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일지2022. 7. 2. 17:54



어제 보았던 파리 한 마리가 가게를 떠나지 않는다. 어제 이래저래 사람들이 드나들며 문이 열려 있는 틈에 들어온 것 같은데 나갈 생각이 없나 보다. 출근 직후에 존재감을 잠시 드러내고는 잠잠했는데, 두어 시간 지난 후부터 자꾸만 책상 주위로 접근하고 내게도 돌진해 성가시다. 나가라고 뒷문도 잠깐씩 열어둬보고 너무 다가오면 뒷문 쪽으로 유도도 해봤는데 소용이 없다. 내일까지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작별 기념 사진 찍고 뒷문을 열어뒀는데 적당히 나가주면 좋겠다.

5월 하순 처음 가게를 봤을 때는 길가로 난 전면 유리창이 흰색 바탕의 시트지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고, 오래된 이발관이었지만 시의 지원 사업으로 간판과 외관을 정비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깔끔했다. 이발관을 상징하는, 시트지 하단을 장식한 빨강 파랑 흰색 선들이 프랑스 국기 색깔이랑 같아서 재미있었고 굳이 제거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계약하기 전 확인한 바, 이후 세입자에 대한 배려인지 건물주님께서 시트지를 깔끔히도 뜯어내셨다. 가게가 환해진 건 좋은 일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내부가 훤히 보이는 공간이 되었고, 2차선 건너 맞은 편 보도에는 대여섯의 동네 어르신들이 상주하신다. 이곳을 엄청 눈여겨보거나 하시지는 않겠지만, 직선거리 20미터나 될까 싶은 맞은 편의 존재들과 하루에 몇 시간을 마주하는 상황은 생각지 못한 옵션이다.

이 상태로 이틀(이래봐야 11시간 남짓)을 보내려니 블라인드 설치를 서두르든 책상 위치를 변경하든 해야할 것 같은데, 단독으로 사용하는 공간이 아니고 공유파트너는 다음 주에 내려올 예정이라서 내일까지는 꼼짝없이 이럴 판이다. 어제 생각했던 길가로 둔 책상 위에 놓아둘 무언가들도 집에 가서 살짝 고민했지만 결정하지 못했는데, 이 역시 나만의 단독 공간이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멈칫함이다. 나 혼자라면 내맘대로 해보고 아니면 바꾸고 문제가 있으면 책임지면 되는데, 그게 아니다 보니 뭔가 상의하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그조차도 그다지 편하지 않다. 최소한 1년은 지속될 상황이니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부대끼고 부딪치다 보면 나아지려나.

그래도 내내 흐리던 날씨가 어제오늘 살짝 개었고, 덕분에 오후 5시쯤 공간에 드리운 나무와 햇살의 콜라보가 마음에 들었다. 마침 정류장에 멈춘 버스 덕분에 맞은 편 어르신들께 실례를 범하지 않고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고, 해가 있는 날에는 늘 만날 수 있는 장면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어제 귀가하며 2년만이라도 퇴근은 참 즐겁다 생각했고 오늘 오전에는 당연히 출근이 참 귀찮다고 느꼈다. 역시 백수가 체질인가 싶지만, 그렇게만 지낼 수 없다는 걸 실감했으니 지금 이러고 있는 거겠지. 오후에 벨벳언더그라운드를 간만에 들었는데 내일 날씨와는 더 어울릴 것 같아 기대된다. 오늘도 즐겁게 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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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