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서 한 달 살기를 계획한 건 꽤 오래된 일이다. 일을 그만두고 7월과 8월, 대략 두 달을 서울에서 보냈다. 7월부터 백수가 됐지만 중순까진 내 의지와 별개로 어정쩡하게 늘어진 일을 마무리해야 했고, 오직 종료만을 목표로 하면서도 일한 시간보다 주리 틀고 짜증낸 시간이 더 길었던 그 마지막 일을 마친 뒤부터가 진짜 '자유시간'이었으니... 오롯이 놀고 먹은 날들은 6주라고 해야겠다.
덥고 습한 날씨가 힘겨웠지만... 쟁여두고만 있었던 <신영복 평전>이 온통 다 미운 마음을 조금은 달래주었고,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집어든 박상영의 <오늘밤은 굶고 자야지>는 작가의 퇴사 언저리 일상이 담겨 있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감동과 반성과 몰입의 독서를 오랜만에 선사한 조선희의 <세 여자>는 한 것도 없이 회의만 가득했던 어떤 마음에 약간의 객관적 거리와 균형감을 선사해주는 고마운 책이었다.
그리고 마침 개봉한 <마티아스와 막심>, 결과적으로는 몇 편 못 봤지만 전주국제영화제 장기상영회 등의 극장행으로 서울에서의 7월과 8월이 채워졌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와 <마미>, <단지 세상의 끝>을 개봉할 때 보았지만 그냥 쏘쏘-했었는데,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마티아스와 막심>은 좀 다른/인상적인/좋은 느낌이었고, 하여 5월 말과 6월 초 '돌란, 애니웨이'전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하트비트>, <로렌스 애니웨이>, <탐 엣 더 팜>, 소시적 출연한 단편 <여름의 기억>과 다큐 <자비에 돌란: 불가능을 넘어서>는 물론 한 번은 보았던 전작들까지 두세 번씩은 찾아 보았다.
감각적인 기교가 많이 사용되었음에도 과하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고 몇몇 장면에서는 얼핏 리버 피닉스를 떠올리게도 하는 자비에 돌란의 모습, 모닥불 장면은 <아이다호>의 오마주가 분명하다는 심증에 그야말로 심쿵하며... 개인적으로는 뒤늦게 본 <하트비트>가 참 좋았고.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이따금, 혼란스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호수에 뛰어든 맷과 함께 일렁이던 그 물결과 선율이 심장을 두드리듯 떠오르고는 했던 터라 남도여행을 앞둔 일요일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라이브러리톡 상영으로 두 번째 <마티아스와 막심>을 보았다. 두 번을 보고 나니 자비에 돌란이 구축한 감정의 세계에 푹 빠져버린 느낌이었고, 라이브러리톡에서 접한 내 나름의 해석과 다른 해설에 대한 재확인도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엣나인의 시간차 굿즈 공세와 함께 7월 23일 정식 개봉. 좀은 과도하다 싶기도 하고 좋은 영화를 배급하면서 왜 이렇게까지 굿즈에 집착할까 싶기도 하고 sns 피드에 오르는 호들갑스러운 홍보문구들에 가끔은 눈살을 찌푸리게도 되었지만, 마침 아무데도 속한 바 없이 일상의 큰 구멍을 채워야 할 시간에 처한 내게 <마티아스와 막심>은 참으로 거할 만한 쉼터였다.
하여 지난해 10월 8일 부산에서 시작해 8월 26일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까지 나는... 막스와 맷, 브라스, 리사, 리베트, 마티스, 사라, 에리카, 프랭크, 샤리프 들을 열다섯 번이나 만난 사람이 되었다. 이전에도 아마 이후에도 다시는 없을 일. 아무래도 영화와 책 말고는 별다른 위로가 없는 일상에서, 그렇게 2020년의 7월과 8월을 지냈고. 이제 떠나보낸다.
8월 27일 오후 서울을 떠난 나는 지금 통영이다. 반신반의하며 예약한 숙소에서의 첫날은 룸컨디션 덕에 복잡해진 심사에 겹친 에어컨 고장으로 꽤나 우울했다. 이미 입금했으니 돌이킬 수는 없지만 여기서 9월을 맞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른 숙소를 하루 예약했을 만큼. 이러저러한 우여곡절로 이튿날은 차라리 방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 건물 3층에서 저 건물 3층으로 바리바리 싸오고 택배로 부친 짐들을 옮기며 팔다리 여기저기 멍이 들고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더랬지만... 덕분에 적당히 누추하고 적당히 쾌적한, 사춘기 사람처럼 소중히 챙겨온 것들까지 더해 꽤 마음에 드는 방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통영에 도착해 이틀은 정리와 청소에 매진하고, 3일차에야 충렬사 앞 백석시비에 가서 도착 인사를 전하고 좋아하는 서피랑과 강구안 일대를 돌아봤다. 5월에 왔을 때하고는 또 달라진 강구안 뒷골목, 군데군데 붙어 있던 백석 시인의 시 판넬은 이제 열 개 남짓만 남은 것 같고, 오타에 덧입힌 몇몇 빨강 글자가 무색하게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괜히 마음이 아쉽기도 하였다.
9월이 목전인데 여전히 습기와 폭염이 위용을 자랑하는 중이며, 주중에는 다시 태풍이 온다 하니... 기어이 통영에 내려온 대가인가 싶기도 하지만. 너무 덥거나 바람이 많이 불거나 비가 많이 내릴 때에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챙겨온 책을 읽고, 감당하지도 못할 기록 강박으로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을 때마다 비공개 저장해놓았던 포스트들을 채우며 통영에서의 가을을 보낼까 한다. 실은 이번 한 달 동안 꼭 수행해야 할 미션이 있고, 9월 중순에는 부산에서 영암에서 또 서울에서 지인들이 찾아올 예정이라 어쩌면 한 달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버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무생물이되 생물처럼 일상에 함께할 그대들이 있어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