 갖은 고문과 ‘형제의 집’ 형제들의 줄소환 등으로 나복만은 체념하지만 마지막 진술서 작성 단계에서 고비를 맞는다.
글을 쓸 줄 몰랐던 것이 죄였고, 글을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이 목숨을 걸 만한 비밀이었던 나복만은 수하들의 모진 고문을 피투성이가 된 심신으로 버텨낸다. 사건을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정남운이 전술을 바꿔 나복만을 회복시키고, 결국 사실을 털어놓은 나복만은 400장이 넘는 파지를 만들며 정남운이 작성한 보좌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옮겨 적는다. 1982년 6월 27일, 안기부 취조실에서 거의 2개월 만에 나와 택시에 탑승한 나복만의 목적지는 원동성당이다. 조수석에는 앉은 정남운이 마지막 미션과 변심하지 말라는 당부를 전하고, 나복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남운에게 ‘개새끼’라는 진심을 전한 후 남부시장 로터리를 지나 엑셀 페달을 밟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다. 정남운은 의식불명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중상을 입은 채 쓰러지고 나복만은 절뚝이며 택시에서 내려 사라진다.
나복만의 운명이 슬픈 촌극으로 전락하는 데에는 석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박병철이 죽었고, 김순희는 원주경찰서에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부목사의 소개로 수원의 고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겨울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시의 극작가 나가이 예브쎄이는 2년간 준비해 발표한 희곡 [재떨이]에 대한 후배들의 사상 편향 공격을 받던 중 모스크바에서 온 기관원들을 맞이한다. 현리에 사는 여인 나복만 생모와의 결혼 사실조차도 한참을 더듬어 기억해 낸 그는 과거 월북한 나복만의 생부 나성국이다. 정남운의 그림 속에서 남한에 잠입해 아들에게 공산주의와 반미 사상을 주입했던 아버지는, 젊은 날 끝내 자신을 외면한 첫사랑을 따라 월북했고 나복만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정말 생부가 맞는지도 알 수 없지만 기관원들의 주의를 받은 그에게 중요한 것은 노후의 연금이다. 나복만과의 관계로 피해자가 된 형제들 대부분은 시간이 흐르며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고, 김순희는 멀리서나마 자신을 보호해주던 부목사와 뒤늦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부부가 된다. 가해든 피해든 사건과 관련됐던 많은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계급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이후의 삶을 이어간다. 나복만의 행방은? 경찰복을 벗고 식당을 운영하는, 훗날 아들의 사제 서품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온 최형사에 의해 밝혀진다. 마로니에공원의 캐리커처 화가, 그의 그림은 몽타주 같이 보인다.
첫 문장 “들어 보아라.”로 시작되는 소설에서 화자는 세계를 통치하듯 독자에게 작품 읽기에 대한 권유/명령/지시를 끊임없이 이어간다. 물론 미국이 한국에게, 전두환 정권이 공안기관들에게, 공안기관원들이나 ‘형제의 집’ 형들이 나복만에게 한 것과는 다른 나름의 고심과 배려가 묻어나는 안내다. 화자는 사회역사 장르의 활극처럼 펼쳐지는 다층적인 이야기에서 조각조각 등장하는 사건들과 느닷없이 출현하는 인물들에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무수한 괄호들 속에 성심껏 부연도 잊지 않는다. 서슬 퍼런 권력과 체포된 저항, 동상이몽 속에 범위를 넓히며 힘없는 자들의 삶을 앗아가는 비극이 이기호 특유의 너스레와 유머를 만나 슬픈 희극으로 전화한다. 너무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엮어내느라 구조가 조금 난삽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비루한 우리의 주인공들을 희화화하지 않는 작가의 시선은 역시 미더웠다. 미국과 한국이 속한 세계질서와 공안정국 수행자들의 권력관계, 관련자들과 피해자들의 역동까지 다양한 층위를 꿰뚫고 엮어낸 [차남들의 세계사]라는 제목 역시 탁월한 네이밍이라는 생각이다.
10월의 모임 책이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후 거의 모든 작품을 반갑게 읽고 있는 독자로서, 지난해 어느 도서관 강의에서 다시 읽은 [눈감지 마라] 그리고 [스페인 역사 다이제스트 100]으로까지 이어진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을 읽은 후의 여운을 떠올리며 내가 추천했다. 출간 직후 읽으며 뭔가 사회와 개인을 유려하게 엮어 빚어낸 유장한 대하서사 같은 이야기라고 느꼈었고, 그건 내용도 형식도 다르지만 영화 [보이후드]를 보고 느꼈던 온몸을 휘감는 꿈같은 시간의 흐름의 감각과도 유사한 꽤 귀한 감정이었다. 하여 이기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한 사람에게 축하까지 건네고 다시 읽었는데, 흐른 시간 덕인지 부미방과 원주와 나복만 정도의 키워드를 제외하면 그냥 초면 같은 데도 이전과 달리 작품에 쉽게 빠져들기 어려웠다.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너그러웠던 걸까, 지금의 나는 설마 그때보다 조금은 성장한 걸까 고민도 했는데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다시 읽을 때 새롭게 보이는 것들에 대한 기대를 충족할 수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이 복잡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조사하고 집필하며 작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애를 썼을까 싶은 생각은 들었다. 1980년대 초반의 원주, 작가가 나고 자란 지역의 어떤 부분을 역사의 그늘과 함께 이렇게 상세히 기록해냈다는 것만도 대단하긴 하다.
이기호
2014.7.18.1판1쇄찍음 2014.7.25.1판1쇄펴냄, (주)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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