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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앙드레는 반신이 마비된 채 생기와 의욕을 잃고 병실 침대에 누워 있다. 두 딸 엠마뉘엘과 파스칼이 병원을 찾아 보살피지만 의지대로 몸을 가눌 수도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앙드레는 절망적이다. 조금씩 차도를 보이지만 온전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남은 날들에 대한 미련 없이 스스로의 종지부를 원하는 앙드레는 엠마뉘엘에게 안락사의 결심을 이야기하고 도와줄 것을 청한다.
앙드레는 우아한 취향과 깊은 심미안을 지닌 예술애호가로 살았다. 성소수자임을 알면서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쓴 여인과 결혼해 낳은 딸들은 글을 쓰고 음악을 한다. 거동이 불편한 채 침대에 붙박힌 전 남편의 병실을 찾은 전 아내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그 역시 몸이 편치 않다. 부부는 서로에게 과거의 형식적 관계로만 남은 사이이거나 어쩌면 가슴 깊이 묻은 회한이다. 결혼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조각가인 엄마는 젊은 시절 그를 사랑'했었'노라고 딸에게 말한다. 가족 모두가 경계하고 배척하는 제라르는 앙드레의 연인이었다. 앙드레를 상처입히고 물건을 욕심내기도 하는 제라르는 부랑자 같은 입성으로 주위를 맴돌며 가족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안락사는 프랑스에서 불법이다. 엠마뉘엘은 번민과 충격 속에 스위스의 한 단체를 수소문하고 파리에 온 담당자를 앙드레와 함께 만난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앙드레의 변호사가 법적 쟁점을 검토하고 과정은 비밀에 부쳐진다. 일이 진행될수록 앙드레와 엠마뉘엘의 상태와 표정은 대조적으로 변화해간다.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앙드레는 소식을 접하고 날아온 미국 사촌들과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사랑하는 손자의 연주회를 보기 위해 날짜를 조금 미룬다. 담담하고 천진하게 남은 날들을 보내는 앙드레와 달리, 거부할 수 없는 부탁을 수행하는 엠마뉘엘은 혼란스럽고 힘겹다.
앙드레는 조용히 삶을 정리해나간다. 두 딸과 병원의 감시에도 앙드레의 병실을 몰래 찾아들었던 제라르에게, 그가 원하는 대로 어렵사리 직접 이별을 통보한다. 디데이를 앞두고 단골 레스토랑을 찾아 엠마뉘엘과 사위와 마지막 식사를 하며 오랫동안 자신을 대접해준 웨이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파리를 떠나기 직전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고 두 딸이 조사를 받는 등의 해프닝이 벌어지지만, 앙드레는 '무사히' 스위스로 향하는 구급차에 오른다. 그를 이송하는 구급대원들과 대화 중에 고비를 마주하지만 '다행히' 계획이 어긋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앙드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엠마뉘엘과 파스칼은 함께 있기로 했다. 아빠의 죽음을 일찌감치 배웅한 자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긴 밤을 보낸다. 마주앉아 빵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어릴 적처럼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며, 영원한 잠으로 떠나고 있을 아빠를 생각할 것이다. 앙드레는 원하던 대로 평온하게 떠났다고, 이튿날 자매에게 담당자의 연락이 간다. 구급차에 오른 앙드레는 출발하기 전 엠마뉘엘에게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쓰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소설이 되었고, 다시 영화가 되었다.
프랑스의 명배우들이 총출동했다고 하는데 내게 친숙한 느낌의 배우는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이자이자 큰 딸인 엠마뉘엘 베르네임을 연기한 소피 마르소뿐이었다. 하이틴 스타의 이미지가 각인된 탓인지 중년의 모습이 새로웠고 여전히 아름답지만 자연스럽게 나이든 모습이 편안하고 반가웠다. 엠마뉘엘의 의상이나 소품에 다양한 블루톤이 쓰였고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아버지의 당부를 거절하지 못하고 죽음의 조력자가 된 인물의 냉철함과 불안, 우울함과 혼란 같은 걸 상징하는 걸까 싶었다.
한참 전 프랑소와 오종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무렵에는 부천에 살았고 서울까지 영화 보러 갈 엄두를 내기 어려운 때였다. 보지 못한 영화와 감독에 대한 화려한 수사들을 먼저 접하던 중 좋아하는 선생님의 해설이 담긴 dvd 박스세트가 출시되었고, 알듯 모를듯한 해설만 읽고 그 영화들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껏 보지 않았다. 나중에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를 극장에서 재미있게 보았는데 이미지로 각인된 찬사만큼 도발적이거나 경쾌한 기발함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한참 잊었다가 그의 작품인지도 모른 채 [신의 은총으로]를 아주 흥미롭게 보았는데, 보지 못한 영화와 함께 각인된 이미지에는 역시 부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겨울 본 [썸머 85]가 참 좋았지만, 일찌기 보지 못한 영화들과 밀착해버린 이미지와 내가 영화에서 받은 느낌의 간극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랬는데 죽음 자체가 가지는 전복성과 안락사라는 소재와 주제가 야기하는 무게 때문인지, 파격을 구사하기에는 감독의 인생도 커리어도 안정되었기 때문인지, 애초의 이미지가 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난해한 이슈를 사실적으로 다룬 평이한 드라마였고, 어쩌면 원작을 토대로 누가 연출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규모와 화제성에 경도되고 자극적인 소재와 주제의 작품들이 압도적인 한국의 상업 영화 경향을 생각하면, 오종 정도의 경력과 위상을 지닌 감독이 '이야기'에 천착하는 작품을 꾸준히 만드는 것만도 관객으로서는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톤이었고 특별히 강렬하게 느껴지는 씬은 없었는데, 엠마뉘엘이 자신이 먹으려고 병원에 사갔다가 아버지가 한 입 베어문, 아버지의 생생한 흔적이 배인 가방 속의 샌드위치를 냉장고에 넣었다가 며칠 뒤 휴지통에 버리는 장면은 기억에 남는다. 엠마뉘엘에게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수용하고 실행하면서 불현듯 교차하는 선연한 존재감과 부재의 예감 사이에서 냉정을 잃지 않으려는 조용한 의지 같은 것들이 내내 느껴졌고, 잠시지만 생각에 잠기며 망설이고 멈칫하는 그 장면의 표정과 행동이 인상적이었다.
10/12, 영화의전당 중극장
https://www.biff.kr/kor/html/archive/arc_history_2_view.asp?pyear=2021&s1=355&page=3&m_idx=56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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